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중학교 로고이미지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씨름의 역사
작성자 이호성 등록일 11.03.28 조회수 292
  • 부족국가 시대

    우리 민족의 조상은 기원전 3000년~2000년 무렵 신석기 시대로부터 시작되는데 기원전 2333년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부족국가 시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씨름에 대한 자취는 “치우희” 라는 씨름의 명칭이다.
    중국의 “25史”와 우리나라 “한단고기”중 “삼성기”상ㆍ하 편에 보면 치우천왕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전설적인 군신이며 무신인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중국의 “후한서”와 우리나라의 “조선상고사”에 씨름에 관한 명칭 “각저희”와 “씰흠”을 사용하며 씨름에 관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그림 1-1)

  • 삼국시대

    고구려는 삼국시대 중 유일하게 벽화에서 씨름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만주 통화성에 있는 각저총의 벽화(그림 1~2)와 장천 1호 분 (그림 1~3)의 벽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발견된 이 두 벽화만을 볼 때도 고구려인들의 생활에서 씨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알 수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열전 중 김유신의 대목에 유신과 춘추공이 씨름을 하다가 옷고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발견된 정도이고, 백제는 백제의 씨름 방식이 일본으로 전파 되었다는 것이 일본과 양국의 일반적인 학설이다.
    삼국시대는 앞으로 더욱 많은 역사적인 자료를 찾아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씨름은 15세기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충숙왕(1330년)과 충혜왕(1343년)시대에는 상ㆍ하의 예가 없을 정도로 왕을 위시한 신하 등 용사가 씨름을 즐겼는데 이때는 원나라의 지배아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씨름을 통하여 민족 자주성 회복의 염원을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 조선시대

    조선 초.중기의 씨름에 관한 문헌상의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소 찾아 볼 수 있고,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군사들로 하여금 씨름을 겨루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 후기에는 “송경지”, “중국세시기”, “경도잡지”, “해동죽지”등의 문헌 중에 씨름에 관하여 많이 서술되고 있다. 또한 그림으로도 몇 점 남아 있는데 단원의 풍속도(그림 1-4), 기산의 풍속화(그림 1-5, 1-6) 유숙의 대쾌도(그림 1-7) 등은 귀중한 사료이다. 그 외 구한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 동화사 영산전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그림 1-8)

  • 스포츠로서의 근대화

    소규모의 지역적인 지방 씨름이 성행되다가 1912년 10월 유각권 구락부의 주관으로 서울 단성사 극장에서 대회다운 면모를 갖춘 씨름대회가 개최되는 것을 비롯하여 1914년 1월 광무대 극장 주최로 그 극장에서 4주일 동안 씨름대회가 열리었다.
    그 후 씨름에 대한 점점 높아지는 열기와 관심은 1927년 조선 씨름 협회가 창단되면서 1927년 ‘제1회 전조선 씨름대회’ 를 휘문 고등학교에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34년 제 6회 대회가 최종대회가 되어 버렸고, 2년 후인 1936년 다시 ‘제1회 전조선 씨름선수권 대회’를 조선일보사 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1941년 제6회 대회를 마친 후 중단되었다가 1946년 대한 씨름 협회로 명칭을 바꾸며 다시 재건을 보게 되어 1947년 ‘전국 씨름선수권 대회’로 명칭이 바꾸어 7회부터 계속되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는 2009년 현재 제63회가 개최 되어졌다.
    체급이 처음으로 나누어진 것은 1956년 ‘제12회 전국 씨름 선수권대회’였는데, 중량급 (71.3kg 이상), 경량급(71.3kg 이하)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체급별 시합은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어서 5체급으로, 다시 3체급으로 바뀌었다가 현재 7체급으로써 경장, 소장, 청장, 용장, 용사, 장사급으로 구분한다.
    1959년 ‘제1회 전국 장사 씨름대회’가 신설되었으나 6회로 대회가 없어졌고, 1972년에는 ‘제1회 KBS배 쟁탈 전국 장사대회’가 시작되었으나 1994년 23회로 막을 내렸다. 현재 대한 씨름협회에서 주최하는 대회는 ‘전국 씨름 선수권 대회’외에 1964년에 창설된 ‘대통령기 전국 장사씨름대회’는 2009년 현재 46회가 문경에서 개최되었다. ‘회장기 쟁탈 전국 장사씨름대회’는 2009년 현재 39회가 열리었고 ‘전국시도 대항 장사 씨름대회’와 2004년 신설된 ‘학산 김성률 배 전국 씨름 왕 선발 대회’가 있다.

  • 프로 씨름의 탄생

    1982년 4월 민속 씨름 위원회가 발족되고, 1983년 3월에 출범하면서 4월14일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장충체육관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백두, 한라, 금강, 태백, 장사 4체급으로 시작한 경기는 태백장사를 없앤 3체급에서 1991년 5월 다시 백두급(100kg 이상), 한라급(100kg 이하)으로 조정하고 단체전을 신설하였다.
    씨름은 점차 인기를 더해가서 일양약품, 보해양조, 럭키증권, 현대, 삼익가구, 부산조흥금고, 인천 등이 창단되어 합류하였다. 그러나 1997년 IMF외환위기를 맞아 잇달은 팀해체로 인해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마지막 남은 현대 팀은 실업팀으로 옮겨가며 ‘한국 씨름 연맹’도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 오늘의 현황

    프로씨름이 쇄락의 길을 걷고 있던 중 씨름계에 있어 씨름의 부흥을 예고하며 대학씨름연맹이 창설되었다. 2003년 3월 창립된 한국대학씨름연맹은 씨름을 통한 우리 고유 정서의 계승발전, 건강증진, 씨름의 저변확대와 발전을 도모하기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현재 대학씨름연맹에는 20여개의 대학팀, 약 150여명의 선수들이 소속되어 활약하고 있다.
    대학씨름연맹은 프로씨름의 위축과 매스컴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많이 위축되어 있는 씨름의 활성화를 위해서 대한씨름협회에서 개최하는 대회방식과는 차별화된 리그전 형식의 대학장사씨름한마당 대회를 매년 11월부터 2월까지의 기간에 걸쳐 6차례 대회를 개최하고, 그 해 리그의 최강팀과 최강자를 가리는 최강전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시청자들이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감독, 선수와 잦은 인터뷰를 하는 등 MBC-ESPN을 통해 재미있는 중계방송을 하고 있다.
    경기장도 공기를 넣어 안전하고 설치가 용이하도록 새롭게 개발하였고, 샅바싸움 등의 분쟁도 감독, 선수들을 교육시켜 많이 해소 시켰으며, 기술 씨름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대학씨름연맹의 이와 같은 노력은 대학씨름스타의 탄생과 대학씨름 팬클럽 탄생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하고 있으며, MBC-ESPN 중계방송의 시청률 또한 타 스포츠의 시청률과 버금가는 비율을 보이고 있어서 씨름의 발전 가능성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한국대학씨름연맹 초대 회장은 김성율씨(경남대학교 교수:작고함)였고, 2대 회장은 남병주(보국건설 대표이사)씨가 2004년4월29일 취임하여 2009년1월20일까지 회장직을 수행하였다. 현재 2009년 7월 제3대 엄기영 회장이 선출되어 씨름연맹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한편, 대한씨름협회는 39대 회장 인선 과정에서 뼈아픈 산고를 치르며 최태정씨가 회장으로 당선되고 “씨름현안 해결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각 중요 업무에 따라 6개의 소위원회즉, 경기기술분과, 교육연수분과, 단증제도분과, 교류협력분과, 정책행정분과, 홍보 및 학술분과로 나누어 씨름의 백년대계를 위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또한, 씨름의 역사 기록, 홍보를 위해 2009년8월 계간지인 “씨름터” 창간호를 발행했으며, 2009년12월 제2호를 발간하였다.

이전글 세계의 유사 씨름
다음글 훈련일지 작성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