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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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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박동완 선생)
작성자 최윤정 등록일 08.12.01 조회수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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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협 민족운동의 외길을 걸어간 사랑과 정의와 인도의 전도자

근곡(槿谷) 박동완(朴東完)



"살을 에이고 저미는듯하던 율렬(凓烈)하던 겨울바람도 이제는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 동칩(冬蟄)하였던 개구리 소리지르고 보금자리에 숨었던 종달새 노래부르며 중천에 높이 떠 펄펄 나른다. 아침 군생만물이 다 기뻐하는 희망의 때가 돌아온다. 인생인들 슬픔에서 기쁨에, 고통에서 쾌락에, 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까 보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박동완(朴東完,1885-1941)이 자신이 주간으로 있던《신생명》(제20호, 1925. 2)에「권두어」로 실은 새 봄을 맞는 기원이다. 일제의 억압 아래서 자유의 기쁜 때를 희망하며 독립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박동완은 삼천리 금수강산 ‘무궁화골’을 뜻하는 근곡(槿谷)이란 아호처럼 누구보다 이 땅과 이 민족을 사랑했던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기독교의 민중적 표준과 조선적 교회를 만드는 데 골몰한 민중의 목자이기도 하였다. 일본 표준시간에 맞춰 살지 않겠다며 자신의 시계바늘을 30분 늦춰 놓고 다녔다는 일화가 말해주듯, 그는 비타협 불굴의 자세로 민족구원의 외길을 걸어갔다.


◆ 기독교 입교와 31운동 참여


박동완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박형순(朴馨淳)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과 누이가 있었던 그는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 환경 속에서 다섯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열세살 무렵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한 뒤, 10대 후반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해서는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던 그는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이듬해인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이 때 그는 기독교의 세례를 받는데, 그의 개종 동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박동완이 기독교계를 배경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장로감리 연합의 기독교계 신문으로 1915년 12월 7일 창간된 《기독신보(基督申報)》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 무렵 그는 정동제일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는 한편, 조선중앙YMCA 위원 등을 역임하며 교회와 사회의 접점지대에서 활발할 활동을 펼쳤다. 그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한 중앙YMCA 간사 박희도와의 교분도 이 과정에서 맺어졌다. 뒤에 그는 법정진술에서 평소 민족의 독립을 바라고 있었고, 3월 1일의 독립선언으로 조선은 독립되었고 자주민이 되었으며, 민족자결은 그렇게 독립한 뒤에 우리가 우리나라의 정치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를 만나 그의 권유로 뒤늦게 31 만세운동에 합류한 박동완은 2월 27일 낮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추가 선정되었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계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 초고를 검토한 그는 이튿날 밤 가회동 손병희의 저택에서 열린 민족대표들의 상견례 겸 예비모임에 참석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전화를 받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11월 4일 오전 만기 출옥으로 마포 공덕리 경성감옥의 문을 나섰다.

◆ 기독교 사회운동과 신간회 활동


출옥후 박동완은 《기독신보》 주필과 조선중앙YMCA 위원 등을 맡아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때 그는 중앙YMCA 일요강화에 연사로 나서 ‘천국이 근(近)하리라’, ‘의로운 청년’ 등을 화두 삼아 민족의 독립이 가까워 왔음을 암시하며, 청년들에게 정의와 인도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산업과 교육의 장려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유성준 이갑성 김윤수 장두현 등과 함께 1923년 1월 서울에서 발족한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참여하고, 이상재가 회장으로 있는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였다.  


이렇게 출옥 후  그의 활동은 여러 방면에 걸쳐 있었는데, 주요 활동공간은 이전에 그랬듯이 교계언론 분야였다. 그는 《기독신보》의 주필로 있다가, 1923년 7월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잡지 《신생명(新生命)》을 창간하자 그 주간을 맡아 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조선적 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깨우치는 데 힘썼다. 《신생명》20호에 실은「그리스도종교와 우리의 사명」이라는 글에서, 그는 서양사람이 우리에게 전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서양문명과 서양사람 고유의 민족성을 가미한 것으로, 원래 동양에서 출발한 그리스도의 보옥같은 복음과는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사랑과 평화를 주안으로 하는 그리스도교가 서양사람들의 호전적 경향과 물질주의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혼탁해진 복음을 본래대로 순결하게 되돌릴 책임이 우리 동양인에게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본래의 그리스도 복음으로 돌아가 거기에 온전히 순복함으로써 사랑과 정의와 인도의 민족이 될 것을 주장하였다.

이같은 박동완의 언론계몽활동은 1925년 4월 《신생명》이 통권 21호를 끝으로 폐간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그는 한때 교계 일에서 손을 떼고 서울 동소문 안에 경성공업사란 회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면서 정치적인 방면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미주 동지회의 자매단체로 1925년 3월 22일 서울 사직동 신흥우의 집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그는 여기에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이갑성 등과 함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흥업구락부에 참여하면서 그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그 반경 안에 놓여졌다.

흥업구락부 계열 인사들은 먼저 기독교의 실제화를 내걸고 1925년 11월 신흥우가 총무로 있는 조선YMCA연합회에 농촌부를 신설하여 농촌사업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 박동완은 농촌부 위원으로 그 일역을 담당하였다. 1926년 2월 ① 기독교를 민중적 표준, ② 실제 생활을 간이화, ③ 산업기관의 시설, ④ 조선적 교회 등을 연구목표로 하여 중앙YMCA회관에서 기독교연구회를 발족할 때도 그는 신흥우 박희도 김활란 유각경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활동의 결정판은 뭐니뭐니 해도 신간회 운동이었다. 


1927년 1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정치경제적 각성’, ‘공고한 단결’, ‘기회주의의 일체 부인’을 3대 강령으로 하는 신간회를 발기할 때, 박동완은 흥업구락부의 이상재 유억겸 안재홍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되자 본부 상임간사를 맡아 회의 실무를 관장하였다. 불혹(不惑)의 40대 초반 나이에 그는 신간회 본부 간사로 민족협동전선의 기초를 세우고 그것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박동완이 신간회 일로 동분서주할 때, 군벌 장작림의 지배하에 있는 중국 동삼성(東三省) 거주 백만 재만동포들이 연말까지 중국 귀화수속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퇴거명령을 내리겠다는 중국관헌의 폭압으로 박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신간회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은 12월 9일 조선교육협회 회관에 모여 상설기관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창립하고 위원장에 안재홍을 선출하였다. 박동완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특파원에 선정되어 1928년 1월 이도원과 함께 만주의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재만동포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목회자로


박동완이 미주 동지회의 자매단체인 흥업구락부를 통해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은 것은 신간회 일로, 재만동포 구제사업으로 분주하던 1928년 중반 무렵이었다. 그는 미 북감리회 소속인 정동제일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전도사로 시무하기는 했지만 정식 목사 안수를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인기독교회는 1918년 이승만이 미국 감리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독립교단으로, 그 같은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미주 동지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여 1928년 8월 25일 경성역을 출발, 9월 8일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섬 와히아와(Wahiawa)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박동완은 부임 이후 1940년까지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에서 12년간 목회를 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와히아와는 오아후 섬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로, 이 곳에 한인기독교회가 설립된 것은 1918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평신도 예배모임으로 시작되어 1919년 20명의 한인들로 현재의 팜(Palm)가 끝자락에 위치한 집을 세내어 교회를 세웠는데, 주중에는 한글학교로 사용하였다. 1924년에는 길 하나 건너 레후아(Lehua)가 246번지로 교회를 옮기고, 와이알루아 교회의 최창덕 목사를 시간제로 청빙하였다. 그 뒤 첫 전임목회자로 부임한 것이 박동완이었다.

박동완은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에서 목회에 힘쓰는 한편으로,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리고 1931년에는 하와이 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귀국하여 6월부터 9월까지 석 달간 머무르며 중앙YMCA회관 등지에서 하와이 동포의 근황과 신앙생활을 알리는 강연을 하였다. 국내 흥업구락부와 미주 동지회 사이에 은밀한 소통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 박동완은 한인기독교회 일로 분주하였다. 1934년 7월에는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는데, 창간호 「편집뒤의 말」에 《신생명》이 폐간된 지 꼭 1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려고 붓대를 잡으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교차한다며 남다른 감회를 표시하였다. 또「조선감리교회 선교 50주년을 맞으면서」라는 논단을 통해서는 국내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합동하여 순전한 조선교회를 만들자는 여론이 차차 머리를 들고 나선다며 그 귀추에 주목하였다.

앞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중앙이사로 활동하였던 박동완은 1935년 1월 중앙이사국장에 취임하여 이승만 등과 함께 한인기독교회를 이끌어나갔다. 또한 동지회의 와히아와지방 대표로도 활동하였는데, 관련기록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깊게 개입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아마도 1930년 하와이 교민단(1932년 국민회로 재편)과 동지회의 충돌로 촉발된 한인사회의 분열이 하나의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1938년 8월 오랜 반목관계에 있던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으로 제28주년 국치기념대회를 거행할 때 연사로 나선 사실이 그 같은 짐작을 뒷받침해준다. 아무튼 하와이에서 박동완은 정치운동보다는 종교활동에 더 집중하였다.

  

이렇게 만리타향에서 민중의 목자로 교회 사역에 몰두하던 박동완은 1941년 초 불의의 병을 얻어 그해 2월 23일 이국 땅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리 나이로 57세 때였다. 그의 유해는 한 달 뒤 가족과 친지가 있는 국내로 돌아와 31운동 당시 고락을 함께 했던 동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현재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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