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를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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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임선영 | 등록일 | 08.11.13 | 조회수 | 239 |
(톨스토이를 읽고..) 수한초5학년1반임선영 나는 처음에 톨스토이가 누군가 하고 이책을 선택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이 책을 선택을 선택하였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톨스토이는 1828년도에 러시아 툴라 지방의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영주인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톨스토이의 첫째 형의 이름은 니콜라이였고,둘쨰형은 세르게이이다.셋째형은 드미트리,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마리야였다. 톨스토이의 어릴 적 이름은 레프였다. 사자란 뜻이었지만 레프는 이름만큼 씩씩하지 않았다.1830년에 어머니 마리야 니콜라예브 볼콘스키야가 사망하였다.그때 레프가 딱 2살때였다. 그런 어린나이에 어머니 처럼 따뜻하게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게 레프는 실망을 했다. 나는 그때 레프를 불쌍하게 생각하였다. 그것을 알아챈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은 아이들을 위해 타치야나 라는 먼 친척뻘 되는 아주머니를 데려왔다. 레프네 형제들은 예쁘고 상냥한 아주머니를 무척 따랐다.타치야나 아주머니 역시 시집도 가지 않은 채 어린 레프 형제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톨스토이 가정에 대한 타치야나 아주머니의 애정은 어머니를 잃은 오남매에게 좋은 영항을 주었다.레프는 어른이 된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타치야나 아주머니에게서 정말 많은 기쁨과 사랑을 배웠다. 아주머니는 말뿐 아니라 실천하는 사랑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라고 말했다. 난 이말로 인해 레프가 타치야나 아주머니를 어머니처럼 생각했던 것을 알아챘다. 레프의 아버지는 자녀 교육을 소홀히 하지않았다. 그 당시 데게 귀족들은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톨스토이형제들도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톨스토이 형제들의 가정 교사는 독일인과 프랑스인이다. 레프형제들이 이렇게 마음껏 공부하는 것도 어머니인 마리야 니콜라예브 볼콘스키야가 물려받은 재산덕분이다.1836년 톨스토이형제는 아버지 니콜라이가 뇌졸중으로 급사해서 다섯 남매가 유산을 나눠가지고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톨스토이는 모스크바에 있었다.톨스토이도 자기형이랑 같이못있는것이 불쌍하다.난 아마 매일 울었을것이다. 1884년 톨스토이 나이가 16이다. 두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세 번만에 카잔 대학 동양 어학부에 입학하였다. 톨스토이의 끈기는 아주대단했었다. 2번이나 실패를 했는데..보통사람이라면 그냥 포기했을 것이다.나도 톨스토이처럼 끈기있게 살아야지. 카잔 대학의 딱딱한 강의가 마음에 안든 나머지 톨스토이는 강의 시간을 빠져 선생님들 한테 미움을 받았다. 왜 강의 시간을 빼먹었을까? 인문계이고 무엇보다.자기 형들도 다닐텐데. 난 빼먹지않을것이다. 톨스토이가 23살이 됬을땐 큰형 니콜라이의 말을 듣고 카프카스에 갔다. 그곳은 현재 전쟁터였다. 하지만 경치가 아름다워서 톨스토이는 거기서 경치를 일기에 적었다.자꾸 이동하는 바람에 톨스토이는 포병 부대에 입대해서 '유년 시절'을 구상했다. 전쟁터는 위험한 곳 인데 자꾸 니콜라이를 따라가려는것일까? 그리고 니콜라이는 왜 위험한 전쟁터에 톨스토이를 데려가려는 것일까 ? 아무래도 형제여서 같이있을려고그런가보다 난 소현이 잘 안해주는데..오늘부터 소현이를 잘해줘야겠다. 24살되는 해에는 <현대인>에 필명 L.N 으로 작품 '유년 시절' 을 보냈다. <현대인>에서 곧 회답이 왔다. 작품 유년 시절이 실리자 잡지사에는 L.N이란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 전화와 편지가 빗발쳤다.아..나도 유명해지고싶다. 거듭되는 실패로 좌절하던 톨스토이에게 '유년 시절' 을 발표하게 된것은 큰힘이 되었다.톨스토이는 계속해서 '소년 시절','청년 시절' 등의 소설을 쓸 계획을 했다.톨스토이는 크림 전쟁 이후에'세바스토폴 이야기' 란소설을 썼다. 내용은 전쟁의 비극을 그린 이 소설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이 책을 읽은 황후는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렸다고한다. 진짜 눈물을 흘렸을까? 의문점이 생긴다. 29살때에는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여행하고 돌아와 '청년 시절'을 발표하였다. 31세에 농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농민 학교를 열고 스스로가 농민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나도 꿈이 선생님이다.그리고 공부에 필요한 책,학용품 등은 공짜로 주었다. 공부에 목마른 농민들의 자식들은 가고싶었지만 농민 들은 농민 학교에 가치를 못 느꼈다. 농민 들은 공부하는 것 보단 일하는 게 더 낳다고 생각하고있었다. 난 차라리 일하는 것 보단 하루종일 공부를 하겠다. 하지만 그후에는 농민들의 생각이 바뀌서 농민 학교는 농민들의 호감을 사고있었다. 1860년 큰형 니콜라이가 사망하였다.난 톨스토이를 불쌍하게 생각하였다.열심히 병간호 하였지만 폐결핵이었던 니콜라이는 그만 톨스토이 곁을 떠나고 말았다. 나도 엄마한테 잘해드려야겠다. 다다음 해인1862년 9월 톨스토이는 마음에 두고있던 의사인 베르스씨의 둘째 딸 소피야와 크레믈린 궁전 부속 교회에서 결혼하였다.소피야는 똑똑하고 총명한 아가씨였다.나도 똑똑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새 큰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카자흐를 발표하였다. 톨스토이는 행복이 연발로 팡팡 터졌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1864년 부터1899년까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교의신학비판,를 발표하였다.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도스토예프키가사망하였다.저작권을 부인에게 넘겨서 바보이반,두 노인,무엇을 할 것인가,악마,를 발표하고 부활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톨스토이가 이 많은 책을 혼자 발표했다니..믿기지않는다. 1895년에는 막내아들 이반이 죽었다.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슬퍼할세도 없이 부활을 발표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아들이 죽었어도 부활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에서 끈기가 느껴졌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하였다. 그리고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나는 이해가 안된다. 노벨상을 왜 안받지? 나라도 그냥 받을 텐데..이해가 안된다. 1910년,10월28일, 톨스토이는 집을 나갔다. 아내와 의견이 안맞아서 나갔다니..톨스토이는 속좁은 남자다. 11월7일 톨스토이는 작은시골 역의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많은 기자들과 가족들이 찾아왔다. 그 역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는 고통을 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너희들은 왜 나 하나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느냐?" 톨스토이의 죽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나도 배려심이 이렇게 많아져야겠지?그리고 그가 남긴 유언은 나 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그가 묻힌 곳은 밝은 초원, 야스나야 폴리야나의 조용한 숲에묻혔습니다.어린 시절, 그가 그토록 사랑하며 따르던 큰형 니콜라이가 초록빛 지팡이를 묻어두었다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톨스토이가 불쌍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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