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자 : 전남순 생년월일 : 1937년 3월 15일
주 소 : 충북 청원군 오창읍 각리 189-1
각리초등학교
- [설립경위]
- 일제 식민지하인 1919년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각골, 까치말, 건지산, 구룡리, 양청리, 시재동, 신평리, 우등재, 궁전리, 중신리, 뱀내 마을 사람의 문맹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독교 가족인 개화에 신(新) 학문을 접하면서 고(故) 장로 전성찬(全聖瓚, 112세), 아우 전교찬(全敎瓚,), 전경찬(全敬瓚), 전병찬(全秉瓚) 사형제가 구국정신의 뜻에 따라 집 옆에 청원군 오창면 각리 130번지에 소화 4년 서기 1929년 4월 19일 공회당과 사택 1동 각리서당을 설립하고 아동 30명으로 청주에서 유만근, 감기례 선생님을 초청하여 한글, 한문, 산수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일제하에 일본어를 가르치도록 억압하여 이를 극복해 가며, 야학에 힘입어 아동들이 점차 증가하여 주야로 가르치고 있었으며 소화 8년 서기 1933년 4월 5일 청원군 오창면 각리 산 48-4번지(구 각리 234번지) 부지 3584㎡(1084평)에 교무실, 교실 4실 신축교사로 이전하고, 6년제로 사립 각리학교를 개설 허가를 받아 아동 200명을 모집하여 그 해 개교 교장 전교찬, 교사 유만근, 김기례, 박덕봉, 남순석, 전병찬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치고 사명감을 다 하였다.
- 그리고 아동의 월사금(수업료)은 여름에 보리, 가을에 벼로 받아서 선생님의 식량과 월급을 지급하였으며 전후 10년간 아동들을 배출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여 경향 각지에서 맹활약하고 있었다.
- 일본이 착취가 매우 심했던 소화 14년 서기 1939년부터 해방 될때까지이다. 일본 관헌들이 전교찬, 병찬 형제를 오창지서, 청주경찰서로 끌고가서 무단정치를 펴서 억압하고 강제하여 견디다 못해서 만주로 도피하여 해방 후 돌아왔다. 소화 17년 서기 1942년 3월 19일 각리학교를 강제로 착취하여 일본이 소화 13년 서기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칙령 103호)을 발표하여 종래의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개편하였다. 이에 소학교는 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소화 17년 서기 1942년 6월 27일 오창공립국민학교 부설 간이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942년 8월 21일 전 각리학교 교사(校舍)에서 개교식을 가지게 되었다.
- 강상원 선생님이 오창공립국민학교에서 각리 간이학교 (角里 簡易學校)로 초대 부임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6.25사변까지 학제가 자주 변경되었다. 일제하 1943년 3월(조선 교육령이 4차로 공포되어) 국민학교 수업연한이 6년제로 개편되었고 교명을 각리공립국민학교로 하였다.
- 1944년 3월 9일 각리공립국민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1학년 38명을 모집하여 그해 4월 1일 각리 간이학교(전 각리학교)에서 개교 하였으나 학교에 오고자 하는 아동이 수가 많아 1944년 5월 16일 2부 학급 1학년 64명을 더 모집하여 2학급으로 편성하였다.
- 해방 이후에 기성회 회장 윤태수님에 의하면 학생수가 1200명 되어 오전,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교실이 부족하여 청원군 오창면 각리 28-3번지에 본교 교사(校舍)를 신축, 이전하고 1948년 5월 구교사(校舍) 전 각리학교 교사(校舍) 재목을 뜯어다 4교실 및 교장 사택 1동을 증축 준공하였다고 증언하며, 이 학생들은 1950년 5월 5일 제1회 졸업식(48명)을 갖게 되었다.
- 따라서 학교 설립자 고(故) 장로 전성찬, 전교찬, 전경찬, 전병찬 8개 마을 주민들에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많은 영재를 배출하여 지역사회,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 해 온 민족의 배움의 전당 각리초등학교에 공헌이 인정되어 각리초등학교의 연혁에 최초에 포함됨이 마땅함으로 명예가 회복되도록 청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