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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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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작성자 안종숙 등록일 13.06.11 조회수 270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 공산군이 남북 군사 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야기된 전쟁이다.

북한군은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관총 사격을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 공세 등 일련의 주요 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 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 공격을 받았다.

3년간에 걸친 동족 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내었다. 전투 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 기간 중 남한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 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 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 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종교인․공무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 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 학정을 탈출,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 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처참한 6․25 전쟁 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로서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이라는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다. 이 날을 맞이하여 조국과 민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새롭게 각오를 다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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