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호 청렴-영동 소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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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황간중 | 등록일 | 18.12.03 | 조회수 | 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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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목사 유의에게 배우는 청렴 영조 10년(1734년)에 태어나 영조 45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정조2년(1778년)에 정언,지평 등을 거쳐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그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찢어진 갓과 성근 도포에 찌든 색깔의 띠를 두르고 조랑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이부자리는 남루하고 요나 베개도 없었다 하니 저절로 위엄이 서고 형벌을 내리지 않아도 고을이 다스려졌다고 한다. 또한, 홍주목사로 있을 때 금정에 와 있던 다산 정약용이 편지를 올려 공무와 관련된 일을 의논하려 했다. 그런데 편지가 도착했을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후에 홍주에 가게된 정약용이 유의에게 “어찌하여 답장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까?”라고 물었는데 “나는 홍주의 목사로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편지를 뜯어 본적이 없네”라고 답하면서 하나도 개봉되지 않은 많은 편지들을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가져오게 하였는데 모두 조정의 관리들이 보낸 편지였다. 유의는 내게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겠소, 대부분 가깝게 지내는 이지방 토족들을 잘 봐 달라고 내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약용이 “이러한 편지야 물론 뜯어보지 않는다지만 저의 편지는 공무와 관계된 것인데 어찌 뜯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공문을 보내면 될 것이지, 왜 사사로이 편지로 보낸단 말이오” “그 일이 비밀에 속한 것이기에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한 것입니다.” 그러자 유의가 정약용을 나무라면서,“그렇다면 비밀히 공문으로 보내면 될 것이 아닌가?” 정약용은 할 말이 없었다. 다산 정약용은 유의의 됨됨이에 반해 「목민심서」에 청빈한 목민관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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