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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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제천동중 | 등록일 | 15.09.10 | 조회수 | 151 |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이다
정홍순은 숙종 46년(1720)에 태어나 정조8년(1784)에 사망하였으며, 호조판서로 재직할 당시 재정문제에 특히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제일의 재정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의중(毅仲), 호는 호동(瓠東)이며, 영의정으로 크게 이름을 남긴 정태화(鄭太和)의 후손이다. 영조 21년(174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설서․이조정랑․지평․교리․이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호조판서로 10년간 재직하였다. 뒤에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사소한 일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였으며, 매사에 치밀한 자세를 보였다. 공직에 임하는 그의 자세를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전하고 있다. 정홍순이 예조판서로서 장헌세자의 상(喪)에 장의(葬儀)를 주관할 때의 일이다. 그는 장헌세자의 의복과 금침과 같은 세세한 것까지 모두 한 쪽 씩 떼어내어 장부와 함께 봉하여 이를 보관해 두었다. 17가 즉위하자, 정조는 자77년 정조신의 아버지의 장례가 어떻게 치루어졌는지를 알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예조판서였던 정홍순을 불러 물어보니, 그는 서리를 시켜 당시 간직해두었던 장례 물품과 장부를 임금에게 드렸다. 이것을 본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겨 그를 우의정에 제수하였다. 그는 항상 두 개의 입모(笠帽, 비가 올 때 갓위에 덮어 쓰는 물건)를 가지고 다녔는데 하나는 비에 대비하는 것이요, 하나는 남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정홍순이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을 때, 영조가 동구릉에 거동하는 것을 동대문 밖에 나가 구경한 일이 있었다. 임금의 행렬이 환궁한 뒤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각각 돌아가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정홍순의 옆에 있던 사람이 입모가 없어 탄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정홍순이 입모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내 입모 하나가 더 있으니 당신에게 빌려 주겠소.” 그리고 두 사람은 골목 어귀까지 동행했다. 골목 어귀에 이르러 정홍순은 입모를 돌려받고자 청하였다. “이제 헤어져야 할 터이니 입모를 돌려주시오.” “비가 아직 개이지 않았으니, 내일 그대의 집으로 가서 돌려주겠소.” 정홍순은 자신의 집을 자세히 일러주고 혹시 그가 전해주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사람이 사는 곳을 상세히 물었다.
“나의 집은 회동(會洞) 둘째 집이오. 이 골목에서 한 집만 지나치면 되오. 자네의 집은 어디쯤인가?” “내가 사는 곳은 남문 밖 아모 동리라고 하오.” 그러나 이튿날 그 사람이 찾아오지 않자 즉시 그 집에 가서 입모를 받아왔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 정홍순이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좌랑 하나가 새로 임명되어 뵈러왔다. 정홍순이 새로 온 좌랑을 보니 낯이 익은 것이 그 때 입모를 빌려간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대가 옛날 동구릉에서 임금이 행차하실 때 나에게 입모를 빌려갔었는데,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 사람은 정홍순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놀라고 반가워하며 말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홍순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가 입모를 돌려주지 않았으니 그 신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국가의 관리를 자처하겠는가. 즉시 사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다. 일상에서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하나가 큰일을 할 때에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큰일에서만 잘 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 하나부터 신의를 지키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함을 일깨우는 일화이다.
이러한 정홍순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정홍순이 호조판서로 재직한 10년 동안 나라의 재물은 비록 작은 물건 이라도 직접 살펴서 국고가 가득히 넘쳤다. 정승이 된 후 홍순이 자신의 집을 수리하면서 공인과 임금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이 광경을 본 정홍순의 아들이 민망히 여겨 말하였다. “아버님께서는 정승의 자리에 계시면서 천한 공인과 돈을 가지고 다투시니 체면을 잃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정홍순은 아들에게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나라의 정승은 한 나라의 의표(儀表 본보기)인데 내가 공임(工賃)을 많이 준다면 이것이 나라의 예가 되어 다음부터는 공인들이 모두 공임을 많이 받고자 할 것이니, 나로 인해 백성들이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정홍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가 나라의 큰일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경계하여, 항상 알뜰하게 처신하고 일상에서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을 허투루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규당 정성국 범조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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