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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꽃이 피지 않는 꽃
작성자 김다미 등록일 12.08.28 조회수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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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꽃 피지 않는 꽃

 

2학년 1반 4번 김 다 미

 

 

 

1. 썩은 우물 안의 개구리

 

 

"자, 그럼 반장."

 

10분 째 계속되는 영양가 없는 종례에 지친 아이들이 하나 둘 씩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불평을 토해내고 있을 그 때, 수분기 없던 흙에 비가 내리듯 마지막을 장식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아이들은 모두 '반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여학생으로 시선을 돌렸고 여학생 역시 선생님과 다를 바 없이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차렷, 경례'란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어, 엄마 나 끝났어. 어. 내가 전에 말한 강의, 수강 신청 해놨어?"

 

"미진아, 오늘 시간 있어?"

 

"얘는, 시험이 코앞인데…어? 아빠 왔다! 미안, 나 과외 가야되는 거 알잖아~"

 

학교가 마쳤다.

 

그래,

단지 학교만 마쳤을 뿐이다. 학교가 파한 뒤에도 미진이의 말대로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우리는 공부라는 사명을 받아 오른손에 연필이라는 칼과 왼손엔 문제집이라는 방패로 입시라는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과외, 강의, 학원 등의 이름뿐인 구호소를 거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위 환경 때문에 아무리 공부라면 진저리를 치는 아이라도 열등감에 혹은 소외감에 교과서를 붙들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교과서와 문제집으로 이미 내 몸무게의 10%를 넘어버린 가방을 마치 내 미래인양 짊어지고서 학생들로 북적이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툭-투툭-

 

전쟁준비에 발바쁜 우리들을 안타까워하듯 하늘은 눈물방울을 연신 흘려보내다가, 이내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큰 빗줄기를 좍좍 뿌려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도서관까지의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설사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보내주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나의 교복을 젖게 해 찝찝하게 만들어 불쾌지수만 높일 뿐이었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하늘은 우리를 가엾게 보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볼 새가 없었다.

 

"지이이잉-"

 

자동문이 열린 도서관에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숭숭 불었다.

온몸에 전해진 에어컨의 기운으로 나의 기분은 업그레이드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한층 나아진 기분으로 화장실로 들어가 교복에 뭍은 물기를 털어낸 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서 화장실을 나왔다.

 

아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도서관에는 우리학교 학생이 다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리학교 교복이 눈에 띄었고, 다른 학교 교복도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나는 규모가 큰 도서관 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꼈다.

 

자습실 앞으로 다가가 큰 화면으로 자랑스레 빛을 내뿜고 있는 디지털기계 앞으로 다가가서 회원카드를 찍고 자리를 선택했다.

몇 분이라도 늦게 오면 자습실의 자리는 동나기 때문에 나는 자리를 얻은 것에 대해 안도하며 자습실 문을 열었다.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문제집을 풀고 교과서를 외우고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곁을 지나 구석으로 배치된 나의 자리로 가 조심스레 의자를 꺼낸 뒤 앉았다.

 

옆자리에 앉은 학생의 눈치를 보며 나는 가방에서 문제집과 필통을 꺼내들었다. 아직까지도 낯선 이 자리에 집중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이들의 기운에 못 밀려 나 역시 문제집 속으로 빠져들었다.

 

*

"으음."

 

게슴츠레 눈을 뜬 나는 주위가 빛 한줌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려고 했으나, 자면서 나도 모르게 흘린 것인지 침으로 인해 나의 볼과 문제집이 딱 붙어있었고 안간힘을 써서야 화끈거리는 볼을 만질 수 있었다.

오른쪽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나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역시나 현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해주듯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있는 사람은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아헤메는 나뿐이었다.

 

"자버리다니..아까워라.."

 

그래도 아직까지는, 무섭지 않았다.

'시험'이라는 돌멩이가 내 머릿속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까.

 

시험기간인데도 자는데 시간을 보낸 내 자신이 무척이나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점점 어둠속에서 물체들의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책상위에 굴러다니는 지우개와 샤프심이 길게 나와 있는 샤프를 보며 픽- 작게나마 웃었다.

필기구들을 정리하고 문제집을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 나니 지금 내가 혼자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나마 무서워졌다.

급하게 의자를 집어넣고 자리를 뜨려 하면서도 발걸음에 모래주머니를 달은 듯 무거워서 떨어지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졌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때만큼은 구석에 있던 나를 못 보시고 지나치신 경비아저씨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 때 가방에서 무언가가 떨어졌고, 나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손끝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나자 나는 그 무언가가 핸드폰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바보 같게도, 핸드폰이 있었는데.

 

나는 핸드폰의 잠금장치를 꾹 눌렀다. 그러자 환한 화면으로 핸드폰이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안도하며 평소엔 눈부시기만 했던 그 빛이 정겹게 느껴졌다.

 

핸드폰에서 나에게 보여주는 시각은 오전 12시 7분이었다.

나는 그 3자리 숫자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재빨리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서 자습실문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핸드폰 화면에 빨갛게 달아오른 빈 배터리모형이 반짝반짝 거리더니 이내 진동을 마지막으로 핸드폰 불빛은 꺼져버렸다.

다시 한 번 켜보려해도 정말 배터리가 0% 가 되어버린 것인지 도무지 켜지지 않았고,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방을 꼭 붙들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습실의 구조에 대한 기억을 더듬거리며 한발 한발 내딛었다.

사람이 심리적으로 어둠속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존재인 것을 증명하듯 평소엔 들리지도 않던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져서는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손잡이로 보이는 형체가 시야에 잡혔고 나는 그 손잡이를 당겼다.

안 열릴 줄 알고 있는 힘껏 잡아당긴 나는 예상외로 잠금장치가 되어있지 않은 문에 밀려 바닥에 쿵 주저앉았다.

 

"아야야…….경비아저씨가 완전히 나쁜 분은 아니셨구나."

 

혹시 나를 깨우시려고 했는데 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불 꺼진 도서관의 모습을 보자 소름이 돋아서 나는 굳은 몸을 이끌고 어둠속을 걸어 나갔다.

 

그 때, 자습실 바깥에 있던 디지털 기계가 갑자기 환한 빛을 내뿜으며 삐삐- 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와 함께 깜짝 놀란 나는 미처 내 발 앞에 있던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다.

 

이 어둠속의 공포를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나는 이대로 고통과 함께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두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나를 아침이 되면 데려다 주겠지. 하며 말이다.

그렇게 나는 삐삐-거리는 기계의 소음을 마지막으로 잠들었다.

 

 

 

2. 꽃밭으로 달아난 파랑새

 

 

얼굴과 몸 전체로 전해지는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느껴진 나는 조심스레 두 눈을 떴다.

 

"와.."

 

그 포근한 기운이 햇살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도 전에,

나는 내 시야를 넘어선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버렸다.

그 모습을 더욱 가까이 보고 싶어진 나는 몸을 일으키고 일어나 시야를 최대한으로 넓혔다지,

 

산들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꽃잎들이 배경이 되어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진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굳건히 서있는 푸른 산하며…

나비와 벌이 아닌, 사람인 나의 코까지 닿는 그 달콤한 향을 내뿜는 분홍, 노랑, 빨강, 하얀색… 등의 색을 가진, 보는 것의 즐거움을 주는 아름다운 들꽃들이 내가 서있는 이곳과 저 먼 산 넘어 까지 피어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꽃이었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또한 처음 보는 나무들의 가지에 달린 열매들은 너무나도 탐스러워 나의 군침을 돌게 했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리자 나무와 꽃으로 지어진 집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방금 보았던 수수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풍기는 거대한 성도 보였달 까…….응?

 

"그런데 도대체 여긴……."

 

내가 잠깐 이 아름다운 풍경에 홀렸던 것일까.

나는 잠시 동안 내가 살았던 곳을 잊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와 보았던 곳 인양 편안했다. 암흑으로 뒤덮인 껌껌한 도서관에서 쓰러졌던 일 따위는 방금 전까지는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이 상황을 꿈이라고, 환상이라고 칭하기에는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바람은 진짜였기에.

 

내가 여기서 깨어나기 전 마지막 기억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삐-소리가 나의 청각을 지배하고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진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한 마을의 뒷동산에서 깨어났다‥?

 

"웩! 말도 안 돼!"

 

하하. 그렇지 말도 안 된다. 말이 되서도 안 된다!!

 

이건 21세기 현세의 과학자들도 분명 밝힐 수 없는 경계에 있을 것이다. 그들조차 이 현상을 풀어내지 못한다면, 전혀 상관없는 고등학생의 나는 어째서 도서관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을까.

 

현세의 시간으로 약 10분정도를 그렇게 서서 멍하게 생각했지만…….

 

"아악!!!몰라, 몰라!!“

 

괜히 내 발밑의 꽃들만 무참히 짓밟혀졌다.

 

그 꽃들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도 전에, 나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잠시 생각을 해보고 나에게 닥친 이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결단을 내려봐야겠다.

 

나의 이름은 손 유진.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중위권 성적의 학생이다.

생일은 1995년 돼지띠이고, 3월 9일 물고기자리이다.

 

곱슬거리는 긴 머리칼을 갖고 있는, 화장은 조금도 할 줄 모르고 여성스러움이라는 글자의 뜻을 몸소 실천하고 있지 않지만 태어날 때 '공주님이세요!'라는 말을 들으며 태어난 나는 영락없이, 틀림없이 반드시!! 여자다. 그리고 어렸을 때 보통 사람들이라면 겪은 병들도 다 겪었고, 건강이라는 글자를 가슴속에 항상 새기고 다닐 만큼 걱정이 남달라서 예방접종도 또래 아이들보다 제일 먼저 하는 나였고, 건강검진도 예외가 있는 날은 빼고 2년에 한 번씩 하던 나였는데. 설마 결과를 잘 못 본 건 아닐 텐데…? 죽을병이 있어서 죽기 전에 실컷 놀다가라고 염라대왕님이 보내주신 건가? 교통사고도 당한 적 없고,

 

11년 전에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남자애 손 한 번 스쳐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이성에 대한 기억인데‥ 모태 쏠로의 신이라는 분이 날 여기로 보낸 건가? 그럼 '쏠로 천국 커플지옥!!'이라 외쳐대는 쏠로 분들은 다 여기 계신 걸까? 흠. 이건 너무 허무맹랑해. 그래, 그래…다른 것‥

 

음. 남들이랑 확연히 다르고 독특하고, 스페셜한 명분이 있어서 내가 반드시 여기로 와야 할 이유라‥

내가 초 인류적인 힘이 있던가?‥음, 그건 아닌 것 같고, 생각. 생각‥생각‥

보물찾기를 하듯 나는 그렇게 내 기억들을 하나씩 헤집어보고 있었다.

 

그 때,

머릿속에 낚싯줄같이 얇고 슬픈 빛을 띤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 기억은 점점 그 두께가 커져서 내 머릿속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닭똥 같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입에서는 그 흔한 울음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수도꼭지에서 물 흐르듯 그렇게 잠글 수도 없게 나는 울었다.

그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나의 감정을 울컥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 엄마. 어디가?'

 

그 사고가 있기 전의 나의 마지막 기억에는 엄마가 평소와 같은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고, 다른 점이 있다면 손에 봉투가 들려 있었다는 점이다.

 

'아‥유진아, 옆집에 미숙아줌마라고 알지?'

엄마는 웃으며 내 쪽으로 뒤를 돌았다. 그래, 이 때 부터 뭔가 이상한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응.'

 

'엄마 잠깐 미숙아줌마랑 어디 다녀올 거야- 우리 유진이 혼자 있을 수 있지? 아빠는 금방 오실거야.'

 

'…나 혼자 있을 수 있어.'

 

'그래, 우리 유진이 착하다~'

 

그땐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는 엄마의 말에 감쪽같이 속았지만,

나중의 기억으론 미숙아줌마는 자식들과 휴가를 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언제와?'

 

'…유진이가 블록 쌓기 하고 있다가 질릴 때쯤에 엄마가 짠-하고 나타날 거야. 그러니까 놀면서 기다리고 있어야 돼?"

 

'응, 기다릴 수 있어…'

 

'그럼 엄마 잠깐 다녀올게-'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웃으며 집을 나설 때, 나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내 머리위의 온기를 간직하려고

신발장 앞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의 말을 지키려고 집에 있는 블록이란 블록은 모조리 가져왔던 기억이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란 것을.

 

집에 돌아올 엄마를 위해 다양한 모양의 블록들을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내 키보다도 높은 성을.

 

그 후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온 아빠가 나를 안아들고 눈물을 흘렸고, 엄마는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었다.

 

"엄마…"

 

엄마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게,

장례식을 마치고 온 내 방의 책상에는 초록색의 싱그러운 잎이 흙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듯 보이는 화분 하나와 엄마의 편지를 볼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그 화분을 마치 엄마처럼 생각하고 정성껏 키웠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시간이 갈수록 나는 그 화분에 대해 소홀해졌고, 아빠는 엄마를 잊어보려는 듯 일에만 전념하고 일주일에 한 번 씩 나에게 용돈을 주러 찾아오셨다.

 

점점 엄마는 우리 가족의 기억에서 잊히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엄마 생각을 해도 전혀 슬프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은 생각일 뿐이라는 듯 나는 보란 듯이 울었고 그것을 증명하는 건 코밑으로 흘러내린 콧물과 눈가부터 귀밑까지 흘러내린 눈물줄기였다.

혹시 엄마가 자신의 화분을 제대로 키워주지 않은 내가 미웠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가셨다.

내가 이유가 있어 왔다면 그 이유를 충족시키고 가면 될 것이다.

 

그 화분에 대한 죄책감이 내 마음을 누르는 것만 같아서 괴로웠지만,

여기서 내가 뭔가를 해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화분이 살아있는 지부터 살펴보아야겠다.

 

내가 여기서 돌아가려면, 우선 저 밑에 있는 마을 사람들부터…만나봐야겠지?

 

 

 

3. 풍차 위의 작은 나비

 

 

멀리서만 보았던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높아서 그런지 내려오는 데만 해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슨 소설마냥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마을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몰려들 것 같아 긴장을 했건만, 여기가 마을의 끝 변두리 쯤 되는 듯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랑은 멀리 떨어져있었다.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꽃으로 나있는 길을 걸었다.

'꽃'이라는 개념은 내가 살던 곳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이곳이 산골의 어느 마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가 보던 꽃이랑은 뭐랄까‥ 느낌이 다르달 까?

단순히 처음 보는 꽃들이 피어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꽃을 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와 꽃과 공생공사하고 있는 여기 사람들이 꽃을 대하는 마음이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지나가는 집들은 모두 하나같이 창가에 화분 몇 개씩 두고 있었다. 정말 한 집도 빠짐없이 모두 꽃을 키우고 있었다.

 

여기가 기후도 그렇고 햇빛도 그렇고 토양도 꽃을 키우기에 알맞은 곳이기 때문일까? 처음에 눈을 떴을 때 햇빛의 느낌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긴 했지만‥

 

이윽고 위에서 마을을 바라보았을 때 중간쯤에 위치해 있던 우물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도 보였다. 그들의 생김새는 나와 별 다름이 없었고. 그저 입은 모양새만 달랐다.

마을 중간에 멈춰서있는 나를 본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점점 더 많아져서는 명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시선에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지만 여기까지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왔는데 이까짓 시선이 뭐 대수일까- 생각하고 숨을 크게 마셨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가장 연장자인 듯 보이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 남자는 덥수룩한 수염에 입이 반쯤 가려져있었고, 머리에는 투구 같은 모양의 둥근 꽃 화환을 쓰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얼굴과 몸 할 것 없이 상처가 없는 곳이 없어 덜컥 겁이 났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겁먹은 것을 티내게 되면 그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 지도 몰랐다.

 

"저기‥여기가 어디죠?"

 

"!@#$%^&*"

 

"네?"

 

"$%^&*!!!!!!"

 

이런…뭐라고 말하는 건지 못 알아듣겠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언성을 높였지만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 그것은 그저 소귀에 경 읽기 밖에 더 되랴.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눈치 챈 그 남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옆에 있던 키 크고 비쩍 마른 사람에게 뭐라 말했다.

그 사람은 그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자신의 옷에 달린 주머니에서 모래를 뭉쳐놓은 것 같은 동그란 알약모양을 꺼내더니 꿀꺽-먹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 곳은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어? 한국말 할 줄 아세요? 근데 있을 곳이 아니라니…"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한국‥이라고 하면 아려나…"

 

나의 말을 듣고 투구를 쓴 남자에게 귓속말로 뭐라 전하는 비쩍 마른 사람은 투구를 쓴 남자가 또 한 번 뭐라 말하자 그는 또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말했다.

 

"여기서 떠나주세요.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원래 살던 곳으로 가주십시오."

 

"떠나라니… 전, 전 갑자기 여기로 오게 된 거라고요!"

 

"더 이상 신계에서 혼란을 주려 하지 마십시오. 가지 못하겠다면…"

 

말이 통해서 다행이라고 돌아갈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역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그는 나에게 떠나라며 몰아붙였고 말이 통해도 자기 말만 하는 그 사람이 답답해지던 그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옆에 투구를 쓴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투구를 쓴 사람은 투구의 꽃 화환에서 꽃잎을 손으로 한 움큼 떼어내더니 땅으로 던져서 발로 밟았다.

 

꽃을 떼고 밟고… 이상한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던 그는 자신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쪽으로 납작해진 꽃잎을 쉭-하고 던졌다…….쉭-?

 

꽃잎에서 그런 소리가 날 리 없는데?? 꽃잎이라면…

게다가 납작한 꽃잎이라면 하늘하늘 거리며 떨어져야 되는데?

 

나는 내 옆으로 순식간에 지나간 꽃잎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꽃잎은 신기하게도 나무에 박혀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유일하게 한국말을 구사할 줄 아는 남자의 목소리.

 

"이미 늦었지만, 도망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백월형님의 영능은 피를 보아야만 멈추거든요."

 

그 말은 나의 등골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영능인지 뭔지 간에, 꽃잎을 저 정도로 만드는 힘이 있다면…

게다가 피를 보아야 멈춘다니? 나 하나쯤은 저승길로 보내는 것도 어려운 건 아니라는 거다. 반 쯤 돌아간 나의 몸뚱이에서 뭔가 좋은 해결법이 나오길 바랐지만, 후…역시 방법은 하나!

 

뒤에 코끼리가 달려온다 생각하고 뛰는 거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마을 옆길로 난 숲 속으로 들어가 뛰기 시작했다.

 

내가 가만히 있다 갑자기 뛰니 그들은 놀랐는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그 후,그들의 뜀박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걷다가 나를 따라오는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나무들 틈사이로 뛰었다.

그들이 날 찾기 어렵게는 됐지마는, 나뭇잎이 머리를 치고 얼굴을 가리고 발에 걸리고. 고생을 사서한 꼴이 되었다.

 

"#$@!!!!!"

 

"#^^$!"

 

발이 빠른 건지 시력이 좋은 건지 그들은 어떻게 날 찾아냈는지,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정체불명의 언어는 날 더 가까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나마도 다행이라고 할 게 있다면, 저 말이 한국어였다면 신경 쓰느라 제대로 뛰지 못했을 텐데,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서 달리기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랄까.

 

"쉬이이익-탁!"

 

"아아악!!"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이 소리와 나무에 탁탁 박히는 표창 같은 그 꽃잎이었다. 공중을 가르며 바람소리처럼 들리다가 갑자기 뭔가 박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서는… 나의 공포심을 자극시키다 마지막엔 목을 조를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우사인 볼트의 기를 받아 달리고 또 달려서 그렇게 꽃잎의 공포에서도, 그들의 외계 어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허-하아. 휴….이제‥ 갔나?"

 

인간은 목숨에 위협이 느껴질 때 잠재적인 힘을 낼 수 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숨을 헐떡대며 나무 그늘 아래에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듯 앉았다. 눈을 감고 나뭇잎들이 스치는 '솨아아아-'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었더니,

다른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쿵쾅쿵쾅 뛰던 심장소리도 숨 넘어 갈 듯한 호흡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들을 따돌려서 다행이긴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나의 실낱같은 마지막 희망은‥ 끊어지고 마는 것일까.

 

이럴 거였다면, 내가 내려와서 이렇게 목숨의 위협까지 느낄 줄 알았다면 적어도 용기내서 내려오진 않았을 텐데….

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나 있는 걸까.

 

"흐흑‥"

 

처음 이 낯선 세상에 와서 무턱대고 울지 않았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마을 사람들이 날 헤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은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너무 서러워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 같아서 울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마을사람들이 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망이고 뭐고 없어졌다는 서운한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날 죽여라' 라는 심보로 두려움을 누르고 더 크게 울었다.

 

"흑흑…….흑."

 

"스스스스슥...."

 

눈물이 조금씩 그쳐가고 나의 불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숲을 가득 메울 때, 갑자기 들려오는 나뭇잎들이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

바람이 불지 않으니, 이건 누군가 숲 속에서 걷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 가까이 오고 있는 걸까?

 

나는 헐떡임을 억지로 누르며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방금 전까지는 죽이라며 울다가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음을 그친 내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누군가 이런 나를 보며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슥...스슷......"

 

"..누구..세요?"

 

소리가 점점 진해지더니, 이윽고, 그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주인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4. 흑발의 앨리스와 이상한 물

 

 

"*#$..@#$?"

 

"‥네?"

 

"…%^....*@#$%^"

 

 

내가 두려워했던 마을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눈동자도 코도 입도 얼굴형도 모두 예쁜 사람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나 그의 낮은 목소리에서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나왔다.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사람도 내가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눈치 채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며 또 한 번 환하게 웃었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직감적으로 자신을 따라오지 않겠느냐는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가만히 있느니, 차라리 뭐라도 해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내 몸은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느꼈으니까.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은 나의 행동이 자신을 따르겠다는 뜻으로 해석한 듯 그 사람은 나의 손을 잡고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의미 없는 대화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풀리지 않게 살짝 잡은 손에 땀이 찰 무렵 그 사람의 건너편으로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가 보였다.

 

호수…?

 

나무 몇 그루를 지나치자 내 시야에는 푸른빛과 햇빛을 띄고 있는 맑은 호수로 꽉 차버렸다. 무척 깊은 호수인 듯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호수에 넋을 잃을 무렵 그 사람이 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리자 그 사람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잡혀있는 나의 손을 이끌고 호수 쪽으로 전진했다. 그는 몸을 숙이고 손에 호수의 물을 담았고 내 예상처럼 그 물을 마셨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도 마시라며 권해주었고 나도 조심스레 몸을 숙이며 그 물을 마셨다.

 

고여 있는 호수라고 물이 더러울까 거부감이 들었던 것과는 달리 물을 마신 후 목구멍부터 서서히 몸 전체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개운해졌다. 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 사람은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아‥ 너무……? 어? 말이?"

 

방금 전까지 알아들을 수 없던 그 사람의 말이 신기하게도 갑작스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 중에서 어떤 약을 먹고 알아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약이라도 먹은 걸까?

 

"이 물은요, 다른 세상에서 온 당신과 여기에 사는 우리들을 이어주는 물이에요. 이 물을 마신 당신을 이 세상의 하나의 결합체로 여기게 되어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역시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예요."

 

"신기해요‥근데 이 물…마시니까 개운해졌어요."

 

"이 물의 이름은 '미르의 물' 혹은 '신수'라고 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태어날 때 이 물을 마셔요. 물을 마심으로써 이 마을의 주민이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물은 당신처럼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에게 붙어있는 악령을 떼어주는 일을 하곤 해요."

 

"잠, 잠깐만요! 저처럼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라니…?"

 

나와 같은 사람이… 그 전에 또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나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저는 보진 못했지만 소문으로 들었던 적이 있어요. 외계인이 신수를 마신 후에 몸에서 혹 같은 것이.. 자신을 얽매이던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저, 그럼 그 분들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이 물을 마신 후의 몸에서 느낀 반응도 나와 비슷해‥

아니, 분명 나랑 똑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야.

 

혹시..혹시..

 

나는 그 사람에게서 내가 원하는 대답을 찾으려 눈을 맞추며 말했고

그 사람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 후의 일은 잘 모르겠네요.“

 

"아…그래요‥?"

 

애써 실망한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호수로 고개를 돌렸다.

몸에 힘이 죽 빠졌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동질감을 느껴서 좋았는데‥

 

그 사람들은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여기서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 살고 있을까.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

 

"분명 그 사람들도 돌아갔을 거예요. 반드시 당신도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네. 그렇겠죠?.."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니 그 사람은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내가 용기를 얻은 건지 나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시선을 다시 호수로 돌리자, 호수 옆에 핀 자그마한 들꽃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분홍색의 그 꽃은 혼자 피어있으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아보였다.

그 꽃을 보며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살다온 세상에서는 이름이 뭐였어요?"

 

"손‥유진이에요."

 

"저는 수화라고 해요. 근데 어쩌다가 숲 속까지 오게 된 거예요?"

 

"마을…사람들이.. 저에게 떠나라고‥"

 

또다시 그 생각에 나는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혹시 이 사람도 돌변해서 나를 죽이려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그렇게 고민하던 그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그 남자.

아니, 수화라는 사람의 목소리.

 

"마을사람들은 외계인을 싫어해요."

 

"…."

 

"제 집은 마을사람들이랑 멀리 떨어져있어요."

 

"…?"

 

"제 집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게‥무슨…"

"갈 데 없으면 저희 집에서 지내도 되요. 전 당신을 도와주고 싶거든요."

 

"…."

 

"전 당신을 해칠 생각 없어요!!정말로.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내가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을 의심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나보다,

이 사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두 손을 저으며 말한다.

그 모습에 내가 긴장이 풀린 건지 '픽-'하고 작게 웃었다.

 

"우선 우리 집에 가보고… 싫으면 그 때 결정해도 되요.

지금은 마을사람들 피하는 게 먼저니까…"

 

"…좋아요."

 

"…?"

 

"실례가 안 된다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나의 마지막 말에 두 눈을 휘어지게 웃는 이 사람.

그러고는 내가 편해진 건지 내 손을 단숨에 휘어잡고 자신의 집이라는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정말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부디 착각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앞으로 이 사람. 수화라는 사람과 지내게 되면 적어도 나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에 눈물짓지 않아도 되고, 같이 지내면서 방법을 찾아봐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내 앞으로 앞서 뛰어가며 빙그레 웃고 있을 이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5. 꽃피는 세상, 그리고 해맑은 사냥꾼

 

 

"도착!!"

 

그 말에 나는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손을 쭉 피고 있던 그는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허어…“

 

"아아! 맞다, 미안해요. 나 혼자 뛰는 줄 알고…"

 

숨이 차서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를 원망한다는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몸을 일으켜서 약 10분 동안 숲을 헤맨 끝에 찾아낸 그의 집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달려가는 것이 익숙해보여서 아무 걱정 없이 뛰기만 한 것이 잘못 이였나.

그 밝은 웃음과 닮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집이 나를 환영한다는 듯이 서있었다. 역시 이 사람의 집의 창가에도 꽃핀 화분이 놓여있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아, 아니. 그것보다 우리 어색한 이 말투부터 고치면 안 될까요?"

 

솔직히 아까부터 무지하게 거슬렸다.

-요. 라고 붙이는 이 말투 말이다.

 

"하하, 어떻게요?"

 

"여기에서는 나이라는 게 따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살던 곳에서는 태어난 후부터 지난해를 세서 18살이었어요."

 

"음…….아마, 그렇게 따지면 저도 그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럼 우리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하면 되…요!"

 

"유진아…?라고 하면 되려나?"

 

"응!"

 

"그럼 유진아, 우리 집 구경해볼래??"

 

어색한 말투에 낯설어 하는 것 같은 수화였지만,

이내 적응한 듯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이끄는 수화를 따라 집에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니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처럼 보이는 공간이 눈에 띄었다. 거실에는 편하게 앉을 수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소파가 놓여있었고, 그 곁에는 책이 가득 꽂혀진 책장이 눈에 띄었다.

거실을 지나쳐 부엌으로 이동했고, 부엌에는 향긋한 냄새가 진동했다. 수화는 마침 점심을 만들고 있었던 참이라며 괜찮다면 같이 먹자며 좋아했다.

그리고 들어간 수화의 방은 책상과 탁자에 놓인 투명한 병들에 여러 가지 색의 액체가 담겨져 있었고, 놀라워하는 날 보며 수화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물약이라 말했다. 이 물약으로 마을 사람들을 도와준다며 수화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음, 어디서나 약은 이런 냄새가 나는 걸까.

 

"유진아, 남은 방 하나가 더 있는데 구경해볼래?"

 

"아…응!"

 

수화의 방에서 나온 뒤 다시 부엌, 거실을 지나쳐 다른 방향으로 꺾어 들어가니 수화가 말한 대로 작은 방 하나가 나왔다.

수화는 손잡이를 돌리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조심스레 연 이유를 알게 된 후는 문을 연 후 뿌연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밖으로 빠져나온 후였다.

 

"켁-켁…"

 

"미안….유진아, 여기 쓴지가 하도 오래돼서.."

 

"괜..괜찮아…콜록-"

 

나를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수화 대신에 문을 닫은 뒤에 나는 연신 '콜록, 콜록' 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따뜻한 물을 가져오겠다며 수화는 부엌으로 가버렸고 나는 거실로 가서 미처 보지 못한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창가에 놓은 화분 말고도 탁자에 놓인 하늘빛 꽃병에는 꽃이 담겨져 있었다.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으며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책을 한 달에 한 번 읽을까 말까 하던 기억이 생각나 책장에 꽂힌 책들을 올려다보았다.

 

5칸으로 나누어 책이 꽂혀진 책장에는 빈틈없이 책으로 빼곡히 차 있었다. 말을 알아듣게 되면 책도 읽을 수 있나 보다.

 

나는 '꽃에 대한 지침서' 라고 굵은 글씨체로 제목이 쓰여 있는 책을 골랐다.

민트색 바탕의 손에 딱 들어오는 알맞은 두께의 책이었다.

 

“책 좋아해?”

 

소리 없이 다가와서 말하는 수화의 목소리에 내가 흠칫- 마치 도둑이 남의 집에서 물건을 훔친 것처럼- 놀라자, 수화는 ‘하하-’ 하고 짧게 웃었다.

무안해진 나는 책 커버만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 책에 우리 마을에 있는 꽃들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나도 재미있게 읽었으니까 유진이 너도 재미있을 거야.”

 

“…응.”

 

나는 수화가 내려놓은 컵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물을 홀짝홀짝 들이키며 말했다. 수화는 웃으며 자신도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제목은… ‘꽃왕자와 꽃공주’?

 

“푸흐흐…”

 

“응?”

 

“그 책… 제목이 특이해서.”

 

“아~ 이거, 내가 10번이나 봤을 정도로 정말 재밌어! 소설계의… ‘레전드’라고나 할까.”

 

내 말에 진지하게 저렇게 눈을 반짝이며 말 할 필요가 있었을까-

약간 엉뚱한 그의 행동에 나는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나의 웃음에 수화는 ‘왜 웃어!’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그것은 웃고 있는 나에게 모터를 달아준 꼴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난 뒤에, 수화가 점심준비를 마저 하겠다며 부엌으로 가버리자 나는 책 표지를 조심스레 넘겨 읽기 시작했다.

귀여운 꽃 한 송이를 시작으로 나도 모르게 그 책에 빠져들었다.

 

*

“헉…얼마나 가야 돼?”

 

“기다려봐~”

 

점심을 먹고 나서 수화와 같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각자 책 삼매경에 빠져있었는데, 잠재되어있던 나의 호기심이 갑자기 보랏빛 꽃 한 송이를 보더니 툭 튀어나와 버렸다. ‘이 꽃 신기하게 생겼다. 이 마을에도 있어?’ 라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수화가 ‘어! 이 꽃 우리 집 근처에 있는데… 보러 갈래?’ 라며 10번이나 읽었다던 소설계의 레전드 라는 책을 집어던지게 하고야 말았고

‘으응…?’이라는 나의 대답을 긍정으로 해석해서는 책에 나와 있는 그림과 수화의 못미더운 기억력에 의존해 그 꽃을 찾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수풀을 헤치며 땀을 삐질 삐질 흘리고 있고,

괜한 헛고생 하게 만든 수화는 질리지도 않는지 즐거워하며 눈에 불을 켜고

그 꽃을 찾고 있단다.

나는 수화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수화는 꽃 찾기에 열중한 상태인지라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찾았다!”

 

“어?…”

 

“여기, 이 꽃이야-”

 

수화는 내가 편히 볼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었고, 나는 몸을 숙여 보랏빛을 내뿜고 있는 ‘실리바’ 라는 꽃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정말 눈을 더 크게 해서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 빛은 나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 향기로 나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너무 아름다운 꽃이라서 수화는 나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나는 수화를 올려다보았고 수화는 땀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수화와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빨갛게 물들여 버린 후였다. 수화는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수화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부엌으로 전진했다.

부엌의 구석에는 가스레인지처럼 보이는 재로 덮인 식물의 줄기처럼 보이는 것이 쌓여있었고, 그 옆에는 마치 싱크대인 양 수도꼭지와 점심에 사용했던 식기들이 놓여있었다. 네모난 상자에는 음식들이 담겨있었는데 마치 냉장고처럼 속안이 무척 시원했다. 영문을 몰라 고개가 자연스럽게 갸우뚱거렸지만 나중에 수화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재료들을 식탁위에 꺼내놓았다.

 

“음…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게 어떤 게 있으려나?”

 

 

*

“맛있어!”

 

수화의 입에는 음식이 없어질 줄 모른다.

두 볼이 가득 찰 정도로 맛있어 하는 수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수화의 배려에 고마웠지만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순 없었다. 수화가 만든 점심을 생각하며 분명 잘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세상에서 온 나에게 낯선 재료와 낯선 도구들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기에 난 결국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먹어도 바로 뱉어내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수화는 내가 미안해 할까봐 혹시라도 죄책감을 느낄까 저렇게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정말 맛있어서 그러나? 하고 내가 다시 한 번 먹어봐도…

정말 아닌데?!

 

“수화야. 먹기 싫으면…”

 

“꿀꺽-”

 

“다…먹었네!?”

이건 만든 사람이 더 놀랄 일이다, 정말로.

 

정말 신기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지 얼마 안 되어,

수화의 얼굴은 샛노랗게 변하더니 수화는 애써 웃는 표정을 유지 한 채…

화장실로 직행했다.

 

*

“수화야, 나 때문에 속 안 좋지?”

 

“아냐~ 정말 맛있었‥쿨럭.”

 

“거짓말~아! 수화야, 나 네가 누워있는 동안 그 작은 방 청소했어!”

 

“응? 왜?”

 

“왜라니~이제 내 방인데~”

 

“아‥진짜?!?!”

 

내 말이 같이 지낸다는 말로 뒤늦게 해석한 건지 수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는 수화를 다시 침대로 눕히며 연신 ‘진정해, 진정해’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아까 그 음식의 타격이 컸던 건지 수화는 화장실을 다녀온 후 방에 누워있었고, 나는 그 때를 빌어 먼지 풀풀 날리는 방을 청소했다.

수화는 아픈 몸은 까먹은 건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긴, 나도 이제 같이 지낼 사람이 생겨서 좋다.

 

“아, 수화야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왜 마을사람들은 모두 꽃을 키워?”

 

아까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까먹었던 바람에

이제야 그 궁금증을 풀게 된다.

 

“아~ 그건 말이지.

우리가 키우는 꽃들은 우리의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많거든.”

 

“밀접한 관련?”

 

“응, 부엌에도 가보면 잿더미가 쌓여진 줄기더미도 모두 꽃이고,

냉장고처럼 사용하고 있는 상자에 붙어있는 꽃이 음식들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주거든. “

 

“어, 어떻게…?”

 

말도 안 돼, 어떻게 꽃이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단 걸까?

 

“언제부터 꽃이 우리 생활과 관련이 깊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진정으로 찾았을 때 씨앗을 자신으로부터 얻게 되서

그 후 그 씨앗이 나중에 자라서 꽃이 되면 그 꽃은 그 사람의 하나의 능력으로 다른 이들로부터 받아들여지게 돼.”

 

“능력…이라.”

 

음…설마, 마을에서 보았던 투구를 쓴 사람이 꽃 화환을 쓰고 있던 것도?

그럼 그 사람은 꽃을 밟음으로써 그 능력을 취하는 건가?

 

“나, 마을에서 그런 능력을 쓰는 사람을 본 것 같아.”

 

“그래? 누구였는데?”

 

“그 사람은 꽃 화환에서 꽃을 두어 송이 떼서 꽃을 밟아서 납작하게 만들어서는 마치 표창처럼 나를 공격했었어.”

 

“아마도…‘백월‘이라는 사람일거야. 마을사람들이 믿고 의지한다고 들은 적 있어.”

 

“아! 그리고 어떤 사람이 무슨 모래알 같은 약을 먹으니까 그 말이 들렸어, 마치 내가 그 호수의 물을 마시고 네 말이 들렸던 것처럼.”

 

“그 사람은 ‘외통‘ 형이야. 꽃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뭉쳐서 먹게 되면

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외통 형은 싫어하지만 가끔 동물이랑 말을 하기도 한다고 들었어.”

 

“와…신기하다!”

 

“그렇지? 마을사람들은 각자 그렇게 다른 영능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물질적인 능력을 나눔으로써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도 해.”

 

내 귓속으로는 수화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처음 백월이란 사람한테 공격을 당했을 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정말 신기한 세상 같아, 여기는.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키웠던 꽃이 자신의 한 능력이 된다니.

 

“그렇구나.…대단하다!”

 

“그렇지? 어? 벌써 밤이다. 유진아 가서 자는 게 좋겠다.

난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알았어~ 그럼 푹 쉬어.”

 

끼이익-달칵.

 

나는 방문을 닫고 몇 걸음 더 걸어 내 방으로 왔다.

문을 열자 아까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십여 분을 청소에 공들인 보람이 있는지 훨씬 말끔해진 방에서

나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에서의 하룻밤을 그렇게 보냈다.

 

 

 

6. 꽃밭에는 지렁이만 사나요?

 

 

수화의 집에서 생활한지 며칠정도가 흘렀을까.

여느 때와 다름없지만 특별했던 어느 날이었다.

 

“탁, 타닥-”

 

“우음…”

 

창문으로 언제 느껴도 따스하리만치 포근한 햇볕이 스며들어와 내 몸을 덮었다. 일어나지 않고는 버틸 수 가 없어, 두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몸을 일으켰고, 이불을 걷어내고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어?”

 

“응, 일어났어?”

 

식사 준비를 하는 듯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수화를 보며,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머리를 주먹으로 콩- 때렸다.

 

아! 오늘은 내가 아침하기로 했었는데!

 

수화랑 함께 지내면서 수화가 매일 일찍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너무나도 미안해서 어젯밤에는 저번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맛있는 음식을 해 주겠다며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까먹고 늦게 일어나서 수화가 준비하게 만들다니,

 

나는 수화 곁으로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수화는 괜찮다고 거실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결국, 나는 매일 똑같은 패턴처럼 소파에 가서 익숙하게 앉았다.

읽던 책이나 마저 읽을까- 하고 나는 ‘꽃에 대한 지침서’ 라는 책을 익숙하게 손으로 잡아 꺼내 든다.

 

신기한 꽃들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밥 다됐다~”

 

그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책 커버를 덮으며 말했다.

 

“밥이다!”

 

 

*

“응? 어디가?”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오는 수화를 보며 물었다.

수화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돈하다가 나의 말에 ‘하하’ 웃으며

내 쪽으로 뒤돌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마을에 가보려고~”

 

“오랜만에…?”

 

수화는 집도 마을이랑 엄청 떨어져 있고…

마을에도 잘 안 간다니 왜지?

“응, 살 것도 있고 줄 것도 있고.”

 

“그렇구나.…”

 

현재, 나도 무척이나 지루해서 수화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서 몸이 저절로 움츠려 들어서

혹시 마을사람들이 나에게 또 그런 해코지를 할까 두려웠다.

 

나는 애써 책의 내용에 집중을 하며 말했다.

 

“응~아, 아니다. 유진아, 너도 갈래? 마을에는 신기한 게 많거든.

아직 제대로 구경 못 했지?”

 

“아니….”

 

“걱정 마. 신수를 마신 이상 너도 우리 마을사람이 된 거니까.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 할 거야. 널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게 볼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그래.”

 

수화의 말에 난 책을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거울 앞에 서 있는 수화의 옆에 껴서 거울을 한 번 슥 쳐다보고는 가자고 재촉을 하기 시작했단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수화는 웃으며 물건이 담겨진 바구니를 들고는 나와 함께 집에서 나왔다.

 

내가 지금 기분이 너무너무 좋아서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날씨가 바람도 선선하고 햇볕이 조명 기능을 톡톡히 해서 만족스럽다!

그렇게 수화보다 먼저 앞서 걸어가던 나는 마을 앞에 먼저 도착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그 모습을 눈동자에 모두 담았다.

 

“이거 누구한테 전해줘야 하는데, 같이 갈래?”

 

바구니를 흔들어 보이며 묻는 수화에게

지금은 뭐든지 좋다는 뜻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주었더니,

수화는 그걸 보고 또 웃는다.

뭐, 지금은 뭘 해도 수화가 밉지 않을 것만 같다.

 

뚜벅. 뚜벅.

정말로, 수화와 같이 거니는 길가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사람들은 전처럼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든지 공격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저 나를 마을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신수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지.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수화는 인적이 적은 한 집에 멈춰 섰고, 나 역시 따라 멈췄다.

 

“아주머니~”

 

수화는 문을 ‘똑똑’두드리며 말했다.

이윽고, 통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작은 마찰음을 내며 열렸고

인자한 표정으로 ‘들어와요~’라고 말하시는 아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아가씨도 같이 들어오세요~”

 

수화가 들어가면 뭘 해야 할까 마음속으로 고민하던 나는 예상하지 못한 다정한 그 말에 놀란 나는 고민하다 결국, ‘실례합니다.’ 라고 작게 말하며 집에 들어섰다. 집 안에는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고 예쁜 화분들이 문 앞부터 줄지어 놓여있었다.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잘 관리되어 있는 것을 보니 식물에 대한 아주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거실에 놓인 탁자 앞 의자에 수화를 따라 조심스럽게 앉았다.

 

“붕이는 어떤가요?”

 

수화가 아주머니께 먼저 말을 건넸다.

 

“수화 씨가 줬던 약 먹고 나아지고 있는데 후유증이 좀 큰가봐.

아직 일어나지는 못하고 있지, 뭐.”

 

“아‥ 그럴 것 같아서 진통제를 가져왔는데, 물에 타서 2~3잎씩 먹게 해주시면 될 겁니다.”

 

수화는 바구니에서 푸른빛 물약을 꺼내더니 웃으며 아주머니께 드렸고,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고마워, 수화 씨. 항상 이렇게 도움만 받아서 어쩌나‥”

 

“아닙니다. 붕이한테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수화가 예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나는 왜 이렇게 가슴이 뭉클했을까. 그나저나, 수화는 누군가를 치료해줄 수 있는 약물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수화의 능력일까?

 

“아! 내가 수화 씨 주려고 만든 건데, 저 예쁜 처자랑 가서 맛 좀 봐요.

부담스러워 할 필요는 없고. 알았지?”

 

아주머니는 잠시 자리를 뜨시더니 덮개로 덮인 냄비를 가져오시더니 수화의 손에 쥐어주셨다. 수화는 놀라며 아주머니께 다시 되돌려드리러 했지만, 아주머니가 수화의 등을 떠밀었고, 그와 함께 나도 떠밀려나오게 되었다.

 

수화는 결국 아주머니께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했고,

나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뒤따라 꾸벅- 몸을 숙였다.

 

문이 닫히고 수화는 냄비를 바구니에 조심스레 넣고는 내 쪽으로 뒤를 돌았다. 수화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수화와 나는 그렇게 마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장터로 즐겁게 직행했다.

 

*

“매워!!허-”

 

“자, 물!”

수화와 부적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쏘아 다니면서 물건을 구경하고,

신기한 식물들도 보고 이상한 오징어같이 생긴 흐물흐물 움직이는 ‘물렁’이라는 동물을 보며 내가 징그럽다는 표정을 짓자, 물렁을 팔던 아저씨는 나에게 물렁을 집어서 확- 하고 나에게 친절하게 보여주시니,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란 것도 모자라, ‘물렁’이 먹물 같은 액체를 내 얼굴로 쏘는 바람에 수화와 아저씨는 나를 보며 배꼽 빠지게 웃었다. 우리가 떠난 뒤에도 아저씨는 ‘물렁이 사세요~’라며 큰 목소리로 장터를 울렸다.

그 후에는 수화가 웃었던 게 미안했는지 꽃 모형으로 만들어진 팔찌를 하나 사주었고 지금은 한국의 ‘떡볶이‘라 불리는 음식처럼 ’나도 한 매움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빨갛게 우려낸 국물 위 둥둥 떠다니는 건더기들을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께서 ‘엄청 매울 건데~괜찮겠어, 아가씨?’ 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는 후회될 정도로 무지하게 맵다.

나는 혓바닥을 내밀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고, 그 옆에서 수화는 나랑은 대비되는 모습으로 잘도 먹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먹는 모습이 용할 정도이다. 아주머니께서 신기하신 듯 수화에게 ‘왜 이렇게 잘 먹나?’하고 묻자, 수화는 그저 웃으며 위가 강화되어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저 말이 꼭 나를 겨냥한 말처럼 들려서

나는 그렇게 매운 음식을 입으로 마구 집어넣었다.

 

“헤- 매워,매워”

 

나는 걸으면서도 혓바닥을 집어넣을 줄을 몰랐다.

너무 매워서 혓바닥이 감각을 잃은 듯 했다.

내 모습을 보며 꼭 강아지 같다고 놀리는 수화에게 장난으로 한 대 콩 때렸더니, 수화가 포커페이스를 유지 한 채로 아무 반응이 없다.

 

응? 너무 세게 때렸나?

나는 수화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때 갑자기 들려온 굵고 낮은 목소리 때문에 그 말을 목구멍으로 다시 삼켜야 했다.

 

“수화야. 잘 지냈느냐-?”

 

수화에게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네는 흰 수염이 가슴 밑까지 내려온 노인. 노인이라고 얕잡아 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오로라가 풍겨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예.”

 

“그럼 됐다, 아- 암송이가 온 것 같더구나.”

 

“암송이가요??”

 

암송이가 누구지?

 

“그래, 객식구를 두 명씩이나 돌보게 되겠구나, 하하하하-”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그 노인은 자신의 뒤에 붙은 사람들과 함께 호탕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근데…객식구? 설마 저거 날 말하는 건가? 어떻게 안 거지?

 

“수화야‥”

 

“….”

 

“수화야!”

 

“어, 어…?”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던 수화가 나의 부름에도 반응이 없자, 나는 수화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수화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안도하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어두워지니까 집에 가자.”

 

“그래. 그러자.”

 

*

“수화야-”

 

아주머니께서 주신 냄비에 담긴 음식으로 맛있는 저녁을 마친 나는 수화 대신 설거지를 마친 뒤 수화가 앉아 있는 소파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의 말에 수화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응?”

 

“아까 그 할아버지 누구야?”

 

“아…신수대인이라고 신의 부름을 받고 신수를 관리하시는 분이야.”

 

“그렇구나.…”

 

‘암송’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지만,

수화가 그럼 다시 멍해질지도 몰라 떼려던 입을 다물었다.

아!

 

“수화야, 아까 아주머니한테 드리던 약은 네 방에서 저번에 만들고 있다던 물약들 중 하나야?”

“응, 맞아- 내가 키운 꽃에서 꽃잎, 줄기, 잎에서 나오는 즙이랑 물이랑 섞으면 진통제가 되거나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기도 하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았다.

 

오늘 보냈던 하루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화와 붕이 어머니, 그리고 물렁이 아저씨, 나에게 신 매움을 선사해주셨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에 대해.

 

“있잖아, 나도 꽃을 가질 수 있을까?”

 

내 말에 수화는 책을 덮고 아무 말 없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화 너도 그렇고 마을 사람들 모두 자기에게 맞는 일을 정말 즐겁게 하고 있는 모습이…뭐랄까 뭉클했어.”

 

“…”

 

“난 음식 솜씨도 없고 손재주도 없고 낚시를 잘한다거나 운동을 잘하지도 못하고 딱히 뛰어난 게 없거든.”

 

“…”

 

“그런데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어.”

 

“꼭 꽃을 갖지 않더라도 되지만 그런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거야. 결과물만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응…맞아.”

 

그리고 수화는 주머니에서 투명한 물약을 꺼내서 나에게 주며 말했다.

 

“나중에 고민이 생기면 이걸 마셔.

차분해진 감정으로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물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수화랑 얘기를 하니 뭔가 꼬여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다.

역시 고민은 혼자 해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야.

지금까지 꽃이다 능력이다 뭐다 해서 내가 그 신기한 모습에 욕심이 났나보다.

나는 책을 더 읽다 자겠다는 수화에게 잘 자라는 말을 고하고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덮고 창문을 바라보니 달빛이 창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내 달빛은 내 방의 한 가운데를 비췄고 마지막으로 달을 바라보며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7. 늑대와 사냥꾼 사이의 앨리스

 

 

이 침대가 좋은 건지 이곳이 편한 건지 한 번 눈을 감으면 좀처럼 깨어날 줄을 몰라 눈을 뜨면 햇볕에 머리가 데워져있는 아침이었다.

나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손을 쫙 피고 스트레칭을 하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눈곱을 떼며 이불이라도 정리할까 침대를 살펴보는데, 베개에 이상한 갈색 돌멩이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이게 뭐지?

 

“흠…어, 어어!?”

 

돌멩이가 아니다, 돌멩이가 아니야!

이건… 직감적으로 씨앗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내 방문을 벅차고 나와서는 식사준비에 열중하고 있을 수화에게 소리쳤다.

 

“수화야! 나 씨앗을!!!…응?”

 

“…”

 

“…유진아?”

 

제대로 보지 않고 소리 질렀던 1초 전의 내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그래, 내 앞에 보이는 부엌에는 수화가, 하지만 거실에 있는 소파에는 남자애로 보이는 새카만 머리의 남자애가 나를 무표정으로 보고 있던 것이다.

 

나는 번쩍 들어 올렸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내리며 수화에게 물었다.

 

“누…누구야?”

 

“어제… 장터에서 신수대인이랑 말했던 ‘암송’이야.”

 

“암송?”

 

맞아, 어제 수화한테 물어보려다가 못 물어봤었는데,

신수대인이 ‘아- 암송이가 온 것 같더구나.’라고 말했었는데,

진짜 왔구나.…

 

근데 날 왜 저렇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는 거지?

 

*

“유진아, 아까 하려던 얘기가 뭐였어?”

 

“아- 아, 맞아! 이것 봐! 이거 씨앗 맞지?”

 

새카만 암송이라는 아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우리 삼인방에게는 고요함이라는 친구가 찾아와서는 몇 분 동안 떠날 줄을 모르더니,

수화의 질문으로 나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내서 수화에게 내밀었다.

 

수화는 씨앗을 잠시 가져가서 자세히 보더니, 이내

 

“이건…”

 

꿀꺽-

나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암송은 날 째려봤다.

 

“유진아, 축하해.”

 

나는 그 씨앗을 들고 방방 뛰었다.

내가 어젯밤에 바랐던 것을 이뤄줄 꽃이 될 것이라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수화는 내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유진아 네가 원한 건 뭐였어?”

 

“음…비밀! 이거 꽃 다 피면 그 때 말해줄게.”

 

“…늦어?”

 

“응?”

 

나와 수화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에, 나는 그 주인공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냐-”

 

암송은 그렇게 말하며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

수화와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붕이 아주머니네 댁에 가기도 하고 집 근처에 핀 예쁜 꽃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수화와 산으로 가는 중이다.

 

산으로 올라가면서 보이는 탐스럽게 열린 열매들을 보며 나는 군침을 흘렸다.

그런 나를 본 수화는 나에게 여러 종류의 열매를 따서 주었고,

그 맛은 실로 미각이 있음을 신에게 감사히 여기게 될 정도로 반성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엄청 달달하지 않고 적당히 달달하면서도 약간 새콤했다.

보라색 포도 같이 생긴 열매는 써서 금방 뱉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수화와 산 정상에 도착해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땀을 말려주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싶을 그 때,

검은 망토를 쓴 사람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람이 불자 망토가 벗겨졌는데, 그건 암송이었고

놀란 눈으로 나와 수화가 바라보자 암송은 그대로 뛰어 내려가 버렸다.

 

암송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뭐, 별거 아니겠지. 하고 꽃밭에 앉아서 쉬면서 수화의 도움을 받아 화분에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흙이 촉촉해지도록 물을 충분히 주었다.

 

그리고 들판에 누워서 낮잠을 자다가 날이 저물었다는 수화의 말에 화분을 들고 조심조심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와 집에 도착하니 암송이 도착해서 소파에 앉아있었다.

아까 일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화분을 창가에다가 잘 놓아두고

나는 침대에 몸을 누웠다. 암송의 눈치를 봐서 그런 것인지 오늘 하루는 너무나도 피곤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도 지킬 생명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방에서 나오니 수화는 소파에 앉아있고 암송은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곁을 지나 수화 옆으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서 나도 모르게 선잠을 자고 있으려니 갑자기 입맛을 다시게 하는 맛있는 냄새가 내 코끝에 안착했다.

 

눈을 뜨고 보니, 탁자에 암송이 음식을 세팅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있기 뭐해서 음식을 같이 날랐다.

 

“잘…먹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여느 때보다 더 조용한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숟가락을 들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는데, 갑자기 속에서 거부감이 느껴지더니 이내 나는 숟가락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화장실로 직행해야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뭐 이상한 걸 먹었나?

 

혹시 몰라 국을 제외하고 다른 음식을 먹어봤는데 속에서 이상한 반응이 느껴지는 음식은 없었다. 오로지 국만. 어째서일까.

 

나에게 물을 건네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수화에게

괜찮다는 뜻의 웃음으로 답했고, 식사의 마지막을 물로 장식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배를 오른손으로 시계방향으로 쓰다듬으며 영문을 몰라 고민했다.

 

그리고 내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어 일찍 잠에 들려 했는데.

 

밖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지금 나가면 식사 때보다 더 어색한 기운이 흐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두 눈을 애써 감았다.

 

 

 

8. 검은망토에 가려진 진실

 

 

아직도 눈꺼풀이 무겁고 비몽사몽하다.

이건 분명히 어제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 걱정 되서 한 잠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소파에 앉아서 뜨문뜨문 선잠을 자고 있었다.

 

아까 전, 내 방문을 노크하며 밥 먹으러 나오라는 수화의 말에,

수화가 괜찮다고 안심하고는 안 먹겠다고 말한 뒤 그제야 꿈나라로 떠났었는데 잠시 어디 다녀온다는 수화의 말에 거실로 나와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암송도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집을 잘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갑작스레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이동했다.

 

어제의 그 쨍그랑 소리가 무엇일까-

식기들도 살펴보고 쓰레기통도 살펴보았는데

도무지 모르겠어서 찾기를 포기하고

잠이나 깨야지 싶어 세수를 하고 머리를 질끈 묶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화분에 물을 준 후

거의 다 읽어가는 ‘꽃에 대한 지침서’를 꺼내들고는 소파에 누워서 읽기 시작했다. 음…이 꽃도 나중에 수화랑 찾아볼까? 에메랄드빛 색인데 저번에 보았던 꽃처럼 정말 예쁨을 넘어선 아름다움의 경지에 있는 꽃이랄까.

 

“달칵-”

 

응?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수화일까 생각했는데 암송이었다. 암송은 날카로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동자에서 암흑으로 둘러싸인 밤을 느꼈다..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뭐…?내가.. 살던 곳?”

 

암송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살던 곳이라니…?

내가 살던 곳...이 어디지?

 

나에게 암송은 검은 가루를 뿌리며 무슨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그 귓가에 맴도는 주문을 마지막으로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 내 주위를 에워쌌을 때였다.

뭐, 뭐지?…무서워..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디 있다고…

 

“이 두려움.. 어디선가 느낀 적이 있는데…”

 

어디서…어디서였지?

이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던 곳이....

 

“삐삐-”

 

도..도서관? 맞아.. 도서관이었어...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있었던 곳이.. 도서관이었어.

 

도서관에서도 이런 어둠속에서 혼자 갇혀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무서워... 무서워..

 

나는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그렇게 꺼이꺼이 울다가..

 

“엄마..아빠.....”

 

엄마...아빠라고..?

 

이게..뭐야..

내가 방금 뭐라 말한 거지?

 

엄마..아빠....?

생각만 했는데도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기억나는 얼굴을 더 자세히 떠올리려 애쓰지만,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갑작스러운 두통이 나를 괴롭게 했다.

 

얼굴이.....기억이....안나...

 

‘유진아....’

 

누구..누구지?

누가 날 이 고통 속에서 제발 꺼내줘..

 

‘유진아...!’

 

제발...

 

“유진아!!!!”

 

번뜩...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암흑 속에서 날 부르는 목소리에 의해 눈을 떴다.

암송...암송은 어디에..

 

나를 암흑 속으로 내몬 암송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추궁하라 했지만

암송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수화..?

 

수화는 인상을 쓰며 암송에게 소리치고 있었고

암송역시 인상을 쓰고 마주하고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나를 본 수화는 놀란 표정으로 괜찮냐며 다가와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수화는 암송에게 다시 소리쳤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왜 괜한 사람을 끌어들여?”

 

“괜한 사람? 형, 내가 걔 외계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영능을 썼을 것 같아?”

 

“뭐?”

 

“국에다가 뭘 넣은 것도, 어제 산에서 얘를 미행했던 것도. 내가 다 확인해보고 결정한 일이야. 형이 얘한테 신수를 먹였다는 사실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대체 언제부터..”

 

“형, 신수대인이 이 사실 알까, 모를까. 알면 형은 이미 토살이 하고도 남잖아.”

 

“나가서 얘기해.”

 

끼익-달칵.

 

소파에 앉아있던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두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뒤늦게 수화와 암송을 따라 나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난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거지?

어둠 속에서 난 뭘 기억하려 한 거지? 자꾸만 의구심이 들고 몸이 떨려왔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똑똑.”

노크소리가 방을 크게 울렸다.

 

나는 눈을 떠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문을 향해 걸어가 문을 열었다.

 

“유진아.”

 

나는 문을 열어두고 방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앉았다.

수화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을 깨기 위해 내가 먼저 말했다.

 

“암송이가 나한테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며 이상한 가루를 던지고 주문을 외웠어.”

 

“…”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어.

뜨니까 어둠 속에 나 혼자 갇혀있었어. 왜 나한테 이러는 걸까 무서웠어.

그런데 어디선가 이 느낌을 겪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어. 그래서 울었어. 울었는데.

나도 모르게 엄마, 아빠라고 말했어.

근데 엄마, 아빠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어. 그리고 누군가가 날 불러서 깨어났어...“

 

“…”

 

“나…왜 기억이 안나..?”

 

“휴..”

 

나의 볼 위로 주르륵 흐르는 눈물 줄기.

수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신수에 대해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어.

내가 예전에 신수를 설명할 때 ‘이 물은 당신처럼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에게 붙어있는 악령을 떼어주는 일을 하곤 해요.’ 라고 말했었지.

악령을 떼어내면서 신수는 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잊게 해.

아예 뿌리까지 잘라내서 다시는 그런 악령에 시달리지 않게 말이야.“

 

“그럼…이 기억들이 모두 악령이었다고?”

 

믿을 수 없어!

엄마, 아빠도 나에게 하나의 악령...이었단 말이잖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수화를 바라보았지만 수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그럼 난 어떻게 해.”

 

“…”

 

“나 집에 돌아가고 싶어, 돌아갈래, 수화야....”

 

나는 수화의 팔을 잡고 매달려 울었다.

수화는 바닥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고, 결국 나는 울며 잠이 들었다.

 

 

 

9. 만개하는 꽃 속의 파랑새

 

 

내가 이불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손을 눈으로 가져다대니,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창밖을 보며 햇빛을 보며 기운 차리자, 라고 생각하며

창가에 놓여있는 화분을 보려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는데.

 

“…!!!!”

 

화분에 심은 씨앗에서

새싹이...났다.

그 새싹을 보며 나의 가슴은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이 즐거움을 수화와 나누기 위해 화분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수..수화야?”

 

부엌에도, 거실에도, 수화의 방에도, 화장실에도…

수화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수화를 찾으러 집 밖으로 나왔는데,

집밖에는 수화가 아닌 검은 망토를 입은 암송이 서 있었다.

나는 나를 차갑게 바라보는 암송의 눈이 무서웠지만,

어쩐지 자꾸만 수화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암송에게 말했다.

 

“수화…어디 갔는지 알아..?”

 

암송은 나의 앞으로 걸어와서 등을 내 주었고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자, 암송은 ‘업혀’ 라고 말했다.

내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상대이지만,

 

그래도 지금 어쩐지 불안한 내 마음이 수화를 자꾸 찾는다.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그렇게 내가 업히자 암송은 숲속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화분을 놓치지 않으려 품에 꼭 안았다.

 

나무 몇 그루를 지나자,

처음 수화를 만났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는 ‘신수’ 에 도착했다.

 

그 호수의 빛도 크기도 그대로지만 다른 점은

이곳에 수화와 나만이 아닌, 다른 마을 사람들과 신수대인이라는 사람이 신수에 모여 있다는 점이다.

 

암송은 신수와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섰고,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신수대인 앞에서 굳은 표정을 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수화를 발견했다.

 

말을 끝냈는지 수화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우리와 눈이 마주친 수화는 신수대인에게 무슨 말을 한 뒤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어제도 봤고 그저께도 본 수화인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나는 수화에게 화분을 내밀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화야.. 이것 봐.. 새싹이야..”

 

내 말에 수화는 화분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축하해, 유진아. 분명 꽃도 볼 수 있을 거야.”

 

그 후에 수화는 암송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뭐라 말했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했지만,

분위기가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수화의 말이 끝나자 암송은 눈시울을 붉히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 하는 나에게 암송은 업히라고 재촉했고,

여자의 직감으로 이건 필히 무슨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직감이었다. 수화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싫다고 말하자 암송은 억지로 날 안고 뛰기 시작했고 나는 고개를 돌려 수화를 바라보았다.

 

수화는 손을 흔들며 환하게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를 안고 뛰는 암송에게 물었다.

 

“어디가는거야? 집에 가는 거면 내려줘. 혼자 갈 테니까.”

 

“집에 가는 거 아냐.”

 

“뭐? 그, 그럼?”

 

“뭐, 어떻게 말하면 너한텐 집으로 가는 걸 수도 있겠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하는 수 없이 암송의 행동에 따르기로 했다.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거지?

수화네 집도 아니라면…

 

축지법을 썼는지 암송은 금세 수화의 집을 벗어나고도 장터를 벗어나서 처음에 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을 때 보였던 거대한 성 앞에 도착했다.

 

여긴 왜 온 거지?

 

성 앞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앞길을 막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암송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땅으로 내려주며 말했다.

 

“내가 너 저 성벽 너머로 넘겨줄 테니까…”

 

나는 암송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자, 잠깐-! 내가 왜? 상상만 해도 무서운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데?”

 

내 말에 암송은 나와 눈을 맞추며

 

“수화 형이 부탁한 거야.

신수대인의 방에는 네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투명한 물약이 있대.

근데 지금 방에 들어가려면 이 병사들 해치워야 되는데 널 지키면서 내가 그럴 수 없어. 이 벽 너머로 넘겨주면 그 때 네가 신수대인 방 찾아서 가면 돼.

병사들 지치면 그 때 나도 갈 테니까 걱정 마라.”

 

수화가…?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또 삼켰다.

 

나는 화분을 품에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빼서 보니 이건 예전에 수화가

 

‘나중에 고민이 생기면 이걸 마셔.

차분해진 감정으로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하며 주었던 물약이었다. 나는 수화를 생각하며 한 모금 마시고 암송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송이 나를 안고 성 곁으로 다가가자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주머니에서

꽃을 꺼내서 꽃잎을 흩날린다.

 

그 모습을 보며 암송은 저 꽃잎들은 칼처럼 날카롭기 때문에 꽃잎에 닿으면 피 몇 방울 흘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며 나에게 꽉 잡으라고 말했다.

 

암송이 나를 안고 꽃잎을 피하다가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파란 가루를 꽃잎을 향해 뿌렸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꽃잎들이 시들해지면서 땅에 툭툭 떨어졌다.

병사들이 놀란 얼굴로 공격을 멈췄고, 이때를 노린 듯 암송은 나를 벽 너머로 힘껏 던져 올렸다.

 

그리하여, 나는 성 안에 안착했지만,

갑작스럽게 아무 말 없이 던져 아무대비하지 못한 탓에 쿵-! 하고 박은 엉덩이는 무사한 줄 몰랐다.

 

엉덩이를 매만지면 인상이 자연스레 찌푸려졌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나의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문 앞에 들어섰다.

 

여기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아무튼 그 덕인지

나는 딱 봐도 다른 방이랑 다르게 값비싼 것으로 장식되어있는 신수대인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신수대인의 방으로 들어가자 암송이 말한 대로투명한 물약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거대한 책이 펼쳐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 책을 자세히 보니 펼쳐진 페이지에 적힌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외계인은 가끔 외시가 00시 11분이 되면 신이 선택한 자들에 한해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그들이 말했다.

신수는 신수인을 제외하고 외계인이 마실 경우 24시간 안에 자신의 의식과 더불어 무의식까지 지배해버리는 것들을 기억에서 지운다. 하지만 잠재의식에서 이 기억을 억지로 이끌어내는 방법은... ‘

 

하고 이 부분이 찢겨져있다.

 

나는 암송의 덕인지 암흑에 갇혀있었던 것 때문인지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간이 12시 7분 이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문을 두드리고 뭔가에 걸려 넘어져 쓰러진 시간까지 합하면 11분정도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암송이 뿌린 그 뭔지 모를 가루에 대한 설명이 바로 찢겨진 이 부분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찢겨진 다음 부분에는

 

'외계인은 신수를 먹고 한 달이 되면 외계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 흑약의 기능도 통하지 않을 만큼 기억은 잠재의식까지 넘어선 곳에 묻힌 것이다.

그러나 외계인이 기억을 되찾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이것 또한 선택받은 자들에 의해 약을 만들어 되돌아 갈 수 있다.

선택받은 자들이 바로 '신수대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이 투명한 병이 신수대인의 방에 있는 이유도 알겠다.

하지만 신수대인이 어째서 나 좋으라고 이 약을 만든 거지?

 

그 때,

 

“쿵, 쿵쿵쿵”

 

거리며 누군가가 이 방으로 뛰어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이 엄습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투명한 물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분과 물약을 품에 안아들고 문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며 소리에 귀 기울였다.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는 암송이 모습을 드러냈고, 놀랄 새도 없이 뒤이어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신수대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수대인을 보자 알 수 없는 공포가 나를 휘감는 것만 같았고 호흡이 가빠졌다.

 

“빨리…마..셔!!!콜록-”

 

암송은 괴로워하며 나에게 마시라 재촉했고

 

“그래, 어서 마시게, 돌아가고 싶지 않을 텐가?”

 

신수대인역시 나에게 마시라고 재촉했다.

 

그 때 나의 귀로는 마치 도서관에서 들었던 기계음처럼 삐-하는 소음이 들려왔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물약과 화분을 내려놓고 귀를 틀어막았지만 소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돌아가야 해....돌아가야 해...’

 

윽.....뭐야…괴로워...!!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갑자기 신수대인이 물약을 집어서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걸 마셔라. 그러면 모두 끝일게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약 뚜껑을 열어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러자 신수대인은 호탕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신수대인이 웃는 이유는 몰랐지만 나는 고통이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나의 몸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수대인은 날 보며 웃던 입을 다시 허-하고 크게 벌렸고 암송은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암송아! 정신 차려!!”

 

나는 떼어지지 않는 발 때문에 소리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어…어째서!!!어떻게!!”

 

신수대인은 갑자기 책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나는 신수대인에게 말했다.

 

“외계인이 외계로 돌아가려면 이 물약이 필요하지만, 이 물약만 쓸 경우에는 외계인의 몸속에서 물약의 효능을 받아들이지 못해 정반대로 몸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며 죽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 물약은 진통제 역할을 하는 ‘수화’가 필요한 거였어요.

수화가 어째서 혼자 지내고 있었는지 그 책을 읽고 알았어요.

신수대인 당신은 수화의 물약을 얻고 외계인이 외계로 돌아가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림칙하지 않게 여겼던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수화’를 만들지 못하게 하려 했겠지만

수화는 착하게도 저에게 이 물약을 준 적이 있었죠.

방금 전 저는 이 물약을 먹었고, 그래서 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겁니다.”

 

신수대인과 암송이 오기 전에 내가 읽었던 페이지로 인해 모든 비밀이 풀렸다. 신수대인이 나에게 그렇게 마시라고 성화한 이유도.

수화가 혼자 살았던 이유도…

 

“크하하하하하하-!!!”

 

나의 말에 신수대인은 미친 것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이 책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지. 그것은 바로 수화 자체가 ‘수화’라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외계인이 온 경우 즉시 수화를 산중턱 너머로 보냈다.

내가 어리석은 게 있다면 수화가 나 몰래 그곳을 떠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수화는 우리 마을 변두리에서 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너와 만날 수 있었던 거다.“

 

하고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수화는 오랜만에 마을을 나간다고 한 걸까,,,?

수화..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의 몸이 점점 사라지고 거의 얼굴만이 형태가 남게 되자

신수대인은 마지막으로 허탈하게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면 꽃이 지기 전에 물 한 번이라도 더 주었을 것을…”

 

나는 눈물을 흘리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수화야….

 

 

 

 

 

 

10. 꽃 피지 않는 꽃

 

 

“짹짹-”

 

“우음…”

 

따사로운 햇살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눈을 뜨기도 전에 뚜벅뚜벅 걷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귓가를 먼저 울렸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다 그 소리의 주인공이 경비아저씨라는 사실을 알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순식간에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보며 경비아저씨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학생!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나는 멋쩍은 듯 웃으며 자리를 뜨려하는데 경비아저씨께서 ‘학생!’ 이라 나를 부르시고 그 부름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춰 선다.

 

“이 화분, 학생 꺼 같은데 가져가야지- 키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거 근데 무슨 꽃이야? 새싹만 봐서는 알 수가 없네.”

 

경비아저씨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정말로 경비아저씨의 발밑에는 자그마한 화분에 귀여운 새싹이 앙증맞게 흙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화분을 들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꿈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다니…

 

나는 내 입에서만 맴도는 그 두 글자의 이름을 불러보며 눈물을 흘렸지만,

이내 눈가를 소매로 쓱쓱-닦아내고 웃으며 집을 향해 걸어갔다.

 

*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치고 집안에 들어서서 제일먼저 화분을 방 창가 근처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집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예전처럼 우울하지도 않고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공부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아침이라는 배경이 깔려있었지만. 나의 방에 놓인 이 화분과…

 

아 맞다!

 

나는 엄마의 마지막 선물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제야 안방 베란다에서 엄마의 선물이 아빠로부터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는 엄마를 잊은 줄 알았는데…

나는 화분의 잎을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닦아주었다.

소홀히 관리했던 과거를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마음에서...

 

 

*

몇 달 후,

 

시험을 마치고 방학을 맞은 나는, 친구들과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고,

아버지와도 사이가 전보다 많이 가까워졌다.

아무 말 없이 오셔서 아무 말 없이 가시던 아버지가 이제는 나에게 전화로 안부를 물어보신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랄까?

 

엄마의 선물도 열심히 관리하고 있고,

신계로부터 받은 선물 역시 열심히 물을 주고 있다.

 

꽃망울에서 멈춰서 도무지 꽃 필 것 같은 기미가 안 보여 내심 서운하지만,

꽃이 늦게 피는 만큼 그만큼 꽃에 대한 애정이 더해지고 사랑이 진해지는 것을 알기에 나는 앞으로도 이 꽃을 끝까지 잘 보살필 생각이다.

 

이 꽃이 꽃피지 않는 꽃이 되더라도 꽃을 피울 꽃망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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