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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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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사리 저금통
작성자 이차희 등록일 12.06.05 조회수 237

고사리 저금통

  1990년 4월 프랑스 샤클레 연구소 수석연구부장이었던 노만규 박사가 귀국했다. 서울대 교환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고국 땅을 밟은 것이었다. 그를 세계적인 과학자로 이끈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의 저금통이었다.

  1950년대, 전쟁 끝의 가난과 절망을 뒤로하고 노만규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마음속엔 가난한 나라를 일으키려는 굳은 결심이 서 있었다. 열심히 공부한 뒤에 하버드 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에 이르렀으나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장학생이긴 했으나 입학금 23만원이 있어야 입학이 가능했던 것이다.

  단돈 만원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데다 돈을 꿀 만한 곳도 없었고, 고국의 가난한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부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입학금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할 수도 있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1959년 11월 16일자 민주일보에 그의 딱한 사정이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두 가난했던 시절이라 많은 사람들은 끌끌 혀만 찰 뿐이었다.

  어느 날 고국으로부터 얼마의 돈이 전해져 왔다. 초등학교 1학년 꼬마가 보내온 것으로 군것질을 참아가며 모은 저금통을 몽땅 턴 것이었다. 그는 솟구쳐오는 뜨거운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성금은 오로지 공부와 연구를 계속할 것을 바라는 것이었다. 그 뒤 그는 꼬마의 소망을 가슴에 심고 열심히 공부에만 전념했다.

  30년이 흐른 지난 1990년,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어 고국을 다시 찾은 노만규 박사는 그해 11월, 어느 신문사의 주선으로 꼬마 은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꼬마는 어느새 머리가 벗겨진 중년이 되어 있었다.

  “큰 일 한 것도 아닌 데 이러지 마십시오.”

  중년 남자는 박사가 눈물을 흘리자 머쓱해 하며 겸손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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