처음의 아름다움
첫사랑, 첫키스, 첫만남, 첫눈, 첫날밤…. '첫'이란 접두사가 들어있는 말은 누구에게나 가슴이 뛰는 설렘을 준다. 시인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이 처음으로 활자화되는 첫작품과 처음 묶는 첫시집이 그렇다. 시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기는 첫시집의 경우 더욱 그렇다.
1987년 10월 나는 첫시집을 가졌다. 그 해 4월 출판사에서 편지를 보냈다. 내 시집을 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저기 발표한 시들을 정리해서 출판사로 보냈고, 그 해 가을 젊은 시인이었던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첫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그 시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바다가 보이는 교실'(창비시선65)이다.
그 때 경남 진해에서 시집의 제목과 같은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국어교사였던 나는 아내와 함께 상경해 서울 마포에 있던 출판사를 찾아가 내 첫시집과 만났다. 얼마나 가슴이 뛰고 설랬던지 모른다. 첫사랑의 여자를 만난 듯, 그 여자와 처음 입맞춤을 한 듯 어지러웠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전교생 앞에 서서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시를 처음 낭송하던 때처럼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나중에는 시집을 가슴에 품고 눈물까지 흘렸다. 그 첫시집에는 20대 중반의 내 흑백사진이 실려있다. 시집에 실을 사진을 보내기 위해 학교 사진사 아저씨에게 부탁해 내가 담임을 맡았던 반의 화단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불혹을 넘긴 지금의 내 모습과는 다른 젊은 시인으로서의 싱싱함이 담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첫시집에는 국어교사 시절의 내 비망록과 같은 시편들이 담겨 있다. 나에게 모교였던 진해 남중학교에 발령을 받고 쓴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 그것이다. 그 시들은 연작시인데, 같은 제목의 첫시집에 10편이 실려있고, 학교를 떠나 신문사로 옮겨서 낸 두 번째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에 한 편이 더 실려있다.
내가 처음 그 시를 쓴 계절이 유월이었나 보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1'의 처음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희들 속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구나 저 산에 들에 저절로 돋아나 한 세상을 이룬 유월 푸른 새잎들처럼, 싱싱한 한 잎 한 잎의 무게로 햇살을 퉁기며 건강한 잎맥으로 돋아나는 길이 여기 있구나
산중턱에 위치한 학교는 앞으로는 맑고 푸른 남해 바다가, 뒤로는 벚꽃의 도시를 진해를 안고 있는 장복산이 펼쳐졌다. 내가 처음 담임을 맡는 교실에서는 유난히 바다가 잘 보였다. 다른 교실들은 앞에 서있는 고등학교 건물 때문에 바다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반 교실은 축복처럼 바다가 보였다.
푸른 바다는 접시 속에 담긴 것처럼 늘 고요했고 대죽도, 소죽도라고 부르는 형제섬이 다정하게 떠 있었다. 수업을 하다가 지치면 자주 그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어린 시절 헤엄을 즐기던 고향 바다며, 내가 모교의 중학생이었을 때도 늘 바라보며 자란 바다였다. 초년 교사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친구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오랫동난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빈 교실에서 바다를 보며 시를 썼다.
학교에서는 학기초가 되면 환경미화심사라는 것을 했다. 어느 교실이 잘 꾸며져 있는가를 심사해 최우수반을 선정해 그 반 안내판 아래에 아름다운 교실이라는 펜던트를 달아주었다. 환경미화심사를 앞두고 나는 우리반 아이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교실에서는 바다가 잘 보이니 저 바다를 자랑하자. 유리창을 한 장 한 장 깨끗이 닦아 심사를 하러 오시는 선생님들에게 우리반은 저 바다를 걸어놓았어요, 라고 자랑하자."
그래서 우리반 아이 한 명과 유리창 한 장이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자기가 맡은 유리창을 경쟁하듯 쉬는 시간마다 열심히 닦았다. 얼마나 깨끗하게 유리창을 닦았는지 유리창이 없는 것 같았다. 유리창이 깨끗해지자 바다도 깨끗해졌다. 우리는 유리창 대신 바다를 걸어 놓은 것 같은 행복한 착각에 빠졌고, 교실 유리창에 걸어놓은 바다 덕에 환경미화심사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열이라는 착한 아이가 있었다. 선천성 심장병을 앓는 열이는 체육시간이 되면 운동장에 나가 달리지 못하고 늘 나무 그늘에 앉아 쉬었다. 열이는 아픈 심장으로 하여 친구들과 함께 달릴 수 없었다. 체육시간 마다 풀이 죽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열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도 아팠다.
열이는 유리창 청소에 아주 열심이었다. 많은 유리창 중에서 열이의 유리창이 가장 빛났고, 열이의 유리창에 담긴 바다도 가장 푸르게 빛났다. 나는 열이의 유리창을 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열이는 더욱 신이나 유리창을 닦았다. 열이가 학교에 오는 이유는 오직 유리창을 닦기 위한 것 같았다. 유리창은 열이의 희망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 연작시의 10번째 시에 열이의 마음을 담았다.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 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 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그러나 착한 열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열이의 부음을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열이의 안부가 궁금해 찾았더니 열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욕심이 많았던 나는 결국 아이들 속으로 난 그 길과 열이가 깨끗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을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왔다. 얼마 전 열이와 한 반을 했다가 서울로 전학을 갔던 제자가 편지를 보내며 '열이. 한없이 순하기만 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만 했던 열이. 그도 이제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라고 안부를 물어와 열이가 이미 세상에 없다는 소식을 전하며 오랜만에 열이를 생각했다.
열이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그 시를 올 중학교 1학년2학기 교과서에 수록된다는 연락을 해왔다. 시인으로 교과서에 내 시가 실린다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열이의 착한 마음이 교과서를 읽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게 되어 기쁘다.
처음은 늘 아름다운 것이다. 다시 그 처음으로 돌아가 열이와 함께 유리창을 닦고 싶다. 열이가 자신의 유리창에 그려 놓은 바다가 보이는 그 교실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다.
<자료 출처 : 정일근 홈페이지 '울산시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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