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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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한일중 | 등록일 | 09.12.03 | 조회수 | 670 |
독 후 감 2308 김현준 책제목: 이순신 글쓴이 : 김영만 출판사 : 태서출판사 내가 읽은 책의 제목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이순신이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기에 옛날 초등학교때에는 책제목이 이순신인 각각다른 책들을 4~5권 정도 보았었다. 이제는 중학생이 되어 이책을 다시읽게 되니 조금은 새롭고 내용이 더 인상깊게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들었다. 예전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에는 매주 주말마다 KBS에서 볼수있는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지금 중학생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그 긴 내용들이 이 작은 책 한권에 실려있다는게 조금은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고 섭섭하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재미를 위한 드라마보다는 책이더 정확할거라고 믿고 읽었다. 이순신은 조선시대 1545년 4월 22일에 지금의 서울인 남산아랫마을인 인형동 (당시 건청동)에서 이정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려서부터 나무로 만든 검으로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즐겼다고한다. 어렸을때부터 대장노릇을 맡았다고하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동네에 살았다면 아마 이순신의 부하 역할을 했었을것같은데.. 이순신은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으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그곳에서 이순신은 무예를 닦으면서도 글공부와 병서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어린나이에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할수있을까? 모든면에서 최선을 다하는 면에서 닮았으면하다. 그당시 문관이 되려면 과거시험에 합격해야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하였다. 1572년 이순신은 28살이 되던해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모든게 순조롭게 이어지던중 갑자기 말이 넘어지더니 이순신이 말에서 떨어지고 왼쪽 발목을 부상당했다. 그때 이순신은 주저하지않고 아픔을 참으며 다시말에 올라타고 끝까지 시험을 보았다. 내가 마치 저런 상황이였다면 과연 시험을 계속 봤을까? 아마 나는 그때 그시험을 그냥 포기했을것이다. 4년이 지나고 이순신은 다시 시험에 응시하여 완벽하게 합격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함경북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되었다. 또 4년뒤 계급이 올라 훈련원 봉사로 진급되었다. 1580년에는 드디어 수군생활을 시작하였다. 바로 전라도 좌수영에 발포 만호가 된것이다. 이순신은 군비를 단단히하고 방비를 엄격히 하였다. 1582년이 되던해에는 서익이라는 사람이 조정에 거짓보고서를 올리는 바람에 이순신을 모함하여 이순신은 억울하게 관직을 박탈당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힘들게 올라온 자리인데 괜히 억울한 모함을 당하여서 관직을 박탈당했다면 내 기분은 어땠을까? 마치 모든 것을 다 잃은 기분일것같다. 하지만 이순신은 굴복하지않고 다시 또 42세에 함경도조산의 만호로 임명되었다. 그곳은 북쪽의 오랑캐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유명한곳이였다. 녹둔도에서 이순신은 작은 병사로 오랑태와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고 참패하고말았다. 하지만 이순신이 참패한 이유는 이순신이 군사를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일이라는 사람이 그부탁을 거절하여 생긴일이다. 그런데 이일은 조정에 거짓정보를 보내어 결국 이순신은 다시또 억울하게 백의 종군이라는 죄를 받게 되었다. 백의종군이란 졸개의 몸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면 다시벼슬을 얻는 것이다. 이순신은 그해 겨울 두만강 건너에서 공을세워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났다. 참 대단하기도 하지 하두 억울해서 잠도 못 이루웠을텐데 정말 다시한번 감탄하게 된다. 1589년 12월 45세가 된 이순신은 전라도 정읍현감으로 임명되었다. 2년 후에는 다시 승진되어서 전라좌수영의 수사로 승진되었다. 그때가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였다. 이를 이순신이 모르겠나? 이순신은 왜적이 쳐들어 올것을 대비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전함도 만들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왜적에 대응하기위한 거북선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시대에 어느 누가 이런 철갑선을 만들생각을 하였겠나? 역시 이순신은 대대단하다. 이 거북선이 우리나라를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1592년 4월 13일 드디어 대마도에서 훈련을 마친 왜군 선봉대가 병선 7백여 척을 타고 부산포로 침입해왔다. 이틑날 부산으로 상륙하였다. 부산에 있던 군사들과 장수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내가 지금 이렇게 편한 시대에 태어난것을 감사하게 여겨야겠다. 부산성은 금방 함락되고 다음날 동래성도 마찬가지로 함락되었다. 4월 18일은 2만명의 병력이 상륙하고 1만명이 연합하여 김해로 나아갔다. 이번 임진왜란에 통원된 왜군들은 모두 20만명이다. 동래, 양산, 청도, 대구, 인동, 선산, 상주, 조령, 충주, 여주, 양근, 옹진나루가 차례대로 무너졌다. 왼쪽공격경로로 들어선 제2군은 언양, 경주, 영천, 신녕, 군위, 조령, 충주, 죽사, 용인을 거쳐 한강으로 들이닥치고 오른쪽길로 들어선 제3군은 성주, 목계, 지례, 동산, 추풍령, 영동, 청주를거쳐 서울로 달려온다. 이렇게 왜군들은 단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한편 승전소식이 없던도중 이순신은 옥포에서 왜적과 싸워 첫승리를 이뤄냈다. 다음의 승전지는 당포이다. 옥포에서는 거북선없이 승리하였지만 당포에서는 거북선을 동원하여 조선의 필살무기와 다름없는 거북선으로 이순신이 크게승리하였다. 당포에서 싸울때 우리의 거북선이 돌격하는 모습을 본 왜적들의 심리는 어땠을까? 아마도 정말 무서웠을것이다. 다음 한산도에서는 이순신의 기발한 작전이 활약한다. 바로 학인진법이라는 작전인데 학인진접이란 이순신의 함대를 마치 학이 날개를 펴는 모습처럼 왜군들의 배를 둘러싸서 포위하는것이다. 우선 2대의 배가 왜적들을 유인한다음에 넓은 한산도에서 학인진접을 쓴다. 결과는 역시 승리이다. 그것도 임진왜란중 3대 대첩으로 손꼽힐정도의 큰승리말이다. 전쟁중에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할수있었다니.. 정말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이렇게 힘든 전쟁속에서도 이순신은 꼬박꼬박 일기를 쓴다. 이 일기를 읽어보면 전쟁속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잃지않는 이순신의 모습을 볼수있다. 정유년인 1597년 재침략, 즉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이때 마지막으로 이순신이 모함을 당하여 백의종군을 해야한다. 이순신을 질투하던 부하장군 원균이 조정에 거짓보고를 올리는바람에 이순신은 권율밑에서 2번째 백의종군이라는 죄갚을 치루여야했다. 이때 이순신을 달래줄사람이 있을까? 만약있다면 뭐라고 해야할까? 결국에는 이순신의 자리를 가로챈 원균은 어리석게 왜군과 싸우다가 그동안 이순신과 이순신의 군사들이 피땀흘려만든 200척을 잃고 많은 군사들의 목숨을 잃고만다.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그 자리에 올리게된다. 남은 선함은 12척.. 12척가지고 뭘하라는 것인지 하늘이 이렇게 무심할 수가.. 라는 생각들을 했을것같다. 하지만 이런 각박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에게는 포기란 없었다. 또다시 작전을 짠다. 물살이 깊은 곳에 쇠를 묶어놓고 함정을 만들어 전투하는것이다. 적군의 함대는 1백 33척 사실 12척 가지고는 상상도 못할일이다. 하지만 이작전으로 이순신은 명량에서 크게승리하여 적군의 함대중 절반을 부시는 성과를 이뤄냈다. 우리는 이전쟁을 명량대첩이라고 한다. 다시한번 이순신장군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명나라가 조선쪽에 함류 노량엔 왜군의 함대 3백여척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총탄에 맞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사실 이순신은 자기가 이전쟁을 끝내고 살아돌아오게 되면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 까지 피해를 입는다는것을 알기에 일부로 총탄을 맞고 전사 하였다고한다. 나라를 위하여 한몸바친 위대한 위인 이순신 이런 훌륭한 분이 계셨기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나는 우리 조상들게 한치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겠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장군님께 감사하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이순신장군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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