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란 책을 읽었다. 그 동안 나는 로마를 고대 나라들 같지 않게 번영했다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결국은 사라지고만 나라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그 당시 어느 나라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로마가 그만큼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인만이 가진 ‘철저한 개방성’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입지조건만 좋으면 당당한 도시를 쉽게 건설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춘 민족이 적어도 두 개는 존재했다. 하나는 중부 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이다. 그러나 이 두 나라에게 그 당시의 로마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나보다. 18살의 ‘로물루스’가 로마에 자리잡고 초대왕이 되기까지 로마의 땅에는 딱히 이렇다할 도시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로마땅에 처음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은 방금 언급했던 어린 청년 ‘로물루스’였다. 그는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고 신들에게 산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로마건국의 초석을 닦았다.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지는 않았다. 국정을 왕,원로원,민회 3개의 기관으로 나누어 로마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내가 놀랐던 것은 로마의 왕 선출 방식인데, 왕을 민회에서 투표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당시 민회의 구성원은 로마 시민 전체였기 때문에 결국 왕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선출된다고 볼 수 있다. 타르퀴니우스가 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선거로 왕을 뽑는 로마의 정치 체제 덕분이었다. 또 민회는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의 승인여부를 결정하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왕의 말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던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로마의 정치체제는 꽤나 개방적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7대 왕 타르퀴니우스는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독재적 전제군주였다. 사람들은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라고 불렀다. 결국 그는 로마에서 추방당하고 거만한 그의 치세는 25년만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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