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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3․15 의거 - 3월 15일
작성자 김은정 등록일 12.03.14 조회수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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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3월 15일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를 비롯한 자유당의 부정 선거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이들은 당사로 돌아와 10시30분에 선거 포기를 선언했으며, 이내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당 간부들이 앞장을 섰고, 저녁 7시 30분경 1000여 명의 마산 시민이 민주당 마산시당사 앞에 모이게 했습니다. 시민과 학생들이 뒤를 따르는 시위대가 행진해 감에 따라 시위군중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경찰이 정남규 등 당 간부들을 연행하면서 강력 대응하자 오히려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나 밤 8~9시경에는 만여 명이 넘었습니다. 이때 경찰과 대치하였는데 정전이 되었습니다. 경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고 경찰의 발포는 시위대를 분노하게 만들어 돌을 던지며 이에 맞섰습니다. 시위대는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파출소 파출소장의 집 등을 파괴했습니다.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도 파괴되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뒤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시민들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을 뿐만 아니라 경찰 책임자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이 났었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또한, 4월 11일 아침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김주열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의 모습으로 마산만에 떠 있는 것이 발견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4·19 혁명을 촉발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사건이 발생한지 9년이 지난 1969년에 마산시 구암동의 애기봉 일대에 1,200평으로 사건 당시 희생자의 묘역을 조성하여 이듬해 1월에 묘 13기를 이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 이곳을 성역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뒤 1996년에 계획이 확정되면서 1998년 3월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2002년 7월 22일 마산시가 묘지 일대의 관리권을 국가보훈처로 이관하였고, 이후 8월 1일에 국립 묘지로 승격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마산 3.15의거를 본받아 다시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어떤 행위도 일어나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산시위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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