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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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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작성자 남정미 등록일 13.08.21 조회수 16

1997년 10월 29일 집안의 첫 손녀로 태어났다. 그 누구보다 더 많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5살 전까지는……. 항상 귀여움만 받고 자라던 내가 첫 장손인 내 동생에게 밀려났다. 친척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엄마와 그리고 친할머니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친할머니는 네가100일 되었을 때도 보고 싶다고 이 시골에서 서울까지 올라오시곤 하셨던 할머니다. 그런 할머니가 변한 건 다 내 동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8살 때 나는 내 동생이 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나를 밤늦게까지 공부시켰던 엄마 그리고 항상 엄마 품에는 내 동생이 껴있었다. 나는 항상 유치원에 가야한다며 가족이 와도 일찍 재웠지만 나와는 달리 내 동생은 항상 자기 전까지 엄마와 함께 있었다. 밖에서 시글벅적한 소리를 들으면 나는 왠지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이모들이 너무한다고 옆에서 말려보기도 했지만 엄마는 잘 마음을 바뀔 때가 없었다. 내동생과는 달리 나는 8살 때부터 항상 학원에 시달렸다. 발레 수영 피아노 한글 영어 수학 논술 등등……. 그래서 엄마는 그 다음날 일과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가끔 물으면 이렇게 변명하시곤 한다. 하지만 그 나이에 그 많은 학원을 감당해내기는 정말 힘들었다. 가장 싫었던 건 논술과 엄마의 개인 과외였다. 항상 엄마가 나를 잡고 공부를 시작하면 항상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더 괜히 위축되어 있었고 그러면서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논술은 더했다. 소설책과 같은 두깨의 이야기책을 일주일 안에 다 외워야 했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왜 그 책을 다 외워야 하는가... 그 선생님이 아직도 너무 싫다……. 다시는 일 학년 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다는 정말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만약 일학년때부터 그런 생활을 해 왔다면 내가 다른 나라로 가지 않았다고 했을 때 나는 아마 다른 도시의 애들처럼 극심한 공부의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욕심은 그 누구도 채울수 없었으니까.... 하지만그 고통도 잠시 지금부터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것 들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다2004년 10월 29일 나는 갑자기 태국으로 떠나게 된다. 할아버지의 사업으로 잠깐 태국에 들어가 계셨던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모두 우리의 학교와 우리의 교육을 먼저 더 중요시 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신혼부부같았다. 그때는 그렇게 많은 학업에 시달리다가 다시 유치원으로 내려와서 천천히 놀면서 하는 그 생활이 너무 즐거웠다. 항상 저녁이 되면 자주 가족들끼리 저녁도 먹으러 나가고 집에서 일하는 언니가 있어서 남부럽지않게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처음으로 도둑질이라는걸 해 보게 되었다. 처음으로 친구의 물건이 탐이 나 보였다. 그 필통안에 들어있는 그 알록달록한 연필들.... 그때는 나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수 없었고 그 친구와도 친하지 않은 사이였다. 그래서 항상 시시때때 그 아이의 필통만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치만 보던 어느날 그 아이의 연필통을 내 손안에 넣었다. 정말 갖고 싶기만 했던 그 연필통이 내 손안에 들어왔는데 별로 기쁘지도 오히려 실망을 했다. 그저 남에떡이 더 커보이기만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님이 그 아이가 연필통을 잊어버렸다고 선생님께 말하는 바람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아이의 연필통을 다시 그아이의 사물함에 넣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그렇게 끝이났다. 한번 도둑질을 하니 그 다음에는 또 할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쫌 커서 학교가 끝나면 돈을 표로 바꿔서 식당에서 가서 밥이나 간식같은 것들을 사 먹을 수 있었다. 그때 가장 우리사이에서 유행이였던 과자는 빼빼로같이 길고 짭짜름한 소금같은게 묻어있었다. 그때는 그것보다 더 많있는 간식은 없었다, 그 간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나는 다른 아이의 지갑에 손을 댔다. 어떻게 표를 살지도 몰라서 다른 아이의 표를 훔쳤다. 그리고 엄마에게 들켰다. 나는 그때 엄마한테 계속 빼면 엄마가 모를줄 알꺼라고 생각하고 계속 뺐다. 하지만 지금 생가하면 누가 8살짜기아이한테 그것도 사준적도 없는 그 지갑이 친구가 줬다는걸 어느 바보가 그걸 모를까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도둑질 해서 혼났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대지 않을줄 알았다. 하지만 마트에서도 껌을 훔친적이 있었다. 나는 가끔 엄마아빠몰래 언니랑 내 동생이랑 아파트에 붙어있는 마트에 가서 과자를 사러 간 적이 가끔 있었다. 그때는 그냥 이 껌이 먹고싶었던게 아니라 한번 훔쳐보고 싶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걸 언니한테 보여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쉿!아무한테도 말하지마 너 잘못하면 경찰한테 수갑차고 잡혀가 엄청 큰일나 엄마 아빠도 못 봐 이 껌이라도 저 주인이 알면 얼마나 화내는 일인데” 아직도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 너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때 어떻게 태국어를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 껌을 바지 안으로 숨겼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내 비밀상자에 넣었다. 그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도둑질이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웃음만 나온다. 다시는 올수는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만약 태국에서 처럼만 그럴수 있다면 그 무엇도다 행복한 시절은 없었을거 같다. 하지만 불행도 이런 불행은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중국으로 가자는 소리에 또 부랴부랴 집을 싸들고 중국으로 날아갔다. 너무 적응되지 않는 그 나라 말 그리고 모든게 내 뜻되로 되지 않았다. 좋은 집 그럴듯한 학교에서 다녔고 집에서 일해주는 언니부터 이제는 입에 붙은 영어 하지만 모든게 다 문어지고, 이상한 아파트에 나이많은 일하는 아줌마가 그리고 학교는 중국학교와 같이 쓰는 학교여서 눈치를 보며 다니고 항상 왕따를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던 애들 그리고 어색한 한인학교에 중국어교실까지.... 이제 막 익숙해진 태국어와 영어들 그리고 그 모든 생활패턴이 모두 바뀌게 되었다. 한국애들과 오래간만에 지내서 어떻게 헤야 할지 그리고 뭘 해야한지 처음 친구를 어떻게 사귀여야 할지 몰랐다. 돌아가면서 왕따를 시키고 공부는커녕 아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바뻣다. 집에가면 중국어선생님이 오셔서 알 수 없는 한자들을 외워워야만 했다. 하지만 신은 그래도 나의 손을 들어주셨다. 회사에서 일하시던 이모가 우리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이모의 의지가 아닌 엄마가 간곡한 부탁으로 아니 거의 협박의 수준이였다. 이모가 들어와서 살게 된 후 모든게 바뀌었다. 항상 일요일만 되면 이모가 우리를 대리고 적어도 꽃집이라도 대려갔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가족들이 외식도 자주했다. 그 생활과 패턴이 너무 좋고 이제 중국어도 한국어처럼 쓰게 되었다. 모든게 중국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에 어쩔수 없이 또 옮기게 되었다. 캄보디아로... 영국이나 프랑스로 간다는 소리가 내 귀에서 맴돈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처음듣는 나라 캄보디아로 간다니... 후진국이라는걸 설명하지 않아도 이름만으로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항에 내렸는데 내 예상이 빛나간줄 알았다. 정말로 멋졌다. 하지만 원래는 시끌벅적해야할 공항은 엄청 조용하고 범상치 않는 조각상들 그리고 현대음악이 아닌 정말로 띵가띵가 장단의 노래들... 공항을 나왔는데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말그대로 허허벌판이였다. 옆에는 맨땅이고 아스팔트가 쭉깔려있는데 영화에서나 총싸움을 할것같은 곳들 그런 장소... 여기서 영화를 찍으면 정말 멋있을거라는 생각이 지금와서야 든다. 하여튼 그때는 너무 충격이였다. 북적북적하던 것들은 다 없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는 집도 없어서 호텔에서 머물렀다. 엄마는 일어나서 집만 알압러 다녔고 우리는 항상 호텔에서 놀고 공부했다. 당연히 아침밥은 호텔밥을 먹고 점심이나 저녁은 밖으로 나가거나 라면을 먹을때도 있었다. 방은 잘 구해지지 않았다. 집값만 비쌋다. 그래서 결국 간곳은 이곳이 정말 싼 곳인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집에 들어갔다. 마당에는 망고나무50그루가 있었고 그 모서리쪽에 정자같은 곳이 있었고 집 대문은 열기가 힘들정도로 문이 컷다. 대문으로부터 차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데 대충세보니까 적어도 10초? 정도는 들어와야 집앞에 다다를수 있는 크기였다. 마당은 골프연습을할수 있을만큼 넓었고 집은 개방형이라서 신발을 신고 옴겨다녀야 했다. 이층이였다. 너무 외진곳에 있어서 그런지 쌋던 것 같다. 학교와서는 쫌 거리가 돼서 엄마가 대리러 오고 대리러 왔다. 집에 강아지도 그리고 경비아저씨도 집안에 일하는 언니도 있었다. 일하는 언니는 정말 좋았다. 엄마가 우리에게 해야할 모든 것을 다 대신해서 했다. 학교보내는것도 우리를 깨우는것도 밥을 챙기는것도 옷을 입히는것도 언니의 몫이였다. 중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 항상 엄마가 중국어 교과서로 공부를 하라고 하고 일기도 쓰라고 하셨지만 그때는 너무 하기가 싫었다. 바뀐환경이 너무 신기했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공부는 생각도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태국에서 다녔던 것처럼 다시 교회를 다시니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아직까지 나의 베프를 하고 있다. 너무 오래전에 만나서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수 있는 유일한 친구다. 캄보디아에서 시끌벅적한 생활을 보냈다. 우리는 거기서 속하면 부유층에 속한다. 호텔도 끊어서 수영도 하고 시사도 경비아저씨도 무슨날이면 가끔 호텔에 가서 자기도 하고 심심할때면 말도 타러 가고 아빠따라서 골프도 치고 친구들이랑 파자마파티도 해보고 지금 한국에서는 할수 없는 것들을 캄보디아에서 하고 온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의 누렸던 것들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13살이 되던해 집에서는 또하나의 일이 터졌다. 우리가 한국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국제 학교는 있지만 딱히 졸업장이라고는 하기 그런 졸업장을 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졸업장보다는 그냥 이 학교를 다녔다는 증명을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 13살이 되면 캄보디아를 나오곤 한다. 한국에 적응은 빨리 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초등학교때 나온다. 고등학교때나 중학교때 나오게 되면 문화차이 때문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퇴를 많이하고 검정고시를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더 일찍 한국으로 보낸 것 같다. 한국에서 나와서 할머니랑 살면서 정말 말도 안되는일들 그리고 다투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할머니께 지금은 더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6학년에 와서 6학년 애들과 같이 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 실력 때문에 5학년으로 내려와야 했다.익숙지 않은 아이들과 그리고 친구들에게 무시받는 느낌 정말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우리학교에서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선생님께서는 5학년 교실에 들어오면 항상 날 보시고 파이팅! 이라고 주먹을 쥐시면 항상 나에게 말씀하셨다. 선생님들이 되게 나에대한 걱정을 되게 많이 해 주셨다. 당시 6학년 담임선생님이였던 김현도 선생님이 5학년에 내려가라고 가장 말씀을 많이 해주셨던 분이다. 아마 내가 6학년에 계속있었다면 이런성적은커녕 더 이상한 곳으로 빠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항상 김현도선생님이 생각에 많이 남는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잘 마치고 중학교를 들어오니 또 다른 세계에 들어온것만 같았다. 그래도 또 다른 세계에서 잘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잘 버텨서 올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얼마남지도 않은 3학년 이학기밖에 남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것들을 생각하면 생각만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지만 그래도 내가 할수 있는게 공부말고 또 뭐가 있나 그냥 죽어라 공부열심히 해서 내가 가고싶은 고등학교를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다. 정말 졸업하기전에 중학교애 입학한지가 엊그제 같은데라는 말을 많이쓴다. 그냥 볼때는 무슨 엊그제야 삼년이나 되었는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이렇게 졸업을 한다는게 뭔가가 이상하다. 아직 원서도 안썼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째든 6달밖에 남지 않았다는게 벌써부터 시원섭섭하다. 애들이 원서 때문에 머리아프다고 했던 말들이 이제야 느껴지고 이제야 알겠다. 중학교3학년의 앞으로 남은 내 미래는 훤히 보이는 것 같다. 항상 애들이 다고다녔던 말.... :“머리아퍼” 정말로 내 중학교 삼한년의 미래는 머리가 아플 것 같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 고등학교는 영동고등학교다. 왠지 나에게는 미션불가 같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 어떻게 친구들을 다시 사귀여야하는지 그리고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이럼 마인드로 살고 있다 “될 때가지 해보자” 뭐든지 시도도안하고 포기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시도해보고 나중에가서 후회를 하더라도 들 할 것 같다. 만약 시도를 해도 안되면 그게 내 운명이 아니겠거니 하고 쉽게 생각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정말 이런 조금한 일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르르 받아서 별것도 아닌것에 나만 더 힘들어하고 있는 나를 보고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고등학교가서 힘들다고들 말을 많이 하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한숨만 나온다.... 그래서 무시하고 내가 가서 할것만 생각하고 있다. 남이 그렇다고해서 내가 그런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가끔은 무섭다... 어떻게 친구를 사겨야 할지... 앞으로 남은 원서도 고입도 안썻는데 벌써부터 이런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참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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