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포중학교 로고이미지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1학년 2반 박종휘 통일 동영상 감상문
작성자 박종휘 등록일 16.05.30 조회수 83

유언


줄거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의 수 166,000여 점.

그중 가장 많은 66,000여 점이 흩어져 있는 일본.

일본으로 흘러들어 간 문화유산을 모으는데 평생을 바친 이가 있었는데..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나라 전통 유물을 수집하는 데 일생을 바친 제일 교포 문화재 수집가 고(故) 정조문 선생의 이야기.


감상문

일제강점기 때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보내져

가난보다 더 지독한 차별과 냉대를 받으면서 자란 정조문 선생.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부두 노동자로, 막노동꾼으로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 성장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친구가 무심코 한 작은 말에도 상처받는 우리인데, 매일 매일 상처를 받지만 참고, 또 참아가며 지옥같은 나날을 보냈을 정조문 선생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눈물이 그 모습을 가립니다...


그러던 정조문 선생은 어느 날 교토의 고미술품 거리를 걷다 마치 운명처럼 항아리 하나를 보게 됩니다.


50만 엔(한화로 약 50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인 조선의 백자란 말에, 조선인은 함부로 대하면서도 조선의 문화재는 귀하게 여기는 일본인의 모습을 보고 망설임 없이 집 두 챗값을 치르고 항아리를 삽니다.


그의 생각은 바로 이랬습니다.


'일본 속 조선을 모아 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자...'


일본인의 손에서 우리 문화재를 되찾겠다고 다짐한 정조문 선생.


그렇습니다. 태어나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밖에 살지 못한 자신의 조국이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조국의 대한 그리움이 활활 타오르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하나하나 사 모은 문화재 1700여 점.

이것은 '성공한 젊은 사업가'라는 자신의 직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정조문 선생은 말했습니다.


"나의 꿈은 내가 수집한 문화재를 가지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바람에도 그는 광복 후에 고향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북한을 방문하자니 남쪽의 가족이

남한을 방문하자니 북쪽의 가족이 눈에 밟힌 재일 동포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남한도 북한도 내 조국이고 고향입니다. 나는 슬픔을 견디면서 이곳에서 눈을 감겠습니다."


1988년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둘로 나뉜 조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일본의 천년 고도 교토에 세운 통일 미술관인


'고려미술관'


우리 문화유산만을 전시한 유일한 해외 미술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은 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갈 수 없는 고국에 대한 사랑을

우리 미술품에 쏟아

일본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구입하여

마침내 고려미술관을 세운 정조문 선생은

미술관 못지 않은

무형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남과 북이 하나였던 통일 국가 고려.

남과 북이 하나이길 꿈구며 만든 고려미술관.

재일 동포들이 자신의 뿌리를 고민하고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그려보기를 바라던 정조문 선생.


혼신의 힘을 다 쏟은 탓인지 미술관이 문을 연지 불과 4개월 후

통일을 꿈꾸며 만든 그곳, 고려미술관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조선의 흙을 밟아보고 싶어요."


너무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 사소한 소원조차 못 이루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그리워하던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


"단 한 점의 문화재도 유산으로 남기지 않겠다.

통일이 되면 모든 유물을 내 조국에 기증하도록 하라."


자신의 분신인 문화재들이 돌아갈

'하나 된 조국'을 염원한 정조문 선생.

죽는 날까지 한 평생을 조국만을 생각한 정조문 선생을

저는 가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 하나라 칭해봅니다...

이전글 55년만에 부르는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