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권득수 (權得洙)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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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삼원초 | 등록일 | 10.07.21 | 조회수 | 273 |
(1877. 10. 4 ~ 1907. 9. 2) 박민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 감악산의 정기를 타고난 장사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 권득수 의병장이 최후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부하들을 독려하는 가운데 유언처럼 한 말이다. 선생은 1873년(고종 10년) 경기도 양주군 남면에서 출생한 뒤, 파주군 적성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를 성근(成根)이라 하였다. 선생의 부친인 권신영(權信榮)은 정3품 절충위장(折衝衛將)을 지낸 무관 출신이었으며, 선생의 처가 또한 무관 집안으로 부인이 정3품 오위장(五衛將) 서병만(徐丙萬)의 따님이었다. 선생의 유년기와 성장기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일찍부터 문무를 겸비하며 호연지기를 키워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충효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을 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자 김정화(金正和)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충군애국 사상을 배양해 갔다. 학문 수양뿐만 아니라 무인의 기상을 타고난 선생은 감악산을 무대로 강건한 체력을 단련하며 뒷날 나라를 위해 헌신할 각오를 다져갔다. 2.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구국헌신을 결의하다 선생이 장성하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기화로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제는 그 동안 감추고 있던 대한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일본군대가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갑오경장을 강요하면서 내정을 간섭하는 침략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봉기하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였다. 그 뒤 일제는 1904년에 러일전쟁을 도발함으로써 대한침략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1월에 망국조약인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우리 민족의 격분을 샀다. 이에 을사조약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고, 그러한 와중에서 전국 도처에서 재기한 의병이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최익현이 이끌었던 태인의병과 민종식이 주도한 홍주의병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07년에 들어와 일제의 대한침략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해 6월의 헤이그특사의거를 기화로 삼은 일제는 한국 병탄을 목표로 한 일련의 침략정책을 강행하였다. 곧 헤이그특사의 구국활동 소식을 접한 일제는 이를 계기로 한국병탄을 결정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일체의 침략정책을 선두에서 총괄 지휘하게 하였다. 7월 20일 정미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내정권을 마지막으로 장악한 뒤, 7월 24일에는 급기야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융희황제를 즉위케 하였다. 우리 민족의 절대적 구심체이며 반일투쟁의 정점인 광무황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강제 병탄을 시도하기가 어려웠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마지막 정지작업을 감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8월 1일부터 보름간에 걸쳐 서울의 시위대(侍衛隊)와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지방 진위대(鎭衛隊) 등 대한제국의 정규 군대를 강제로 해산함으로써, 나라가 망할 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한국군대의 저항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일제의 이러한 일련의 대한침략책동이, 특히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강제해산은 우리 민족의 대일 적개심과 항일기운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전 민족이 대일전에 동참하게 되는 구국의 성전(聖戰)인 의병전쟁으로 승화되었다. 나라의 운명이 이처럼 스러져가던 참담한 상황을 그 누구보다 더 개탄해마지 않던 선생은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선생은 망국이 현실로 다가오던 을사 늑결 후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한 뒤 거사를 위해 적지(適地)로 판단한 양평으로 내려갔다. 이후 선생은 순국할 때까지 양평을 주 근거지로 삼아 경기도의 양주와 포천, 그리고 강원도의 홍천, 화천, 춘천 일대를 전전하면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도처에서 영웅적 투쟁을 벌이게 된다. 선생이 활동의 거점으로 삼은 양평은 시종일관 한말 의병전쟁의 중심에 놓여 있던 곳이었다. 충청도와 강원도로 통하는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의 인후와도 같은 지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곳은 많은 항일투사를 배출한 화서 이항로 학파의 중심무대로, 유인석이 이끈 제천의병의 연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1월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했던 십삼도창의군의 집결지가 양평(三山里)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지리적 연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구국창의의 깃발을 올리다 양평으로 내려온 선생은 양근리의 기독교 신자인 홍여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거사를 위해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용문면 다문리에서 기독교 선교와 문명퇴치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김연재(金演在)를 만나 흉금을 터놓고 거의(擧義)를 협의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거병을 위해 가장 급선무인 의병 모집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김연재를 통해 교회 신자들을 모집하고자 하였으나, 김연재는 선생에게 인적 자원이 한정된 교회보다는 각처 시장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것이 더 낳을 것이라는 권고를 하였다. 이에 선생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군자금을 토대로 소장수를 가장하고 양평, 양주, 이천, 지평 등지로 다니면서 장날을 이용하여 격문을 돌리며 200명이 넘는 장정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이로써 선생은 구국의 깃발을 들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선생이 창의한 시기는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의병전쟁이 전국 각지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던 무렵인 1907년 7월 전후로 생각된다. 창의 후 선생은 양평의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고 양평을 비롯해 양주, 이천, 지평 등지를 전전하며 도처에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용문사(龍門寺)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활동하던 선생은 대세를 타고 휘하 의병을 이끌고 한강 이북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양평군 양서면 문호리(文湖里)의 한강 나루터에서 도강을 시도하였지만, 선생의 도강을 차단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기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선생이 이끈 의병은 일본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용문산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호리전투 후 병력과 무기 등 전력의 부족을 절감한 선생은 홍천과 춘천, 화천 등지에까지 활동지역를 넓혀 전력을 보강하였다. 선생은 다시 소장사를 가장하고 각지에 돌며 격문을 날리고 의병을 소모한 결과 170명의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거느린 의병은 한때 400여명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하게 되었다. 4. 민긍호 등 여러 의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다 강원도 일대에서 병력을 보강하여 세력이 크게 강화되던 무렵 선생은 전력을 극대화하고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 주변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부지방에서 맹위를 떨치던 민긍호(閔肯鎬) 의병과 연합전열을 구축하려 했던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원주진위대 특무정교 출신의 해산군인 민긍호는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연합전을 펴기 위해 충주, 제천 일대로 남하해 활동하였고, 이어 8-9월경에는 홍천과 횡성, 인제 일대로 북상해 도처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민긍호를 직접 만나 항일전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해 연합전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갑복(韓甲福), 박래봉(朴來鳳), 최두환(崔斗煥), 주석민(朱錫敏), 장기환(張箕煥) 등의 의병장이 거느리는 부대와도 긴밀한 협조하에 항일전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선생과 민긍호를 비롯해 이들 연합의진에 소속된 의병의 총수는 1만여 명에 달했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매우 컸다. 현재로서는 자료 부족으로 선생의 의병을 비롯한 이들 의진이 연합하여 전개한 항일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이러한 배경 하에서 1907년 말에 전국의병의 연합체인 십삼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은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일제 군경을 상대로 의병이 각각의 단위 부대별로 활동하게 되면 전력의 고립과 분산을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평 일대에서 활동하던 부대들과도 긴밀한 연계 하에 유기적인 항일전을 펴고자 하였다. 선생의 의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던 대표적 부대가 조인환(曺仁煥) 의병이었으며, 그밖에도 신창현(申昌鉉) 부대 등과도 상호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의진은 비록 독립된 부대였다고 하더라도 항일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연합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선생은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는 와중에서도 전력을 확보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이러한 정황을 짐작케 하는 것은 후술할 아카시 중대와 교전이 한창이던 1907년 8월 말에도 양평 수회리(水回里)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8월 31일(음, 7월 23일)에 해산군인 김성완(金聖完)이 수회리에서 선생이 거느린 의병부대에 들어오면서 증언한 내용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선생이 용문산 일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던 시기인 1907년 8월 말 인근의 오촌리의 부호였던 김윤구(金崙求)가 선생의 의진에 무기와 군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일제가 그의 99칸 저택을 불태웠다는 기록도 그러한 정황을 짐작케 한다. 또한 선생은 휘하 의병에게 매일 일정액의 급료를 지급하며 전투를 독려한 것으로도 확인된다. 5. 용문산에서 격전을 벌이다. 1907년 8월, 서울에 인접한 양평 일대에서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을 비롯하여 조인환, 신창현 등 여러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게 되자,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일제는 양평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이른바 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 소위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서울의 제13사단에 양평 의병 탄압 임무를 부여하였고, 13사단장은 보병 제52연대의 9중대에 공병 1개 분대를 합류시켜 양평지역으로 급파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육군대위 아카시(明石) 중대장이 인솔하는 일본군 제9중대는 약 250여명의 병력으로 8월 21일 서울을 떠나 22일 양평 현지에 도착하여 곧바로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선생이 이끄는 의병을 비롯해 조인환 의병 등 양평 의병들은 출동한 일본군을 상대로 곳곳에서 크고 작은 격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군 대부대의 출동에 직면한 양평지역 의병은 대책을 협의한 끝에, 조인환 의병은 광탄(廣灘) 방면으로 이동하여 전투에 대비토록 하고, 선생이 거느리는 의병은 용문산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선생은 용문산 자락의 상원사(上元寺)와 용문사를 최후의 전장으로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일본군과의 결전에 앞서 400명의 휘하 의병을 용문산에 집결시켜 놓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왜놈의 노예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당당한 삶을 누릴 것이다.”라고 하며 최후의 결전을 독려하였다고 한다. 8월 23일, 일본군 장교척후는 본 작전에 돌입하기에 앞서 양평읍 동북방에 있는 상원사(上元寺), 용문사(龍門寺) 방면으로 의병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정찰을 나갔다. 선생이 거느리는 100여명의 의병은 이들이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고 산중에 매복해 있던 중 적군이 나타나자 이들을 포위하고 맹렬한 사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이때의 전투상황에 대해 일제가 “23일 양평에 파견되어 있던 정찰중대의 장교척후는 양평 부근의 산중에 잠복해 있던 100여 명의 폭도에게 포위되어 맹렬한 사격을 받아 잠시 응전한 후에 중대의 소재지로 귀환했다”고 실토한 사실만 보더라도 일본군이 얼마나 다급하여 혼비백산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튿날인 24일 일본군 제9중대의 제2소대는 전날 확인한 정보에 의거해 용문산으로 다시 출동하였다. 일본군은 학동(鶴洞)에서부터 장수동(長壽洞), 연안막(蓮安幕)을 거쳐 상원사, 용문사 방면으로 침입해 왔던 것이다. 선생이 거느리는 의병은 일본군의 이동 요로에 매복하여 있다가 곳곳에서 격전을 벌여 이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의병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일본군은 저녁 무렵 마동(麻洞)을 거쳐 조인환 부대가 대기해 있던 용문산 서쪽의 광탄(廣灘)으로 퇴각, 그곳에서 숙영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이 부대는 지평 방면에서 신대(新垈), 흑천(黑川), 백현(百峴)을 거쳐 양평으로 귀환하던 중, 이들의 동향을 탐지하고 백현 북방의 고지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의 기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의병측도 수차에 걸친 이 날의 격전에서 50여명에 이르는 커다란 인적 손실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23, 4일간에 양평 각지에서는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위와 같이 대소 전투가 수차 벌어졌다. 아카시 대위는 결국 그 동안 전투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양평 의병의 근거지가 용문산 일대임을 확신하고 근거지를 초토화하기 위한 작전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9중대 본대는 25일 용문산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은 용문동 간촌(間村)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고 용문산 근거지를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결국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동한 일본군은 의병의 활동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유서깊은 천년고찰인 용문사와 상원사를 완전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선생이 비축해 놓은 다량의 군량미도 함께 소각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잿더미로 변해버린 용문사와 상원사는 그 뒤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는 그 뒤 상원사의 명물이었던 범종을 일본으로 몰래 반입해가는 문화재 약탈행위를 자행했다고 한다. 상원사 범종을 서울로 반입하는 과정에서 일본종과 한강에서 은밀히 바꾸어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양평과 지평 각지를 유린하면서 의병 탄압에 혈안이 되어 있던 아카시 중대는 8월 28일 다시 광탄에 도달하여 마지막 탄압전에 돌입하였다. 29-30일 양일간에 걸쳐 광탄 서북방으로 10리 떨어진 고비리(古非里)와 북방 30리 지점의 산지동(山地洞) 일대에서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수차에 걸쳐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 참여한 의병은 200여명 가량으로, 일본군 정보기록에는 그 가운데 100여명이 전사 순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큰 희생을 치루었다. 이때 살아남은 의병은 문호리를 거쳐 양주 등지로 흩어지면서 양평 일대에서 의병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이로써 양평 의병 탄압전을 종료한 아카시 중대는 3일 고안(高安)으로 철수하였다가 다음날 서울로 돌아갔다. 6. 맥켄지 기자, 양평 의병을 만나다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이 아카시 중대와 일대 격전을 벌인 직후에 영국 런던의 데일리 메일(Daily Mail) 지의 종군기자였던 맥켄지(F.A. McKenzie)가 양평 현지를 방문하여 전투에 참여한 의병을 만나고 당시 전황과 의진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명저인 한국의 비극(Tragdy of Korea)에 나오는 의병 면담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맥켄지가 만난 의병 가운데는 선생이 지휘하던 의병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병을 찾아 서울을 나섰던 맥켄지는 이천으로 내려간 뒤 다시 제천과 원주를 거쳐 양평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의병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시기는 아카시 중대가 양평에서 의병 탄압작전을 벌이던 때이거나 막 종료한 직후로 추정된다. 그는 두, 세 차례에 걸쳐 의병을 만났는데, 그가 만난 의병들의 진술에 의하면, 한번은 40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200명의 의병이 교전을 벌여 4명의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의병측은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또 다른 200명의 의병은 20여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의병 5명이 부상을 입었고 그 가운데 3명은 일본군의 대검에 찔려 순국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의 내용과 정황으로 미루어, 여기서 언급한 전투는 선생을 비롯해 조인환 등이 인솔한 양평 의병이 아카시 중대를 상대로 벌였던 교전일 것으로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맥켄지는 양평 의병의 용기와 애국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반대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면서 그 내용을 세밀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는 출동한 일본군으로부터 여러 가지 만행을 당한 양평 주민들에 대해 “처음 보았을 때 양평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문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어른이나 아이들이 살그머니 나와서 접근해 왔다.”라고 사실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를 통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심에 쌓여 있던 당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맥켄지는 양평 의병의 열악한 무장상태에 대해 매우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5-6명의 의병이 마당에 들어와 내 앞에 정렬을 하더니 경례를 하였다. (중략)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총을 보여 달라고 했다. 6명이 각각 다른 다섯 종류의 무기를 갖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제대로 쓸만한 총이 없었다. 한 사람은 가장 낡은 형태의 화승총을 갖고 있었고, (중략) 두 번째 남자는 낡은 구 한국군의 총을 갖고 있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구식이어서 그 시대 최악의 견본이라고나 할 만한 물건이었다. 세 번째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한 사람은 총구로 탄약을 재는 아주 작은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귀여워하는 열 살 정도의 아이에게 주는 것 같은 결코 해를 가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또 한 남자는 기마용 권총을 갖고 소총 탄창을 붙이고 있었다. 세 자루의 총에는 중국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 모든 총은 어느 것이나 녹슬어 있고 부식된 것이었다. 설마하니, 이 사람들이 몇 주 동안이나 일본군에 항전할 것을 선언해 온 사람들이라니!!” 무릇 의병은 확보할 수 있는 무기는 모두 사용하였다. 일본군에 비해 절대 열세였던 화력의 확보가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요인이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의병들은 더 우수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맥켄지도 의병들로부터 근대식 무기를 제공해 달라는 간청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때 의병들은 원하는 돈을 모두 줄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이 거느리던 의병의 무장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위의 인용문에도 의병전쟁 전 시기에 걸쳐 가장 널리 사용되던 화승총을 비롯해 구 한국군이 사용하던 양총, 모젤식 권총 등이 언급되고 있다. 맥켄지는 의병이 소지한 낡고 조악한 총기류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심지어 의병 총기를 어린아이 장난감과 같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고철덩어리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최정예 일본군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의병들에 대해 그는 무한한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맥켄지는 양평에서 만난 의병들을 정렬시켜 놓고 사진을 찍었다. 한말 의병전쟁을 상징하는 의병의 모습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진이 바로 이때 맥켄지가 찍은 것이다. 그 사진의 주인공들은 선생의 휘하에서 직접 활동하던 의병들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선생과 간접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던 의병일 것으로 자연스럽게 추정된다. 7. 선생의 최후에 대하여 선생은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9중대와 수차에 걸쳐 접전을 벌이던 중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선생의 나이 31세로, 1907년 9월 2일의 일이다. 선생의 후손들이 선생을 봉사(奉祀)하는 날짜를 미루어 순국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선생이 순국한 것은 아카시 중대와의 교전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선생이 순국한 이후에도 선생의 활동과 관련된 사실들은 단편적으로 산견되고 있다. 그러한 기록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1907년 9월 8일(음, 8월 1일) 양주의 회촌(檜村)으로 가서 주민 신재만(申載萬)에게 국가를 위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하고 군자금 5만 냥과 양총 및 조총 등 13정을 모집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08년 9월 20일자 일제 정보문서에 지평분견소에 이른바 귀순 의병 3명이 선생의 휘하에 있었으며 이들은 모젤총 1정과 화승총 3정을 휴대하고 있었다고 한 사실과, 같은 해 10월 1일부터 10일 사이에 양근분견소에 귀순한 의병 1명이 역시 선생의 휘하 인물이었다고 파악한 내용 등이 그것이다. 이는 자료 기록상 착오가 있었거나, 다른 한편 1908년까지도 생존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득수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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