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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작성자 김민지 등록일 12.05.01 조회수 62

▲1908년 6월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에서 출생

▲1911년 3월 4세,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

▲1918년 11세, 덕산공립 보통학교입학

▲1919년 12세,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고 보통학교 자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수업

▲1921년 14세,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

▲1922년 15세, 성주 배(裵)씨 용순(用順) 여사와 결혼

▲1923년 16세,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

▲1925년 18세, 시집 「오추(嗚推)」「옥수(玉睡)」「임추(壬椎)」등 발간

▲1926년 19세, 오치서숙 한학수업 마침, 「매헌(梅軒)」 아호를 얻음,

농촌계몽 농촌부흥운동 독서회운동 시작

▲1927년 20세,「농민독본」(3권) 편저

▲1928년 21세, 부흥원 설립기념 우화 「토끼와 여우」 공연, 월례강연회 개최,「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쓰심, 위친계(爲親契) 조직,월진회(月進會) 및 수암 체육회 조직

▲1930년 3월6일 23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유서를 남기시고 조국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만주 독립군기지를 돌아보고, 중국 청도에 도착 (처음 어머님께 편지를 송부)

▲1931년 5월 8일 24세,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옮김, 한인공우회 조직하고, 노동야학 및 노동운동. 김구, 이유필, 최동오, 김현구, 김의한, 김두봉, 박창세, 안공근 등과 독립 운동

▲1932년 4월 26일 25세, 대한민국 14년에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백범 김구선생과 기념촬영.

▲1932년 4월 29일 25세, 오전 11시40분 (한국시간 12시40분) 상해 홍구공원의거,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응징

▲1932년 5월 28일 25세,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 11월18일

25세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8일 25세,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

▲1932년 12월 19일 25세, 아침 7시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

더 쉽게ㅋㅋ

윤봉길(1908~1932년 12월 19일)

1908년 1세 5월 23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남.

1911년 4세 광 현당에서 저 한당으로 옮겨옴.

1914년 7세 천자문을 외우고 동몽선습을 배움.

1918년 11세 덕산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함.

1919년 12세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교를 그만둠, 최병대 선생에게 한학을 배움.

1921년 14세 매곡 성주록 선생에게 <사서삼경>을 비롯한 중국의 고전을 배움.

1922년 15세 배용순과 결혼.

1923년 16세 오치숙 춘수 사회에서 장원함.

1925년 18세 시집 <오추>, <옥수>, <임추> 등을 퍼냄.

1926년 19세 오치숙 한학수업 마침.

1929년 22세 <기사년 일기> 를 씀.

1930년 23세 일본 경찰들의 감시가 심해지자 만주로 떠남.

1930년 23세 만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붙들려 45일 동안 옥살이를 함.

1931년 24세 칭다오를 거쳐 상아이로 감.

한국인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하며 노동 조합 운동에 참여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각오를 말함.

한인 공우회를 조직함.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계획함.

1932년 25세 4월 29일, 천황의 생일 축하 행사 겸 상하이 사변 전승 경축 기념식이 열히는,

홍커우공원으로 가 미리 준비한 폭탄을 던짐.

사라카와 사령관과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몇 명의 일본군 장군이 크게 다침.

군법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함.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됨.

196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변경됨.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이 중국, 만주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윤봉길로 상하이 훙커우[紅口] 공원에서 거사를 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매헌(梅軒).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하였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

농촌사회운동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해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농촌에서 문화활동이 많지 않던 당시여서 관람객이 매우 많이 모여 성공리에 마쳤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月進會)'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도 이끌어 나갔다.

만주 망명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1930. 3. 6).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宣川)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그는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大連]을 거쳐 산둥반도에 있는 칭다오[靑島]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 할 곳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하였다. 우선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인인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하였다. 한편으로는 국제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金九)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훙커우공원의거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을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불꽃이 된 청년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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