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독립운동가 - 강영소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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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은정 | 등록일 | 13.08.01 | 조회수 | 162 |
8월의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 명문가문, 미주 한인사회의 선구자이신 강영소 선생입니다. 강영소 선생은 평안남도 증산에서 1886년 2월 18일에 태어났습니다. 1903년 증산군 공립소학교를 마치고 1905년 4월 부친 강명화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이민한 선생은 에와농장에서 설립된 친목회와 호놀룰루에서 설립된 공진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 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는 등 국가 정세가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국권회복을 후원하고 교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한인단체들은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였는데요. 이 단체에서 강영소 선생은 총무와 서기 등을 맡아 활동하였습니다. 1909년 2월에는 한입합성협회와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선생은 양 단체의 활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강영소 선생과(좌) 대한인국민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강영소, 홍언, 최정익(우) 1913년 5월 강영소 선생의 집에서 흥사단의 창립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선생은 안창호 선생이주도한 흥사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916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국어교육의 강화, 새 이민자 관리, 실업부 설치, 스티븐스 처단사건으로 형 집행 중인 장인환의 석방청원서 제출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선에 통일성을 두기 위해, 선생을 하와이에 대한인국민회 특파위원으로 파견하였습니다. 1920년 11월,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이 되어 교포사회의 결집와 독립운동 지원을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후 1923년 시카고로 이거하여 임시정부재정후원회 위원,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장 등으로 10여 년간 활동하다가 1934년 8월 뇌출혈로 별세하였습니다. 강영소 선생의 집안은 부친과 5형제 모두가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요. 이에 정부는 2011년, 제92주년 3?1절을 맞아 선생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또한, 2012년 부친 강명화 선생과 동생 강영문 선생은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을, 동생 강영각 선생은 1997년 건국포장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 에와친목회, 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조직하여 이끌었으며, 흥사단 간부 및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맡아 동포사회를 이끌었던 지도자입니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들보, 강영소 선생의 이러한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가 8월 한 달 간 독립기념관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된다고 하는데요. 독립기념관을 방문하시는 분들께서는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도 꼭 한번 들려보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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