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 운동가-김성숙(金星淑)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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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현도초 | 등록일 | 08.07.19 | 조회수 | 238 |
4월의 독립운동가 김성숙(金星淑)선생 (한상도/ 건국대 사학과 교수)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에서 김문환과 임천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숙(1898.3.10~1969.4.12,호:雲巖)은 밭일을 도우며, 한문과 소학교 공부를 하였다. 1916년 서간도로 망명하려다가, 양평의 용문사(龍門寺)에서 불교에 입문하고‘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월초(月初) 스님의 문하로 들어가,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근대사회과학에 눈떴다. 3·1운동 때에는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김사국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1921년 봄 출옥 후에는 조선노동공제회·조선무산자동맹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김한·조봉암 등과 교류하였다. 1. 진보적 민족주의의 길을 찾아서 1923년 초 승려 5명과 함께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民國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사회주의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한인 유학생사회에서 이름을 떨쳤다. 선생의 숙소가 한인아나키스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사실에서 시사되듯이, 선생은 의열단(義烈團) 단원 및 한인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진보적인 근대정치사상을 섭렵하였다. 1923년 10월에는 불교유학생회(佛敎留學生會)를 조직하였다. 문예부·체육부·경리부를 두었으며,‘친목·학술연구·자유·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표방하였다. 기관지『황야(荒野)』를 발행하였는데, 베이징세계어전문학교(北京世界語專門學校) 내에 사무실을 두었다. 당시 세계어전문학교는 신사조의 요람이었고, 루신(魯迅)·에로셍코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한인아나키스트들도 이곳에서 루신·에로셍고 등을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1924년 2월 불교유학생회 소속 사회주의계열의 학생들과 학생구락부(學生俱樂部)를 결성하였다. 선생은 회장이 되어, 베이징지역 한인 유학생사회 내에서 리더십을 확보해 갔다. 학생구락부는 기관지『학생구락부(學生俱樂部)』(월간)를 발행하였으며, 1925년 1월에는 고려유학생회(高麗留學生會)로 확대되었다. 같은 시기 반역사(反逆社)라는 비밀결사 활동도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장건상·장지락·양명·김용찬·김봉환·이낙구 등과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다. 창일당은 일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베이징지부 노릇을 하였다. 선생은 기관지 『혁명(革命)』발행의 실무를 맡았다. 그리고『혁명』의 지면을 통해, 한인독립운동세력의 협동전선 결성을 강조하였다. 코민테른 극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 및 중국공산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인 이대소(李大釗) 등과도 만나 한인세력의 통일 문제에 관해 토의하였다. 1924년 늦가을에는 한인유학생단체를 통일기성회(統一期成會)로 통합하였고, 1925년에는 민족주의운동단체인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와 함께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원세훈·신숙 등 민족주의 인사들과도 베이징지역 한인세력의 통일 방안을 협의하였다. 1925년 6월 중국동북지역과 베이징일대를 통치하는 장줘린정권(張作霖政權)과 일제 사이에 미쓰야협약(三矢協約)이 체결되면서,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체포 위험을 느낀 선생은 광저우(廣州)로 피신하였다. 그후 중산대학(中山大學) 법과에 입학하였고, 의열단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6년 봄에는 김원봉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 겸 교관으로 있는 손두환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교장을 면담하고, 한인들의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승낙받았다. 1926년 3월 손두환·김원봉 등이 조직한 여월한국혁명군인회(旅粤韓國革命軍人會)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봄 김원봉·장지락 등과 유월한국혁명청년회(留粤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손두환, 중앙집행위원에 김원봉과 김성숙, 조직위원에 장지락 등이 선출되었다. 6월에는 유월한국혁명동지회(留粤韓國革命同志會)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광저우 지역의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유력단체로 성장하였다. 선생은 기관지 『혁명운동(革命運動)』의 주필을 맡아 이론가이자 문장가로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선생은 유월한국혁명동지회 내부에 존재하는 파벌 간의 갈등을 타파하기 위해 장지락 등과 함께 ‘KK(독일어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 ’한인공산주의‘라는 뜻)’를 조직하여, 공산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아울러‘정치단체로의 전환’을 내걸고 의열단의 개편을 추진하여, 민족주의세력의 결집을 시도하였다. “의열단이 지난날처럼 암살과 파괴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고 정치단체로 탈바꿈해, 독립투쟁을 이끌 간부를 훈련시키자”고 주장했다. 선생은 유월한국혁명동지회 내부의 공산주의 비밀조직인‘KK’와 민족주의단체인 의열단을 매개로 하여, 사회주의운동과 민족운동의 접목을 통해, 항일독립운동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활동은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이어졌다. 1927년 봄 유월한국혁명동지회 집행위원 및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자격으로 상하이에서 장건상을 만나 ‘대독립당촉성회운동’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1927년 5월 8일‘광동 대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하였다. 이는 선생이 매진해 온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의 통합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2. 중국혁명의 광풍 속으로 그런데 1927년 4월 13일 장제스의‘반공 쿠데타’가 일어났고, 선생은 우한(武漢)으로 피신하였다. 중국 국민당정부와 중국공산당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갔고, 선생은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교도단(敎導團) 제2영(營) 제5련(連)의 책임자 임무를 맡았다. 9월 말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교도단을 이끌고 장파궤이 부대(張發奎部隊)를 따라 남하하여, 10월에 광저우로 돌아왔다. 이 때 두쥔훼이(杜君慧)를 만났고, 장지락 등과 한인운동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 이러던 중, 1927년 12월 11일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이른바 ‘광주봉기(廣州蜂起)’가 일어났다. 장발규의 제4군에 있던 한인 군관·장교 및 중산대학 학생 및 교도단에 있는 한인 등을 포함한 200여 명이 광주봉기에 참여했다. 교도단은 ‘적군(赤軍)’으로 개칭되었고, 한인들은 전투원·선전원·구호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제5련 중국공산당 조직의 책임자로서, 5련의 한인들을 인솔하여 포병련과 함께 사허(沙河)를 점령했다. 12월 12일 광저우 소비에트정부가 성립되고, 장지락 등과 함께 광주 소비에트정부 성립대회에 참석하였다. 소비에트정부 숙반위원회(肅反委員會) 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광저우 점령은‘3일 천하’로 막을 내렸고, 선생은 두쥔훼이와 함께 중산대학 학생숙사에 남아있던 한인학생들의 광저우 탈출을 도왔다. 광저우를 장악한 리지선(李濟深)군벌 군대는 한인들을‘적기당(赤旗黨)’으로 지목하고, 탄압을 강화하였다. 선생은 두쥔훼이의 집에 숨었다가, 홍콩을 경유하여 상하이로 탈출했다. 북벌전에서‘남창봉기(南昌蜂起)’를 거쳐‘광주봉기’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에 앞장섰던 한인독립운동가들은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중국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리라는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선생은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정부의 감시망에 노출되어 있었다. 상하이에 은둔하며 이론작업과 저술활동에 전념하며 때를 기다렸다. 광주봉기 이후 오성륜이나 김산이 중국공산당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것과 달리, 선생은 중국 공산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한인독립운동의 무대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29년 선생은 두쥔훼이와 결혼하였고, 원고 집필 및 번역 활동으로 생활하였다. 김산이나 오성륜 등 어려운 처지의 동지들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었다. 1930년 선생은 아내의 고향인 광저우로 옮겼다. 민국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중산대학 일본어 번역과에 초빙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연구소에서 일본어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리 오래지 않아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1930년 8월 두쥔훼이와 함께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에 가입하였다. 선생은 창작비평위원회 소속으로 루신·마오둔(茅盾) 등과 문학 창작 및 이론비평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략하였을 때, 루신·마오둔·딩링(丁玲) 등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본군의 침략과 민중학살을 비난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또『봉화(烽火)』라는 전시 특별간행물과 『반일민중(反日民衆)』 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상해사변’에서 중국군이 패배한 후, 1년간 광시성사범대학(廣西省師範大學) 교수로 생활하다가,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와 저술 및 번역에 진력하였다. 1928년이래 『일본경제사론』『통제경제론』『산업합리화』『중국학생운동』『변증법전정(全程)』등의 책을 번역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혁명이론과 정치사상은 한층 정교해졌다. 3. 이념의 족쇄를 벗어 던지고 선생이 항일민족운동 진영으로 되돌아 온 때는 1935년 무렵이었다. 일제가 중국 화북지역을 침략하였고, 중국민의 항일열기가 고조되었다. 중국공산당은‘8·1선언’을 발표하여‘항일구국’을 호소하였고, 청년·학생들의 시위운동이 격렬해졌다. 1935년 12월 12일 김성숙 부부는 중국좌익작가연맹 및 문화계 인사와 연명으로「상하이 문화계 구국운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생은 상하이 여성구국회에도 가입하여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의 혁명여정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1935년 선생은 중국공산당을 탈퇴하고, 한인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자동맹(朝鮮共産主義者同盟)을 조직하였다. 1936년에는 상하이에서 박건웅·김산 등과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으로 개편하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중국을 위한 혁명이 아닌, 조선을 위한 혁명, 곧‘민족혁명’을 지향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광주봉기 시 한인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된 사실에 대한 반성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광주봉기 시절 외쳤던‘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나‘중국혁명을 통한 한국독립’이 아니라, 곧바로 ‘한국독립’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곧 민족해방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이라야, 사회주의고 공산주의도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민족 우선’의 노선을 지향한 것이다. 민족주의 이념과 ‘반자본주의’이념을 접합하되, 전자를 지주로 삼아 후자를 접목시킨다는 논리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1월 한커우(漢口)에서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세 단체는 좌파 민족주의세력의 협동전선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였다. 선생은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의 편집을 맡았다. 선생은 1938년 10월 10일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부대로 창건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지도위원회 위원 및 정치조장에 선임되었다. 정치조는 대원들의 정치·사상교육을 담당하였다. 우한(武漢)·궤이린(桂林) 등지를 무대로 조선민족전선연맹 및 조선의용대를 지휘하며 활동하던 선생이 충칭(重慶)으로 무대를 옮긴 시기는‘1940년 봄 이전’으로 추정된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이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임정옹호세력이 집결해 있는 치장(綦江)에 왔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나서, 1939년 말 한인세력의 협동전선 결성을 모색해 왔던 한국혁명운동통일 7단체회의(韓國革命運動統一7團體會議)가 결렬되었고, 이듬해 5월 임정옹호세력이‘통합’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선생도 충칭에 왔다. 4. 임정 중심의 단결을 외치며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합류를 결심한 데에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인독립운동의 환경변화의 영향이 컸다. 1941년 1월 ‘환남사변(晥南事變)’발생으로 중국국민당의 중국공산당 탄압이 재개된 사실, 이해에 독일·이탈리아·일본의‘추축동맹체제(樞軸同盟體制)’와 미·영·소 3국의‘연합국체제(聯合國體制)’간의 대결이 전면화된 사실, 1941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단행된 조선의용대 주력의 중국공산당 항일근거지로의 이동 사실 등이 그러하다. 1941년 11월 1일자로 발표된 「조선민족해방동맹 재건 선언」이 선생의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를 공식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생은 코민테른이나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국제주의 공산당이 아닌, 우리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일차목표로 한‘조선공산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정 참여 이래, 1942년 1월 22일 선전위원에, 1월 26일에는 ‘3·1절 기념주비위원’에 선임되었다. 1943년 3월 4일에는 내무부 차장에, 4월 10일에는 선전부 선전위원에 선임되었다. 1944년 4월 24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김붕준·유림·김원봉 등과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독립운동세력이 단결하고 통일하여, 임정이 독립운동의 총영도기관 및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위상을 확보할 때, 반파시즘·반일 연합국체제의 일원이 될 수 있으며, 전후 한반도문제 처리 과정에서도 임정이 제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임정이“어느 파에도 편향함이 없이, 초연한 입장을 취하여,”정파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정·해소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주문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정의 권위와 지위도 확보될 수 있으리라는 고언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 향후 신생 독립국가로서 한국이 나아가야 국제정치의 진로와 관련하여, 국제정치 관계의 파트너로서 미국과 소련을 대등하게 평가하고 양측 모두와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선생의 정치사상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해방정국기 중간파의 정치노선에 근접하는 것이었다. 충칭 임정시기 한·중 연대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42년 10월 11일 열린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성립대회에서 이사에 선임되었고, 10월 17일에는 선전조 부주임에 선임되었다. 1945년 3월 15일에는 한국구제총회(韓國救濟總會)의 감사로 선임되었다. 한·중 연대활동에 있어서는 중산대학 출신의 학력,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 활동의 중심인물로 중국정부 요로와 맺은 인간관계, 『조선민족전선』및『조선의용대통신』간행을 매개로 축적된 중국인사들과의 知面, 사회과학과 국제정치에 정통한 지식인으로서의 교양 등이 선생의 위상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아내 두쥔훼이의 존재이다. 그녀가 “덩잉차오(鄧潁超)라고 저우언라이(周恩來) 마누라하고도 굉장히 가깝고 서로 친해요. 그렇게 되니까 이러저러 해서 궈머뤄(郭沫若)하고 서로 친하게 되고, … 그런 관계로 해서 차차 주은래하고 알게 되고, 주은래를 알게 돼서 동비우(董必武)를 알게 되고 그랬지요”라는 김성숙 본인의 회고에서도 암시되듯이, 중국인 아내의 존재는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12월 1일 상하이를 떠난 미군 수송기는 저녁 무렵 군산비행장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김성숙은 흙을 한 움큼 쥐고 냄새를 맡았다. 함께 귀국한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귀국성명서 한 장 발표하지 못하였고, 환영인파도 없었다. 같은 시기 대륙에 남겨진 아내 두쥔훼이와 세 자녀의 삶 또한 남편·아버지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역사 속의 영웅열사, 현대의 혁명전사들이 생전과 사후에 종종 좌절과 박해를 받는 일은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함께 한바탕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던 두쥔훼이의 회한이 묻어나는 편지 내용이다. 5. 자주와 혁신으로 헤쳐 간 현대정치사 1945년 12월 3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정 국무위원회 회의가 열려, 비상국민대표대회의 소집을 통해 임시의정원을 확대·개선하는 문제를 토의하였다. 그 결과 우선 좌·우 각 정당대표자를 소집하여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를 조직한 다음, 다시 비상국민대표대회를 소집키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임정 측 대표로 김성숙·조소앙·장건상·김원봉·김붕준·유림·최동오 등을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뽑았다.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임정대표 자격으로 인민공화국 측과 통일전선 구축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연말에 접어들면서,‘모스크바 3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한국사회는 찬·반의 거센 회오리에 휘말렸다. 1946년 1월 20일 임정 측은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소집하였고, 이틀 뒤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류하여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로 개편되었다. 좌·우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대동단결을 이룩한다는 당초의 표방과는 달리 우익의 결집체 성격을 띠었다. 이어서 좌익도 민주주의민족전선(民族主義民族戰線)을 결성하게 되니, 해방정국기 좌·우 정치세력 간의 대립의 막이 올랐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류함으로써 우편향이 뚜렷해지자, 선생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성주식과 함께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탈퇴하였다. 극좌·극우의 대립을 지양하고, 민족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선생의 신념은 행동에 옮겨졌다.“좌익 편향과 우익 편향을 동시에 극복하면서, 비상정치회의주비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 주비회를 통합하여, 좌·우 양측이 공동으로 통일전선을 결성하자.” “친소반미(親蘇反美) 또는 친미반소(親美反蘇) 경향을 철저히 극복하고, 친미친소(親美親蘇)의 균형정책을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2월 초 비상국민회의가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으로 성격이 변질되려 하자,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임정의 정·부주석이 민주의원에 참여한다는 것은 “정치적 위신과 대의명분으로 보더라도”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 국가와 민족의 대표자로서 국내외에서 민족과 대중을 향해 법령과 명령을 공표해 온 임정각료가 외국 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원이 된다는 것은 민족과 대중에 대한 배신이며, 임정의 깃발 아래에서 투쟁하다가 숨진 독립운동가들의 영령에 대한‘철면피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고 통박하였다. 덧붙여“만약 임정이 민주의원에 참여하려면 임정의 자진해산을 만천하에 공포하라”고 요구하였다. 결국 이날 국무위원회를 끝으로 김성숙은 장건상·김원봉·성주식 등과 임정을 떠났다. 네 사람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그는 남한 각지를 돌며 민주의원과 미군정을 비판하는 정치연설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3월 30일 체포되어, 6개월가량 전주형무소에서 지내다가, 김규식의 주선으로 석방된 이후에는 좌우합작에 힘을 기울였다. 좌우합작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김성숙은 장건상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을 사퇴함으로써, 박헌영으로 대표되는‘좌익 모험주의’와 결별했다. 김성숙의 결정은 민족통일전선운동과 좌우합작을 중시하는 ‘민주사회주의’적인 정치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47년 5월 김성숙은 여운형·장건상·박건웅과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7월 19일 여운형이 사망한 뒤에는 조직국장으로 근로인민당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근로인민당은 창당 2개월도 채 안되어 당수를 잃었고, 뒤이은 내부 갈등으로 결국 1949년 12월 해체되었다. 1947년 12월에는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결성에 합류하였고, 이듬해 4월 21에는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1950년 5월 30일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경기도 고양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성숙은 미처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 남았다. 유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의 거물인 이승엽이 사람을 보내 김성숙에게 협조를 요청하자, 즉각 피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1·4후퇴’시 부산으로 피난 온 그에게‘부역’혐의를 씌어 체포했다. 한국전쟁과 자유당정권의 독재체제 아래에서 움츠리고 있던 ‘혁신계’인사들이 정치활동을 재개하게 되는 시점은 1955년 9월의 이른바 ‘광릉 회합’이었다. 1955년 11월 김성숙은 조봉암·서상일 등과 진보당(進步黨) 창당추진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시행된‘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후보가 2백 16만 표라는 많은 지지를 얻자, 혁신계는 자못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혁신계는 진보당(조봉암, 1956년 12월)과 민주혁신당(서상일, 1957년 10월)으로 갈라섰다. 선생은 서상일·박기출·신숙·이동화·고정훈 등과 민주혁신당(民主革新黨)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5·15 선거’에서 얻은 조봉암의 득표는 장기독재를 기도하는 자유당정권을 향한 경고음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정권은 1957년 11월 16일 “전 근로인민당 조직국장 김성숙 외 9명이 근로인민당을 재건하려고 암약하다가 체포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김성숙은 ‘근로인민당 재건당 총책’의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1958년 11월 16일 대법원 판결 결과는 구속자 21명 모두‘무죄’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에는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에 참여하여 정치위원에 뽑혔다. 사회대중당은 ‘민족 주체성에 입각한 민주사회주의 실현’을 내걸고 ‘7·29 총선거’에 참여했으나, 혁신계인사는 민·참의원 모두 합쳐 8명밖에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7·29 총선’ 패배의 여파로 한동안 표류하다가, 혁신계는 1961년 1월 20일 통일사회당(統一社會黨) 창당으로 가닥을 잡았다. 통일사회당에서 선생은‘혁신계의 원로’대접을 받았다. 또 1961년 2월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연맹(民族自主統一聯盟) 중앙협의회 의장단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통일사회당은 “민족적 주체성에 입각한 민주사회주의를 실현할 역사적 임무를 지닌 국민대중정당”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4개월 후 5·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남으로써, 혁신계 인사들은 또한번 시련에 봉착하였다. 모든 정당은 해체되었고, 정치활동은 금지되었다. 5월 18일부터 혁신계 인사들 대부분이 구속되었고, 김성숙도 예외는 아니었다. 9개월가량 감옥생활을 한 다음, 석방된 선생은 1964년 ‘선명야당’의 기치를 든 신한당(新韓黨)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보수정치세력에 합류하였다. 이후 그는 신한당 정무위원을 거쳐, 재야 통합야당인 신민당(新民黨)의 운영위원·지도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선생의 나이는 어느새 70을 넘고 있었고, 남은 건 병고와 가난 뿐이었다. 혁신계 인사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김성숙도 돈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유가족의 말대로 ‘됫박질’을 해야 하였고, 셋집을 옮겨 다녔다. 세상을 뜨기 3년 전에야, 같은 혁신계 인사인 구익균의 집마당 한 모퉁이에 건평 11평의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셋방살이에 허덕이는 선생을 위해 동지·후배들이‘비나 피하도록’마련해 준 것이었다. 문 위엔‘피우정(避雨亭)’이라는 목각 현판이 걸려 있었다. 기관지염으로 앓아 누웠으나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고, 약값 마련도 어려운 가난에 묻혀, 1969년 4월 12일 오전 10시 눈을 감았다. 선생의 유해는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른 후, 파주군 묘소에 묻혔다가, 그 후 2004년도에 국립현충원 임정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친지들이“그토록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렇게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약도 제대로 못쓴 채 돌아가셔야 되겠느냐”고 푸념하면,“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 아니야”라고 나무라곤 했다는 선생에게 주어진 것은‘혁신계 인사’라 하여 주목과 감시의 눈길뿐이었다. 늦었지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때가 1982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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