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립운동가 황학수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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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은정 | 등록일 | 13.09.10 | 조회수 | 158 |
▲ 황학수 선생 9월의 독립운동가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에 몸 바쳤던 참군인, 황학수 선생입니다. 황학수 선생은 1877년 서울 화동에 부친 황두연과 모친 홍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884년 6세 때 어머니와 함께 충북 제천으로 내려와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학행과 범절이 뛰어난 ‘허증’ 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어머니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이주하였고, 졸업 후에는 육군 참위로 임관되어 시위 제1연대 제3대대로 부임하였습니다. 육군연성학교 교관으로 복무할 당시, 경북일대의 의병진압 명령을 받은 선생은 안동진위대 대장직을 사퇴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의병의 사살을 막고 체포 후 모두 석방 조치하였습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하자, 제천으로 내려가 보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는데요. 육군무관학교 동기생 다수가 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망명을 결심하여 1919년 3·1운동 발발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간 선생은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19년 11월 선생은 군무부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이듬해 12월 군사간부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임시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북경 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여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군사단체의 통일을 모색하였습니다. 1932년 선생은 한국독립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길림구국군과 함께 한중연합토군을 편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는데요.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1933년 10월 오의성부대의 기습으로 독립군 대부분이 와해되자 선생은 만주를 떠나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 직원들의 모습 1938년 장사에서 임시정부에 합류한 선생은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였고, 병력을 모집하고 부대를 편제하는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조국 광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최전방에서 광복군을 지휘하였습니다. 이렇듯 선생은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독립군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활동하였던 유일한 인물이자 일평생 군인으로 최전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정부에서는 1962년 황학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습니다. 황학수 선생은 대한제국의 군인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만주에서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도 활약하였으며, 한국광복군사령부 총사령 대리 및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조국 광복을 맞기까지 그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였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황학수 선생의 헌신과 그 정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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