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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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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
작성자 황덕진 등록일 09.05.04 조회수 141

2009년 3월의 독립운동가 홍병기 선생

(1869. 11. 5 ~ 1949. 1. 26)

 

홍병기(洪秉箕)선생은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출생하였다. 24세인 1892년 동학에 입교하여 인암(仁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손병희의 휘하로 들어가 그를 따라서 무장(현재 고창군 무장면) . 영동 용산 . 보은 종곡 . 음성 .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도 손병희의 측근으로 동학 포교에 적극 참여하여, 1904년 진보회(進步會) 운동이 전개되는데 기여하였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명한 이래 3.1독립운동 직전까지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천도교의 정책노선을 결정하는 요직을 역임하였다. 1918년 말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기사를 본 선생은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 원칙에 의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 천도교의 동지들이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1919년 1월과 2월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을 실행할 것과 이를 위하여 동지를 모을 것을 제의하였다. 2월 25일, 권동진이 민족대표로서 선생도 참가하게 되었다고 하자 선생은 즉시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 ․ 날인하였다. 다음날 저녁 천도교와 기독교 ․ 불교계의 인사와 회합하여 거사 장소를 탑골(파고다)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직후 일본 관헌에 붙잡혔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4일 15인의 민족대표와 함께 출소한 후, 1922년 7월 14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조직의 국내활동이 어려워지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4년 4월 5일 천도교최고비상혁명위원회를 재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과 소련의 밀약에 의해 소련이 독립운동가들을 소련 땅에서 추방하여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에 가입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만주에 본부를 둔 고려혁명당은 상하이에 외교근거지를 마련하고,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의 원조를 얻어 독립을 이루려 하였다. 이를 위해 각 파를 망라하여 무장투쟁과 자치조직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1926년 12월 28일 이동락(李東洛)을 시작으로 다수의 지도층이 붙잡혀 조직이 와해되었다. 선생도 이듬해 1월 19일 신의주에서 붙잡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9년 1월 26일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오후 8시 15분 81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홍병기 선생 공적내용

ㅇ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

ㅇ 1920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간 옥고

ㅇ 1927년 중국 길림 ‘고려혁명당’ 활동으로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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