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6학년4반 오예진이라고 합니다.저는 임경업 장군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조선 후기의 명장으로 1618년 동생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고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으로 부임해 군량과 군기 구비에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올랐습니다. 명나라의 공유덕 등이 후금군과 내통하려고 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도 크게 알려젺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지켜 적을 막는데 힘썼는데 청군은 임경업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한양으로 진격했고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피했다가 이듬해 정월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답니다.그 뒤 청나라 정예 기병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압록강에서 무찌르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 남녀 백이십여 명과 말 육십여 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답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명군을 치기위해 1637년 2월 조선에 병력동원을 청하자 수군장이된 임경업장군님은 선봉에 서는것을 주저하여 명나라의 도독과 내통하여 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중이게 했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청나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같이 했을 뿐,한 번도 명군과 싸우지않았습니다.1641년 정월 임장군은 배를 버리고 육로로 청나라의 허와 실을 일일이 정탐하면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청나라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눈치 챘으나 확증을 잡지못해 고민하던중 임장군이 청나라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처의 공경으로 명의장군 홍승주가 투항하자 그의 부하들이 임장군의 작전에 대해 말해버렸습니다.청에서 이러한 확증으로 압력을 가하자 조정에서는 임장군을 체포해 청으로 압송하도록 하지만 압송도중 도망쳤습니다.그리고는 중이되어 명나라로 망명할기뢰를 잡았습니다.그동안 조정에서는 청의독촉에 못이겨 그의처,형제등 가족을 체포래 청으로 보냈습니다.임장군의 아내 이씨는 심양옥에서 자살을 했습니다.청나라왕은 임장군의 재주돠전략을 아껴살려두려고 하지만 가장 임장군과 가까웠던 김자점이 그의처형을 주장합니다.그래서 그해 임경업장군님은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겻다는 죄를쓰고 형리의 모진매를 이기지 못해 마림내 숨지고 말았습니다.그는 우숙충정에 뛰어난충신이고 무장이었지만 가장 불행한 장수 였습니다.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했지만 조국이 이를 뒷받침하지못했던것입니다.입경업장군처럼 나라에 애국심을 갖고 충성하고 지키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