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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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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독립운동가 소개(윤희순 선생)
작성자 최윤정 등록일 08.08.30 조회수 293
 

윤희순 선생,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 쏘냐

(1860.6.25 ~ 1935.8.1)



윤희순 선생은 초기 을미의병부터 후기 정미의병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였다.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 많은 여성들, 청년들에게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워주었으며, 4편의 경고문을 지어 의병과 싸우던 관군, 의병을 밀고했던 밀고자들, 일본군에게 경고를 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항일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전력을 다했던 인물이다.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희순(尹熙順)선생은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익상은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윤희평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다. 선생은 16세가 되던 해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결혼하였다. 이후 강원도 춘천 남면 발산리에서 거주하였다. 이곳은 고흥 유씨 집안이 정착해 있던 곳이었다.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고 화서학파 제2대 종주인 성제 유중교의 종손이다. 외당 유홍석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선생의 아버지 윤익상은 외당과 함께 수학한 사이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두 집안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선생은 활발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선생은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유씨 가문에서도 많은 칭찬을 받았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조상제사, 웃어른 섬기기, 아랫사람 잘 거느리기, 손님 접대 잘하기 등이었다. 유홍석은 부인과 사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집안의 대소사는 윤희순 선생이 처리해야 했다. 어린 윤희순 선생은 이러한 역할을 철저하게 해 냈기 때문에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칭찬을 들었다.

그런 중에 국가의 형세는 날로 위태로워갔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의해 권력이 약화된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를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기로 하고 러시아에게 중재를 부탁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손잡은 이른 바 3국간섭을 통해 청이 일본에게 넘겨준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하였다. 세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었던 일본은 할 수 없이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고 말았는데 이는 조선에서 러시아의 위세를 한껏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고 러시아의 위세를 빌린 민씨는 친러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일본은 민씨를 제거하기로 하고 결행에 나섰다. 1895년 일본은 민씨를 제거했으며, 곧이어 폐위조칙이 발표되었다.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폐위를 반대한다는 토역소를 올렸다. 그리고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 중에 1896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춘천에 있던 유홍석도 춘천유림들과 함께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의병운동에 나섰다.

선생이 의병운동에 뜻을 둔 것은 이 때부터였다. 외당 유홍석이 출정하기로 결심한 후 선생에게 “의병을 하러 나갈 것이니 너는 집안 가사에 힘쓰도록 하며, 전장에 나가 소식이 없더라도 조상을 잘 모시고 자손을 잘 길러 후대에 충성된 사람이 되도록 하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당부했다.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출정하는 외당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바로 산위에 올라가 치성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이날부터 매일 삼경이 되면 목욕재계를 한 후 산위에 올라가 정화수를 떠놓고 시아버지의 무사 귀가와 춘천 의병의 전승을 기원하였다. 치성을 드린 지 열 달 만에 유홍석은 돌아왔다. 그는 며느리의 정성에 감동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홍석은 하룻밤을 묵은 뒤 다시 출정하였다.

며칠 뒤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누구든지 나와서 밥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였다. 선생은 집안의 어른들을 통해 의병운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원하여 가족들이 먹어야 할 쌀과 춘천 숯장수들이 숯을 사기 위해 갖다 놓은 곡식까지 몽땅 털어 저녁밥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군량으로 보태주기조차 했다.

선생은 그 날 저녁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이 아무리 강성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쉽게 이를 물리칠 수 있다. 여자라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며,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그러므로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줘야 한다며 만일 금수같은 일본인들에게 붙잡히면 시중을 어떻게 들 것이냐며 의병을 도와주자는 내용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생의 열성에 친척들이 먼저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차츰 반대하는 사람들도 찬성하게 되어 의병들이 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얼마 후 숯장수가 와서 쌀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집안 여성들이 힘을 합쳐 변상해 주었다. 선생의 의병운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30여명의 여성의병을 조직하다

1907년 일본이 한국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유홍석은 춘천에서 유중악, 유영석, 유제곤 등과 함께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선생은 초기 을미의병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후기 춘천의병에 참여했던 의병장의 부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들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집하였다. 이 자금으로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 등을 구입하였다. 이것으로 탄환, 유황 등을 모아 화약을 제조하여 공급하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가정리 여성 30여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였다. 여성의병은 의병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 하는 등 의병훈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직접 의병 훈련에도 참가하였다. 선생은 남장을 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지자 유홍석은 크게 낙담하여 가족과 함께 자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자 입헌선생과 아들 유재원이 적극 만류하며 요동으로 건너가 후일을 기약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래서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은 중국으로 먼저 떠났다. 선생은 가산을 정리한 다음 뒤를 따라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일본 경찰과 앞잡이들이 갑자기 들이 닥쳤다. 이들은 선생에게 유홍석의 행방을 물었다. 선생이 모른다고 하자 어린 아들 돈상을 매질했다.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 일 하시는 시아버지를 죽도록 알려줄 줄 아느냐”며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일본 경찰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초기 을미의병 때부터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의병들에게 취사와 세탁 등 후방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하면서 의병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정미의병 때에는 이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여성의병단을 조직하고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여 의병운동에서 가장 필요한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도록 ‘안사람의병가’, ‘안사람 의병노래’ 등을 지어 여성들도 구국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선생은 이러한 노래뿐 아니라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에게 “우리나라 좀 벌레 같은 놈들아, 어디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나 쫓는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 하니 내 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마라 우리 의병들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관군을 좀벌레로 취급하였다.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밀고자들에게도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인고, 너희들은 무슨 일로 그다지도 모르는가”라며 힐책했다.

청년들에게는 “우리 조선 청년들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하여 나라 찾자, 조선의기 청년들아, 빨리 나와 의병하여 보세, 아낙네들 나와 의병을 도우는 데 하물며 우리 청년들아 나라 잃고 가만히 있을 소냐, 너도 나가고 나도 나가자”라며 구국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선생은 철저하게 의리를 숭상하던 유학자의 집안에서 자라나 유학자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유교적인 여성관에 철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선생은 여성들도 적극 나서서 구국운동에 동참하여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들에게 힐책하고 청년들에게는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일본을 왜놈, 금수, 오랑캐원수 등으로 지칭하며 남의 나라를 침범해 놓고도 너무 뻔뻔스럽게 행동하고, 남의 인종 죽여가며 침략한 일본은 먼저 망할 것이며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대대로 일본을 원수로 여길 것이라며 좋은 말 할 때 빨리 떠나길 촉구하는 ‘오랑캐들아 경고한다’는 경고문을 남겼다. 선생은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다. 선생은 의병을 돕는 일도 고생스러웠지만 의병가, 경고문 등을 가사로 지어 노래 부르도록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남자들이 모르게 하느라 근심이 더 많았다고 밝혔다.

당시 선생은 밤낮없이 자신이 지은 의병가와 경고문을 불러 자녀들, 마을 청년들, 새댁들이 모두 의병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각하길 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덧 선생이 지은 가사를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노래 부르기 전략은 많은 사람들을 의병운동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으로 망명, 노학당을 설립하여 항일인재양성에 나서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일본경찰과 그 앞잡이들이 항상 추적을 하고 감시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면서 항일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피신하다 보니 생계마저도 위협받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선생은 1911년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아들 돈상, 민상, 교상 등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1935년까지 25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요동지구를 떠돌아다니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홍석의 제종제인 의병장 유인석은 1911년 유씨네 대, 소가족, 처갓집, 친척, 부하, 문인, 제자, 친구들 모두 40-50가구를 중국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 고려구로 이사시켰다. 이곳은 개발되지 않은 깊은 산속이었으므로 인가가 없었다. 의병가족들이 잠시라도 일제의 눈을 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의병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안정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외부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산골짜기로 재빨리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이 지역은 여러모로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조선인들이 이렇게 집단으로 거주하자 난천자 중국인들은 이곳을 고려구라 불렀다

선생도 의병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선생에게 맡기고 의병활동에 나섰다. 관전, 환인, 봉성 등지에서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아들과 함께 항일의병 조직에 전념하였다. 

남자들이 모두 의병운동을 하러 집을 떠나자 초막집에는 노약자, 어린 아이들, 여성들뿐이었다. 선생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산에 올라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중국인들에게도 찾아가 식량을 구걸하여 도움을 받았다. 의병가족들은 이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선생은 이웃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항일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항일운동단체에 전달하였다.

1912년 초에는 환인현 팔리전자진 취리두 남산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을 근거지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항일운동을 하기 전에 먼저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아하강물을 끌어들여 수전을 개발하였다. 중국인들에게도 이러한 수전농법을 보급시켰다. 선생은 고려구에서와 같이 이웃 마을의 조선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항일선전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이회영, 유인석의 문인인 우병렬, 우병렬의 둘째 자부인 채인산, 중국인 도원훈과 손홍령의 도움으로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을 창립하였다. 이곳에 노학당을 설립한 것은 조선인이 비교적 많이 모여 살았고 반일활동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조선인 학교설립은 1906년 10월 북간도 용정에서 이상설의 서전서숙이 시초였다. 요동지구에서는 1911년 윤세복, 윤세용 형제가 동창학교를 처음 세웠으며, 노학당은 그 두 번째에 설립된 사립학교였다. 교실, 기숙사, 운동장, 우물, 화장실 등이 갖추어진 작은 규모의 학교였다. 돌로 담벼락을 쌓고 초가로 교실과 기숙사를 지었다. 담벼락의 돌은 선생과 학생들이 아하강변과 일면성에서 가져 온 자갈과 돌들이었다.

선생이 교장직을 맡고 동창학교의 이극로와 이동하가 교사를 맡았다. 학생들에게는 국어, 수학, 역사, 지리, 체조, 창가, 작문 등을 가르쳤다. 교재는 동창학교에서 사용하는 것을 이용하였다. 학교운영자금은 선생과 학생들이 환인지역의 조선인, 중국인들에게서 모금한 것으로 충당하였다. 선생이 거주하던 취리두 남산은 학교와 25km 떨어져 있었다. 취리두는 마차나 달구지도 들어가기 힘든 산속이었으므로 매일 몇 십리 길을 걸어다니면서 학교운영에 사용할 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는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15년까지 김경도, 박종수, 이정헌, 마덕창 등을 비롯한 50여명의 항일운동가를 양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5년 일제의 간섭으로 노학당은 폐교되어 버렸다.

선생에 대해 지금도 이 지역민들은 “조선인 선생은 정말 훌륭합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그를 녀장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윤교장은 자주 우리 마을로 와서 당지 농민들과 일을 같이 하며 반일선전도 하고 모금도 하여 로학당을 운영했다고 합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힘든 항일운동을 하는 와중에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 마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비록 생계는 해결해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의지가 되었던 두 사람을 잃게 되자 선생은 너무나 비통해 했다. 선생은 자신의 일생록에서 가족을 잃은 아픔을 말과 글로 포현할 수 없을 만큼 서럽고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기구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선생은 가족을 잃고 노학당까지 폐교당한 이곳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었다. 선생이 이곳을 떠난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노력의 결과가 나타났다. 선생에 의해 양성된 청년들이 홍경현, 왕청문, 홍묘자, 영릉, 평정단, 관전현, 석두성, 왕가촌 등지에서 항일시위운동을 조직, 지휘했던 것이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연대단체인 무순 조선독립단을 조직하


1915년 선생은 막내 아들 유교상을 데리고 환인현을 떠나 무순 포가둔으로 이주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선생은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였다. 무순 교외지구인 신촌, 포가둔, 신둔 등에는 조선인들이 모여 살았다. 선생은 포가둔에 거주하면서 이 마을들을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독립단도 이곳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조선독립단은 선생의 뒷받침하에 아들 유돈상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유돈상은 만주와 몽고에 흩어져 있는 유홍석의 문인, 친지들, 항일운동가들을 찾아 다니며 180여명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동지로 모집하였다.

선생이 포가둔을 거주지로 정한 이유는 항일운동가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항일선전을 강화하여 중국인들을 각성시켜 연합투쟁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정하였다. 그래서 조선독립단도 한중연합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조선독립단은 어느 정도 정비가 되자 홍익단과 함께 일제와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다. 조선독립단은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많은 희생자만 낸 채 패배하였다. 아들 유돈상은 실의에 빠져 돌아왔다.

그러나 선생은 아들 돈상에게 지금은 실의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며 많은 항일운동가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래서 유돈상은 음성국, 음성진 형제, 중국인 장경호 등과 함께 1926년 무순 포가둔에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과 음성국은 조선독립단 학생들에게 국권회복과 항일투쟁에 대해 강의를 했다. 유돈상은 주로 군사훈련 과목을 맡아 강의했다. 김인수, 유석현, 윤병구, 신덕영, 이현인 등은 각 곳으로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병기를 사왔다. 조선독립단 학생들은 낮에는 농사일, 밤에는 무순 포가둔 북산 마을 뒷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독립단 가족부대를 만들어 부대원들과 함께 훈련에 참가하였다. 선생은 지도자가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한다면서 백발을 휘날리며 포가둔 뒷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에 참가하였다. 이 지역 주민은 “그 때 우리는 조선독립단 가족 부대를 무서워했습니다. 유씨, 음씨가 포가둔에 많이 살았었는데 그 세력이 대단했습니다. 밤중에 산에서 총소리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윤할머니는 이 따금 우리 중국 사람을 찾아와서 같이 일본놈을 쳐부수자고 선전하였습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신빈 영릉에도 조선독립단 학교 분교를 두어 항일운동가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1930년대 초에는 요녕성 동고촌 뒷산 밑으로 이주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와중에 남재구, 허영도가 와서 일본군에게 발각되었다고 알려왔다.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시장에 가고 여자들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과 앞잡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에 불을 질렀다. 모든 살림과, 서적, 사당이 불타버렸다. 이 때 선생은 유학자 집안의 며느리였으므로 사당타는 것만 걱정하고 있었다. 뒤늦게 손자와 손녀가 불속에서 우는 것을 보고 뛰어 들어가 아이들을 구해냈다.

이 사건으로 조선독립단원들은 산속에 숨어 지냈으며, 여자 가족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선생은 석방 된 후 중국인의 주선으로 작은 집을 얻어 지냈다. 얼마 후 아들 돈상과 교상이 찾아왔다. 며칠간 친지집으로 가서 지내다 아들 돈상은 조선독립단으로 가고 다른 가족들과는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복이 된 후 자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죽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선생은 “슬프고도 슬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이국만리 이내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 보이는 눈 쇠경이요 들리는 귀 막혔구나, 말하는 입 벙어리요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보이나니 까마기라, 우리조선 어디가고 왜놈들이 득실하나, 우리인군 어디가고 왜놈대장 활기치나, 우리의병 어디가고 왜놈군대 득실하니, 이내몸이 어이할고 어디간 들 반겨줄까, 어디간 들 반겨줄까”라는 ‘신세타령’이라는 가사를 지어 당시의 어려운 정황을 묘사했다. 이 가사 속에서 일본군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어 항상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고 갈 곳도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항일여성운동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은 이러한 자신의 신세만을 언제까지 한탄할 수 없었다. 현실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중국인의 집과 친척 집을 돌며 피신하다 해성현 묘관둔으로 이사했다. 다시 이곳을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아들 돈상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장인 음성국과 함께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집에 돌아오던 중 선생의 품 안에서 순국하였다. 선생도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아들 돈상이 숨진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이었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외에는 하지 마라


선생은 세상을 떠나면서 편지와 「일생록」을 남겼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후손들이 인간으로서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참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당부했다.


- 조상님 성묘도 자주 다니며 충효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 사람이 해야 할 일 외에는 하지 마라

- 시국을 좇아 오륜을 알아야 한다

- 나 위에 더 큰 분이 나를 보고 있으니 나만큼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을 해서는  안된다

- 누가 무엇을 부탁하거든 선뜻 대답을 삼가라

- 누가 무엇을 물어보거든 어림으로 대답하지 마라

-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 눈동자를 자주 보지 마라

- 앞사람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의 말이 끝날 때 하라

- 아랫사람이 인사한다고 가만히 앉아서 받지 마라

- 천민이라도 내 집을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주고 반가이 보내 주어


위 내용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알아야 하고 매사에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로서 사람을 대해야 하며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제시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만리타국에서 자신을 사랑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고 한 때는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후손들에게 당당하게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이러한 항일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 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조정하였다. 1982년에는 이상주 강원대학교 총장이 춘천군 남면 발산리 항곡에 ‘해주윤씨의적비’를 세웠으며, 1990년 춘천 여성단체 예림회에서는 춘천시 시립도서관 정원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또한 중국 요녕성 해성현 묘관둔 인민정부에서는 1994년 선생의 묘터에 ‘윤희순항일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2002년에는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의 노학당 옛터에도 이 지역 인민정부의 승인을 받아 윤희순 공적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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