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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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성은 | 등록일 | 10.10.26 | 조회수 | 26 |
겨울 산을 오르다 갑자기 ㄸ잉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 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 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는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ㅇ르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 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고영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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