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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 노병대 선생
작성자 김은정 등록일 13.11.11 조회수 250

노병대 선생



11월의 독립운동가는 외눈이 되어도 굴하지 않은 의병정신의 신화, 노병대 선생입니다.

노병대 선생은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삼남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체포되어 한쪽 눈을 제거당하고 10년을 선고 받았는데요. 다시 의병활동을 도모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선고 받고 단식 28일만에 순국하였습니다.


노병대 선생은 경북 상주 화령면 관제리에서 아버지 노종주와 어머니 의성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요. 선생은 기호 남인학자이며 당대 유림의 거두인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989년 34세가 되던 해에 창릉 참봉이 되었습니다.


1905년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낸 일본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는데요. 이 소식을 접한 노병대 선생은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 고종황제로부터 밀조를 받아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이강년 의진에서 좌종사로 참여하였습니다.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임용헌, 충남 연산군에 사는 김운로, 송창헌 등과 함께 속리산에서 의병을 일으킵니다. 서울시위대 및 청주진위대의 해산병을 규합하여 의병은 약 1천여 명에 이르렀는데요. 이들은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하여 충북 보은․청주, 경북 상주, 경남 안의․거창, 전북 무주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게 됩니다. 


 

▲ 청계사 – 노병대 선생 등이 일으킨 의병의 주둔지 현재 모습



 이후 1908년 보은 속리산에 들어와 주둔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는데요. 당시 일본군에게 붙잡혔을 때 왜 의병을 일으켰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의 종족을 다 없애려 한 것이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 노병대 선생 판결문(공주지방재판소, 1908년 9월 14일)



이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에 임했던 선생은 공주재판소로 송치되었는데요. 그는 끝내 굴하지 않았고, 일본경찰에 의해 그의 한쪽 눈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후 폭도내란죄로 기소되었고 10년 형의 유형을 선고 받았는데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특사로 풀려났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항거하다가 강제로 출옥되었습니다.

 출옥 후에도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고자 군자금 모집을 시작했는데요. 1911년 선생은 부하들을 이끌고 풍기에서 군자금 모집하였고, 함창의 한익원과 함께 상주읍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12년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한 후 안동의 참봉 유시일의 집에 돌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요. 1913년 3월 12일 다시 체포되어, 191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노병대 선생은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투지를 꺾지 않고 단식으로 항거하였는데요. 단식 28일만인 1913년 7월 10일에 순국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독립을 향한 확고한 신념과 투지가 남달랐던 노병대 선생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순간 앞에서도 언제나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일제에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은 마땅히 되찾아야 하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임을 노병대 선생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병대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해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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