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2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2월 인성교육-1〕 |
|||||||||||
---|---|---|---|---|---|---|---|---|---|---|---|
작성자 | 박용구 | 등록일 | 13.02.05 | 조회수 | 199 | ||||||
한상렬은 동수(東洙)의 장남으로서 강원도 횡성(橫城) 출신이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우국지사 한상열은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어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부하 약 이백 명(세력이 가장 강하였을 때는 1,2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을 거느리고 지평·홍천·원주·평창·영월 등지에서 왜적과 교전하기를 무려 5백여 차례에 이르렀다.
1907년 10월에 이르러 전국의 해산병들이 기존의 의진과 합세하여 자못 성세를 이루어 가자 10월 31일에 한갑복(韓甲復)·민긍호(閔肯鎬)·이인영(李麟榮)·여용서(余龍瑞)·장모(張某)·심상희(沈相熙) 등 의병장이 거느리는 의진이 횡성과 지평간에 있는 모고곡(毛古谷) 일대에 집합하여 8천여 명의 연합 의진이 형성되어 유기적 의병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특히 군사경험이 있는 해산병들이 흡수되었으므로 의병활동도 다소 기동성 있게 전개된 점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08년 2월에 홍천에서 일본의 대부대와 접전을 벌여 격퇴시켰으며 이에 적은 횡성의 일본 수비대를 파견하여 4월 2일 홍주군 월운면 서북후동(月雲面 西北後洞)에 거주하는 한상열의 처자를 납치하여 귀순할 것을 종용하고자 각종의 유인·협박을 가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오히려 20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횡성을 습격하여 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와 경상북도에 걸쳐 가장 강렬하게 일군과 대항하던 민긍호 의병장이 종말을 고한 1908년 8월을 전후하여 만주(滿洲)로 건너가 1919년 홍범도(洪範圖) 휘하의 결사대원 120∼170여명을 인솔하고 연길현(延였吉縣) 일량구사(一兩溝社) 일대에서 군수물품 조달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는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서 홍범도, 전이국(全利國) 등이 조직한 도독부(都督府)의 경호국원(警護局員)으로 선임되는 등 항일활동을 계속하다가 1926년 9월경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전글 | 2013년 02월 우리고장 출신 이 달의 독립운동가〔2월 인성교육-2〕 |
---|---|
다음글 | 교통질서 지키기〔12월 인성교육-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