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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 호머 헐버트 박사
작성자 김은정 등록일 13.07.03 조회수 182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7월의 독립운동가’로 호머 헐버트 박사를 선정했다고 28일 밝혔다.

올해로 탄신 150주년을 맞은 헐버트 박사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한국의 영원한 벗‘으로 살다간 인물이다.

헐버트 박사는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청년의 계몽에 기여했으며 독립신문 창간 지원과 ‘Korea Review' 창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 특사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박사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에서 아버지 칼빈 헐버트와 어머니 매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사이면서 미들베리 대학 총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 창립자의 후손이었다.헐버트는 엄격한 도덕성, 인간 중심사상 및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 속에 성장했으며 다트머스 대학에서 수학하고 1884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마친 후 해외선교사의 길을 택했다.

미국인 청년 헐버트는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자격으로 처음 내한했다.

육영공원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학교로 양반 자제와 관리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 헐버트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세계지리서를 펴내는 등 한국청년에게 세계를 알리는 계몽활동에 전념했다.

1893년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에 관한 집필활동에 집중했다. 영문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와 이후 1901년부터 본인이 편집책임을 맡았던 'The Korea Review'에 한국에 관한 1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여 구미열강에 한국을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헐버트 박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한국의 정치와 사회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11월 고종황제를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춘생문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또한 YMCA의 창설과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근대적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 보호통치’ 문제가 표면화되자 워싱턴 밀사활동을 전개했다.

고종의 친서를 휴대해 워싱턴으로 가 일본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과 미국의 밀약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헐버트 박사는 1906년 다시 내한해 1907년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이준, 이동휘, 김구 등에게 전하고 헤이그 밀사의 막후활동을 전개했다.

헤이그 밀사 3인과 함께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프랑스어로 번역된 호소문은 언론을 통해 세계 각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은 외교권이 상실되었다는 이유로 참가자격을 얻지 못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헐버트는 미국에 돌아간 후에도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광복 후 1949년 국빈자격으로 그토록 갈망한 독립된 한국을 다시 찾았던 그는 내한 후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영면했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유언에 따라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정부에서는 헐버트 박사의 공적을 인정해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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