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가 이종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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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성복련 | 등록일 | 11.03.07 | 조회수 | 214 |
선생은 1856년 경기도 광주 관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성장과정은 알려진 바가 없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한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아우르는 북접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던 시기 박인호 등과 함께 교단 운영에 참여하였고 1905년 12월 천도교가 창건되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중앙교단의 고위 간부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계속되던 중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도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게 일었다. 1919년 2월 25일, 선생은 권동진,오세창을 만나 독립선언 참가 제의를 수락했다. 천도교 중앙교단의 최고직인 장로였던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3월1일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천도교단의 원로로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1922년 7월, 천도교 혁신파를 중심으로 지하 독립운동조직인 고려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선생은 위원장 홍병기, 부위원장 최동희와 함께 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고려혁명위원회는 이후 고려혁명당으로 이어져 만주의 정의부 계열과 국내의 천도교혁신파·형평사가 연합하여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 조직이 탄로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단행되어 고려혁명당을 주도하던 홍병기, 최동희 등 간부 대부분이 투옥되자 선생은 이러한 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동학농민전쟁, 3·1운동, 고려혁명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민족 독립을 실현하고자 평생을 매진했던 선생은 1931년 4월 2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이종훈은 동학,천도교의 지도자로서 민족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활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동학농민전쟁, 2.1우농에서의 활약, 고려혁명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민족독립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갑진개화운동과 1920년대 천도교 혁신운동에 참여하면서 문명개화를 통한 민족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이종훈의 강직하고 일관된 삶에 대한 세인의 존경심은 그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서 앞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천도교의 장로로 또한 종법사 고문을 역임한 정암 이종훈씨는 금 2일 오전 3시 40분 향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씨는 일찍 기미년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33인 중의 최고령자로 그는 본래 성정이 강직하여 한번 굳게 정한 뜻이라면 변한 일이 없다고 한다(『동아일보』1931년 5월3일 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종훈의 막중한 업적에 비해, 그의 구체적인 행보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동학농민전쟁, 갑진개화운동, 3.1운동, 고려혁명위원회 등을 다룬 자료에 그의 이름이 간간히 등장하는 수준에 그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종훈의 행보와 업적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활약했던 민족 운동과 근대화 운동의 흐름을 재구성하고, 그 가운데 이종훈의 위상과 역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1. 동학농민전쟁에서 북접 지도자로 활약하다. 이종훈은 1856년 3월 2일 경기도 광주 관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동학에 입도한 것은 1883년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1892년부터 1893년에 걸쳐 일어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도부 명단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교조신원운동이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처형된 뒤 그 억울함을 벋고 동학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동학교단이 벌인 공개적이고 집단적인 운동을 말한다. 동학지도자로서의 이종훈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 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한다. 동학농민전쟁은 호남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방봉건,반침략 투쟁으로 크게 고부민란,1차봉기, 집강소 시기, 2차 봉기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고부민란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의하여 전봉준이 주도한 민란이었다. 이어 전봉준이 동학접주 손화중을 설득하여 전라도 일대의 동학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하니, 이것을 1차 봉기라고 한다. 농민군은 황토현과 정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전주성에 입성하여 정부군과 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대민행정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농민군은 추수기가 지나기를 기다려 1894년 10월 2차 봉기를 일으켰다. 1차 봉기를 거치면서 동학은 호남에 기반한 남접과 호서에 기반한 북접으로 분화되었다. 그런데 남북접의 분화는 지방만이 아니라, 당파에 근거한 것이기도 했다. 최시형이 북접대도주 혹은 북접법헌의 명의로 동학 지도자들에게 임명장을 발행하던 관행에 근거해 현상 유지를 원하던 최시형계를 북접으로, 정치 변혁을 도모한 전봉준계를 남접으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1차 봉기에서 최시형을 중심으로 북접은 소극적인 태도로 협조하지 않았다. 또한 집강소 기간 동안에 최시형은 계속 남접의 행동을 견제했다. 북접 계통의 호남, 영남 동학교도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단속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남북접의 갈등은 점차 심화되었다. 북접의 지시를 받는 호남의 동학교도는 결코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전봉준이 최시형의 지시를 무시하고 직접 접주와 접사를 임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정부군이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북접 동학교도를 토벌하면서 북접 지도부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군은 동학교도와 난민, 북접과 남접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비도라고 지목하여 탄압했다. 견디다 못한 북접 동학교도들이 최시형에게 봉기를 요구했다. '지금 관리의 참학이 심하여 우리부모처자로 하여금 구렁에 떨어지게 하니 이것이 그치지 않으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의(義)에 의지하여 포(包)를 일으켜서 저 화를 제거하고자 하니 선생은 허락하고서' 라고 간청했다. 당시 북접 내 동학교도는살 길을 찾아 동학이란 이름을 빌려 들어온 농민, 상인, 천민 등이 대부분으로 반정부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즈음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 등으로 배외사상이 고조되면서 유생, 퇴직 관리 등을 주도하는 의병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교조신원운동 당시 척왜양을 외치며 반침략의 차원에서 저항의식을 표출한 바 있는 최시형은 손병희, 손천민 등의 최측근이 봉기할 것을 청하자, 결국 보국안민을 기치로 2차 봉기에 합류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최시형은 곧바로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제 전라도 각지의 동학농민군은 남북접을 따지지 않고 접주 중심으로 모였다. 북접통령에 임명되어 최시형에게 통령기를 받은 손병희는 충청도는 물론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까지 망라한 각 포에 일제히 동원령을 내렸는데, 10만 대군을 모였다고 한다. 이 때 이종훈은 경기도 광주 출신의 북접 지도자의 일원으로 손천민, 박인호 등과 함께 활약을 펼쳤다. 그는 충주의 홍재길,이용구,신재연,수원의 김내현, 음죽의 박용구,권재천, 안성의 임명준,정경수, 양지의 고재상, 여주의 홍병기, 임순호,신수집,임학선,이천의 전규석,전창진,이근풍,양근의 신재준,지평의 김태열,이재연,광주의 염세환,원주의 이화경,임순화,횡성의 윤면호,홍천의,차기석,심상현,오창섭의 포,즉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지휘했다.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보은 장내리에 모여들었다. 이종훈 휘하의 이용구,신재현,홍재길,정경주,박용구 등이 거느린 동학농민군은 충주 무극장터에 모여 보은으로 향하던 중, 괴산에서 정부군,일본군을 만나 접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한 일본군은 충추로 후퇴했고 이종훈 휘하의 부대는 괴산읍을 점령한 뒤 다음날 보은으로 향했다. 충청도의 손천민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청주 쌍고장터에서 정부군과 접전을 벌인 뒤 보은으로 향했다. 권병덕과 청주의 임정준 등은 문의를 거쳐 보은에 모여들었다. 이처럼 충청도 내륙과 강원도,경기도,경상도에서 출발한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일제히 보은 장내리로 향했다.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보은 장내리에 모여 대오를 정비했다. 선봉에는 청색 깃발을 든 정경수포가 나섰다. 이용구 포는 우익으로 흑색 깃발을 들었다. 이 때 이종훈 포는 좌익으로 백색 깃발을 들고 나섰다. 전규석 포는 후군으로서 적색 깃발을 들었다. 손병희는 황색 깃발을 앞세운 중군을 지휘했다. 이후 북접은 대오를 갑을로 나누어, 갑대는 영동 옥천을 거쳐 공주로 향했다. 을대는 회덕에서 청주병영군을 전멸시킨 뒤 연산을 거쳐 논산에 이르렀다. 논산에서는 남접 지도자 전봉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봉준은 일찍이 북상하여 강경에 머물다가 논산으로 나와 북접군이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논산에서 전봉준과 손병희가 만나면서 남북접 연합군이 만들어졌고, 동학군의 대본영이 설치되었다. 남북접 연합군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 공주로 향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에서 정부군,일본군과 혈전을 거듭했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무기와 화력에 밀리면서 우금치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결국 논산,금구,태인 등으로 물러났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손병희,손천민,이용구,이종훈 등의 북접 지도자들은 태인까지는 전봉군과 행보를 같이 하며 연합군의 명목을 유지하다가 결국 북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시형이 임실에 은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합류해서 북쪽으로 내달았다. 그 과정에서 북접군은 무주에서 유생들이 이끄는 민보군과 한바탕 접전을 벌였다. 북상하는 길에 보은 북실에서는 청주병영군의 습격을 받고 달아나야 했고, 충주 외서촌에서는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충주 무극시장에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북접의 지도자들은 이후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이종훈은 손병희와 함께 충청도를 배회하며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2. 문명개화를 위한 민회운동을 전개하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피신 생활을 계속하던 최시형은 1896년 1월에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에게 각각 구암, 의암, 송암의 도호를 내리는 공동전수식을 거행하고 3월에 지방 두령을 임명하는 등 본격적인 조직 재건에 착수했다. 1897년 12월에는 손병희에게 북접대도주의 도통을 전수했다. 손병희가 제3대 동학교주에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다음해인 1898년 4월에 최시형은 결국 원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시형이 원주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이종훈은 논 10마지기를 팔아 돈 200량과 옷 한 벌을 마련하는 등 최시형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손병희는 최시형의 옥바라지도 이종훈에게 맡겼다. 동학 지도자 대부분이 사실상 수배 대상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이종훈이 최시형의 옥바라지에 전념한 것은 대단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종훈은 먼저 간수 역할을 하는 포졸 김준식과 형제의 인연을 맺는 등 교분을 쌓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최시형에게 의복과 음식을 몰래 차입했다. 이종훈만이 아니라, 홍주의 동학교도인 김주열도 밭 10마지기를 팔아 옥바라지 비용을 댔다. 최시형은 죄수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이종훈에게 돈 50량을 마련하도록 하여 죄수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한, 이종훈을 통해 동학교도들에게 마음을 편히 하고 도를 닦는 일에 힘쓰라는 훈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종훈은 최시형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예를 다함으로써 동학교도, 천도교인에게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최시형은 체포된 지 두달 만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종훈은 그날 밤 폭우를 무릅쓰고 김준식과 함께 광희문 밖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최시형의 시신을 거두어 광주 송파에 있는 이상하 소유의 산에 가매장했다. 그리고 다시 이종훈의 주도로 1900년 5월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 있는 천덕산에 이장했다. 최시형 사후 손병희, 손천민, 김연국 등 3인방은 교권은 물론 활동노선을 놓고 갈등했다. 김연국이 충남의 동학교도가 모두 그와 연결되었다고 장담할 만큼 가장 강력한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다. 교조신원운동 시절부터 종교 활동에 전념할 것을 주장했던 온건파를 대표하는 김연국.손천민과 전봉준의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동학농민전쟁 당시 북접의 통령으로 활약한 손병희 간의 갈등도 상당했다. 충청도 해안 지방을 기점으로 동학 조직 재건에 맹활약을 했던 박인호를 끌어들여 춘암 도호를 내리는 조치 등을 통해 지도력을 확보해 나간 손병희는 마침내 1900년 7월 풍기에서 거행된 설법식에서 법대도주에 추대되면서 교권 경쟁의 최후 승자가 되었다. 손병희는 교권을 장악하자 문명개화노선으로의 방향전환을 도모했다. 손병희가 방향전환을 모색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 이후 서울이나 개항장인 원산, 혹은 변경 도시를 배회하면서 시세의 추이를 탐색하고 동학 재건책 마련에 골몰했던 시기부터 모색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동학과 달리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선도했던 독립협회의 경험에 주목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근대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세에 조응하여 문명개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병희의 방향전환은 직접 문명개화의 진수를 체득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는 1901년 이종훈을 비롯한 박인호,홍병기,이용구 등 측근에게 교단을 맡기고 '외국을 유람하여 문명성질과 세계형편을 자세히 알고 현대문명을 수입할 필요가 있다'며 외유를 단행했다. 미국행을 놓친 손병희의 최종 귀착지는 일본이었다. 손병희는 외유에 앞서 교단의 결속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측근인 이종훈에게는 정암, 홍병기에는 인암(仁菴), 손병흠에게는 강암(剛菴), 이용구에게는 지암(智菴), 엄주동에게는 용암(勇菴)이라는 도호를 내리는 의례를 시행했다. 손병희의 문명개화로의 방향전환은 정치방면으로의 적극적인 진출을 의미했다. 이종훈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는 동학의 합법화와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망명객 손병희는 문명개화파 망명정객인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등을 동학에 끌어들여 대한제국 정부에 저항하는 반정부투쟁을 전개했다. 동학 지도부의 정치투쟁은 우선 대한제국 정부에 국정쇄신을 호소하는 상소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손병희는 동학 간부인 이인숙을 통해 1903년 의정대신 윤용선과 법부대신 이윤용 앞으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요지는 국회를 설립하고 종교를 반포하며 재정을 정리하고 정치를 개선하며 유학을 장려하라는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일본의 승전을 예상하고 곧바로 일본 육군성에 1만원이라는 거액을 헌납했다. 국내의 동학교도에게는 일본군을 원조할 것을 지시했다. 손병희는 일본 당국과 밀약을 맺고 일본을 도와 러시아를 치고, 친러정부를 타도하여 정권을 쟁취한 후 정치 개혁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손병희가 반일,친러의 성향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1904년에 이종훈을 비롯한 40여인의 동학 지도부를 도쿄로 불러 들여 독립협회의 민회운동 방식을 도입한 대동회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동학 지도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계속 회합하며 대동회를 중립회라 고쳤으며 그 해 9월 최종적으로 진보회를 조직하여 경향 각지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갑진개화운동이라 부른다. 진보회를 결성할 당시 총괄을 맡은 것은 이용구였다. 이종훈은 박인호, 엄주동, 홍병기, 송병준, 나용환 등과 함께 그를 보좌하여 활동했다. 진보회는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히 할 것, 정부를 개선할 것, 군정.재정을 정리할 것,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할 것' 등의 4대 강령을 내걸고 정치개혁을 위한 민회운동을 전개했다. 손병희가 진보회에 걸었던 기대는 16만원이라는 거액을 결성 자금으로 내놓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16만명이나 동원된 대대적인 시위운동은 그들을 '개화한 동학당'으로 파악하며 위험시하는 정부의 강경 탄압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더욱이 진보회원들이 문명개화를 상징한다며 흰옷 대신 검은 옷을 입고 상투 대신에 짧은 상고머리를 하고 다니면서 진보회의 민회운동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도 적지 않았다. 이 때 이종훈도 솔선하여 단발하고 색의를 입으며 민회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진보회는 송병준을 주축으로 독립협회 출신 등이 함께 결성한 일진회에 합병되었다. 이처럼 상소운동, 외세 활용, 민회운동 등 여러 방식을 동원한 동학의 합법화와 국정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은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재야단체인 일진회를 통해 정치적 발판을 확보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그런데, 일진회가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위임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고, 실제로 곧바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진회의 이러한 정치 행보는 손병희의 동학교단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다. 손병희는 신변안전을 보장받자, 곧바로 귀국했다. 그는 귀국에 앞서 동학에 입도한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등의 문명개화파와 함께 동학 개편 방안을 마련했다. 그것은 단순한 개조가 아니라 천도교의 창건으로 가시화되었다. 이종훈은 동학 지도부로서 일진회의 친일 행보에 가담하지 않고,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창건을 주도하며 천도교 지도자로 거듭났다. 3. 민족 독립을 염원하며 3.1 독립 선언에 뛰어 들다. 천도교의 창건은 종교적 차원에서 문명개화로의 방향전환을 천명한 것이었다. 손병희는 귀국 직후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고 전반적인 체제 정비에 착수했다. 우선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중앙총부 산하에 각 부서를 설치했다. 교단 지도부는 대도주 이하 성도사,경도사,신도사,법도사 등의 도사, 교장,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 등의 육임, 대교령,중교령,소교령 등의 연원대표로 구성되었다. 전국적으로는 대교구-중교구-소교구가 설치되었다. 또한 4년여에 걸쳐 포접제에 기반한 연원조직을 완전 장악하면서 명실상부한 교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친일행각을 벌이는 일진회 간부들은 출교당했다. 일진회는 천도교에 대응하기 위해 시천교를 창건했다. 이종훈은 천도교 창건 당시부터 중앙총부의 고위 간부로 활약했다. 처음 맡은 직책은 육임 중 하나인 집강이었다. 이어 서응관장, 현기사장, 혜양과장 등의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국망 직후 대한협회와 일진회를 비롯한 모든 정치단체는 해산되었지만 종교단체인 천도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천도교인의 수가 국망을 기점으로 급증했다.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기억과 함께 정서적으로 박래품인 기독교를 수용하기 어려웠던 지식인과 민중에게 천도교는 위안과 희망의 전도사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폭발적인 천도교 입교 선풍을 몰고 왔다. 가파른 상승세는 차츰 둔화되었지만 천도교세는 1910년대 내내 꾸준히 배가되는 양상을 보였다. 박은식은 천도교의 이러한 교세신장에 대해 '신도가 날마다 증가하여 300만을 헤아린다. 그 발전의 신속함은 거의 고금의 종교계에 일찍 없는 일이다' 라고 평가했다. 1910년대 무단통치하에서 민족운동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는 전혀 불가능했다. 하지만, 민족 진영 지도자들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외교론,실력양성론,무장투쟁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 방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문명파가 주도하는 천도교 지도부는 대한제국기 이래의 실력양성노선에 입각해 교육운동에 주력했다. 그들은 일단 무단통치하에서는 천도교를 보존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준비론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천도교 내에는 소수파지만, 천도교가 무장투쟁 등을 통한 항일운동에 뛰어들 것을 요구하는 지도자도 있었다. 최시형의 장남인 최동희의 경우, 손병희에게 제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6년에 항일운동 전개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손병희 이상으로 최시형에 대한 경외감과 충성심을 갖고 있던 이종훈은 개인적으로는 최동희와 가까이 지냈지만, 교주인 손병희의 준비론적 인식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1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종사장에 이어 도사실 최고직인 장로에 임명되었다. 명실상부한 천도교단의 최고 어른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1913년 손병희는 74인의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공동전수심법식을 거행했다. 이 때 참여한 지도자 중 이종훈은 서열상 박인호 다음인 2위를 차지했다. 천도교의 원로로서 그는 책 읽기를 즐기며 의친왕 이강공, 윤치소 등과 더불어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에서 활쏘기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1919년 천도교는 조직적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대표 중 천도교인은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은 천도교를 이끄는 핵심간부들로 각 기관이나 연원 대표의 자격으로 서명에 참여했다. 손병희는 천도교 기관의 총대표로, 권병덕은 천도교중앙총부 대표로, 최린은 보성학교 대표로, 이종일은 천도교월보사 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중앙교단의 원로인 장로 이종훈, 홍병기와 도사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임예환,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김완규, 박준승 등이 서명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5명의 천도교 지도자 모두는 동학농민전쟁, 갑진개화운동, 대한협회 혹은 일본 유학생 단체의 간부로 활약한 정치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종훈은 2월 25일 오세창의 집에서 권동진과 오세창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독립 선언 참가 제의를 받고 수락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판사가 '조선 독립에 대해 크게 갈망하고 있으며 한일병합에 극렬히 반대하였냐'고 묻자, '조선 민족으로 어찌 그 마음이 없겠소'라며 당당히 응수했다. '독립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선민족이 자유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독립하려고 하였다'고 대답했다. 그는 2년형을 선고 받았고 1921년 11월 4일에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임예환, 홍기조, 권병덕, 김완규 등과 함께 출옥했다. 그는 출옥 직후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1921년 12월호에 '복당강시(福堂降詩)'라는 장문의 한시를 실어 송구영신의 뜻을 빌어 자신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일제의 탄압으로 존폐의 위기에 처하지만, 또한 3.1운동에서의 활약 덕분에 정치적 위상과 사회적 영향력은 일층 제고할 수 있었다. 천도교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촉발된 3.1운동에서 이종훈 역시 영어의 몸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며 당당히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최고령자였다. 4. 천도교 혁신파를 후원하며 민족 운동에 가담하다. 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과 계급운동의 여파로 사회전반에 민주주의, 특히 자유와 평등을 구가하는 시대풍조가 확산되면서 천도교 내에서도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독재에서 중의로, 차별에서 평등으로'의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혁신운동의 중심에는 최시형의 장남인 최동희가 있었다. 최동희는 '시대의 요구와 정의의 공론'이라는 취지를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지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1921년부터 천도교의 제도와 인사에서 본격적인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제일 먼저 의사기관인 의정회에 관한 규정이 반포되었고 전국적으로 60개 구역에서 의정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의정원 선거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했고 빈부에 관계없이 18세 이상의 교인 누구에게나 1표를 부여하는 보통선거 방식을 채택했다. 공선된 60명의 의정원 중 약 1/3 정도는 중앙에서 명망성과 영향력을 갖고 있는 소장급 지도자들이었다. 그해 말 3.1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이종훈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이 잇달아 출옥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전도사회가 결성되었다. 전도사회는 혁신운동을 지지하고 또한 주도했다. 이번엔 이종훈 역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의 편에 섰다. 전도사회는 중앙기구는 종법원, 종무원, 종의원으로 삼권이 분립하는 방향으로 개편하고 교주선거제를 실시하며 연원제는 개정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공화제적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절대군주체제와 유사한 기존의 교단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파가 이 개혁안을 교단 권력 찬탈 음모로 이해하며 적극 저지하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혁신파가 상당수의 지방 천도교인과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의기구인 의정원 설치에는 동의했으나, 교주선거제와 연원제 개정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혁신파는 전도사회의 지지하에 보수파는 물론 천도교청년회 간부 등 100여명이 참여하는 간친회를 개최하고 공개적으로 교단 민주화 방안의 취지를 설득했다. 또한 병석의 손병희가 혁신안이 시대에 순응한 개혁안이라며 찬동을 표시하면서 대세는 혁신파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마침내 보수파와 혁신파가 타협하여 교주선거제 실시, 연원제 폐지, 중앙기관의 '3권 분립' 등을 내용으로 공화제를 지향하는 「천도교종헌」을 마련했다. 혁신파의 교단 핵심부로의 진출은 교화를 담당하는 종법원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종법사 18명 중 혁신파 혹은 혁신운동의 동조자는 이종훈을 비롯하여 홍병기, 이병춘, 임예환, 홍기조, 정계완, 나인협, 권병덕, 오지영, 윤익선, 박봉윤, 김문벽 등 13명에 달했다. 보수파는 기득권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자, 병석의 손병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교주 선거제와 연원제의 폐지는 교단 존립의 구심력을 파괴하는 것으로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결국 손병희가 시기상조론에 동의하면서 순항하던 혁신운동에 제동이 걸렸다. 이종훈 등의 전도사회가 나서서 손병희를 설득했지만, 손병희는 자신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천도교대헌」체제로의 복구를 명령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혁신운동에 대한 여론의 지지에 고무된 상당수의 의정원들이 혁신파에 가담해 손병희의 권위에 도전했다. 전도사회도 혁신운동의 지속적인 추진을 다짐하는 회맹식을 가졌다. 혁신파 대 보수파의 파쟁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이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보수파에 가담하고 말았다. 마침내, 보수파 주도로 「천도교대헌」 체제로의 복귀를 골자로 한 손병희의 친명서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이 주도하여 혁신파의 중진인 조인성과 김봉국은 물론 이종훈.홍병기,정계완,오지영 등의 원로급을 교단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교적에서 제명하고 출교시켜 버렸다. 혁신파에 대해서는 총공세를 펼치며 언론매체 등을 통해 '최동희 일파는 겉으로는 문명의 간판을 붙이고 있지만 속에는 야심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당시 천도교 내분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최고 어른 대접을 했던 이종훈.홍병기와 같은 장로마저 분명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 제명한데서 드러난다. 이종훈의 입장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었다. 교단의 분규가 파국으로 치닫던 1922년 5월 손병희가 사망했다.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손병희 사후 천도교의 차세대 지도자로 기대를 모은 이는 권동진, 오세창, 최린, 정광조, 이종린 등이었다. 당시 중앙교단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그들이 선택한 위기타파의 묘책은 '혁신파의 사상적 경향성을 불문에 부치고 지방 천도교인의 동요를 막기 위해 무조건 합동한다'는 것이었다. 보수파는 임시 교인대회를 개최하여 전격적으로 무교주제를 의결하고 나용환, 정광조, 최린 등 42인의 대표위원을 선출한 뒤 교무 전반을 일임했다. 대표위원들은 먼저 이종훈을 비롯한 혁신파에 대한 출교를 취소하고 그날로 혁신파와 일괄타결에 성공했다. 양자 모두 무교주제에 찬동하고 있었으므로 협상은 예상외로 쉽게 타결되었다. 그리고 교주제의 완전폐지와 종리사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명기한 「천도교교헌」이 반포되었다. 이어 실시된 종리사 선거에서 공교롭게도 전원 보수파가 당선되고 말았다. 대세가 보수파로 기울면서 이종훈을 비롯한 홍병기, 정계완 등 혁신파 23명이 보수파에 가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혁신파는 천도교혁신단을 결성하고 '신구분리'를 선언한 뒤 「임시약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22년 12월 별도의 단체인 천도교연합회를 창설해 천도교단을 이탈했다. 이처럼 혁신파의 원로뿐만 아니라 중도파까지 혁신의 대세를 거부하고 보수파에 가담하게 된 것은 혁신파의 사회주의적 경향 때문이었다 최동희는 1919년 6월에 러시아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고 독립운동을 위해 귀국한 혐의로 체포당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혁신파 소장그룹 역시 천도교청년회 내 급진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좌파 그룹에 직접 가담해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3.1운동으로 인한 옥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천도교 지도자들에게는 점차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혁신파가 미약한 세력기반에도 불구하고 천도교 계파의 하나로 인정받게 된 것은 1926년 12월에 발생한 고려혁명당사건 덕분이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 중국 길림에서 만주의 정의부 계열과 국내의 천도교혁신파,형평사가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선구격인 통일전선체였다. 고려혁명당이 국내외 조직의 연합.합작을 통해 지향한 것은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 연대를 모색하는 민족유일당이었다. 천도교 혁신파의 영수였던 최동희가 바로 고려혁명당의 창당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고려혁명당에 참여한 혁신파는 최동희가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정치조직인 고려혁명위원회의 간부들이었다. 고려혁명위원회는 천도교 혁신운동이 한창이던 1922년 7월에 결성된 천도교 내 지하 독립운동조직이었다. 고려혁명위원회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문 이종훈, 위원장 홍병기, 부위원장 최동희, 비서 송헌, 외교부장 최동희, 해외조직부장 이동락, 해외선전부장 김광희, 해내조직부장 이동구, 해내선전부장 김봉국, 재정부장 박봉윤 - 이처럼 고려혁명위원회는 혁신파에 가담했던 천도교단의 원로.중진.소장급 지도자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혁신파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혁명당은 고려혁명위원회의 후계조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사건이 터져 혁신파 간부 대부분이 투옥되고 최동희마저 1927년 1월 상해에서 폐병으로 사망함으로써 고려혁명당 내에서 혁신파의 위상은 완전히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종훈은 출옥 후 천도교 원로로서 혁신 운동을 지지하고 도왔지만, 최린, 이종린 등 새로이 부상한 천도교 지도자들이 보수 전선을 형성하고 자신이 출교의 치욕을 겪게 되자, 결국 그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위상을 무시할 수 없는 천도교 주류 세력은 그에게 오세창, 권동진, 나용환, 오영창, 홍병기 등과 함께 장로로 대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 원로로서의 그의 위상에는 적지 않은 손상이 갔고, 점차 비주류의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1925년의 그의 처지를 언론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천도교종법사로 계신 이종훈씨는 금년에 일흔 하나인가 됩니다. 지금 사시기는 동대문 밖 상춘원에 부속된 조그마한 집에 계신데 여생을 오직 천도교에 받치시고 늙어가는 세상과 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헤아리고 계신답니다. 아들 되시는 분은 지금 일본 동경에 가 계신데 돈도 벌고 공부도 하노라고 여간 고생이 아니랍니다. 늙고 남으신 몸을 이어가며 아들의 금의환향이나 바라신답니다만은 덧없는 세상이라 하염없이 지으시는 한숨이 끊이지를 않는답니다(『동아일보』 1925년 9월 30일 자) 동학농민운동, 갑진개화운동, 3.1운동에 헌신했던 독립 운동가 이종훈은 천도교 혁신 운동이 실패한 뒤에도 장로의 대우를 받으며 천도교 내에서 최린 주도의 신파가 득세하면서 신구파 분화가 일어나고, 구파가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에 참여한 뒤, 양자가 합동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말년을 보내고, 1931년 5월 2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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