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장군은 우리고장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상 참으로 찬연한 빛을 남긴 영웅 이다. 따라서 그 업적이나 일화를 열거하려면 한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거두절미하고 일화 몇가지를 줄거리만 소개하고자 한다.
< 어릴때의 일화 >
인조때의 이야기이다. 대림산 밑 노루목으로 가는 도중 층암절벽 위에 달암사라는 절이 있었었다. 임장군은 어릴때 이 절을 중심으로 놀기도 하고 공부도 했다고 한 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른을 능가하는 지혜와 재량을 가졌었다. 마을 아이들과 군사놀이를 했는데 아이들이 잘 안나오면 군기가 문란하다는 이유로 엄벌을 적용시 키므로써 그후부터 군사놀이에만은 이탈자가 하나도 없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하루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군사놀이를 하는데 군기를 날리며 돌로 성을 쌓고 대 전을 하는 도중 경주에 도임하는「윤진」이란 신임목사가 지나가다가 길을 막아 놓 았으므로 길을 피하라고 호령을 했다. 임소년은 사람이 성을 파하는 법이지 성이 사람을 피하는 도리가 있느냐며 옛날의 이름난 성인 이야기까지 인용을 하매 윤목 사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짐작하고 길을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한때는 학업에 뜻을 두고 독서에 열중한 일도 있었다. 아홉살때 어느 책을 보다가 「글씨는 자기성명을 쓸 수 있으면 충분하고 학술이란 만인의 적을 다루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라는 문구를 읽고 참다운 대장부의 갈 길이라고 탄복하고 그때 부터 학문보다도 무예 연마에 전력하다가 나이 15세가 되었을 때에는 집을 떠나 단 월 절에 가서 3년, 보은 속리산(경업대가 있음)에서 2년, 이렇게 만 5년동안을 산 속에서 무술 연마에 힘쓰더니 자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가사를 돌보다가 광해 무오년에 무과에 급제 되기도 하였다.
< 등과 후의 이야기 >
임장군은 25세때 무과에 급제하고 27세때에는 이미 평안도 철산에서 보직을 받고 국토수호에 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우연하게 용천이란 못에서 큰 뱀이 칼 한자루를 물고 나와서 임장군 앞에 놓고 간 일이 있었다. 임장군은 그 칼을 용 천검이라고 명명하고 그 칼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써가지고 전투할때 사용을 해 왔 었다.「삼척용천 만권서, 황천생아 의사여 산동재상 산서장피장부혜 아장부혜」그 러나 그때의 그 용천검은 일본사람들이 훔쳐가서 없어지고 현재 충렬사 유물관에 있는 칼에 추련검이라고 하는 호신용 칼로서 약 3척밖에 안되는 단검인데 이 칼에 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놓고 있다.「시호시래 비재래일생일사 도재연 평생장부 보 국심 산척주련마십년」임장군은 신이 돕던 명장으로 이괄의 난을 비롯하여 정유재 란 병자호란 등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명나라에 가서 공유덕의 난을 우가장이라 는 곳에서 토벌한 후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재침할 것을 미리 알아 차리고 조정에다 그 정보를 소상하게 올려 북방을 해야한다고 누차 전략을 호소했으나 김자점으로 말미암아 좌절 당하고 말았다. 특기해야 할 일은 임장군이 명나라 원수 이자성을 격퇴하고 개가를 올렸을때 임장 군에 봉하기를 산서후란 지역을 주어 국왕으로 삼겠다고 했다는 일이다. 그때 임장군으로서는 산서후보다는 만주지방을 얻는 것이 옛날의 우리 강토를 도로 찾는 셈이 됨으로 이왕 주려거던 만주를 달라고 요청을 하므로써 왕이 쾌히 수락하 고 다음과 같이 수적서를 내리고 만주 전역을 임장군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수척 임경업지인 천덕 십일년 칠월 임신 건립오일」이 수적상자를 부하인 최일성 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다가 김자점의 화를 당하기 직전에 평안북도 비현땅 어느 농가의 밭가운데다 파묻었던 것을 후일 발각되어 파내므로 원문은 일본인이 가져가 고 사문은 그의 후손인 임장식씨가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임장군이 하도 기 뻐서 희색이 만연하여 고국을 향해 오고 있을때 김자점은 미리 사자인 금부도사를 시켜 길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포박을 해서 서울로 압송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임장군의 애국충절은 천추의 한을 안고 김자점 손에 의해 최후를 마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억울하게 죽어간 임장군의 공적이 후세에 와서 인정되자 숙종 23년(1697)에 왕명으로 충주에 충렬사를 건립하고 영조 3년(1727)부터는 춘추로 향 제를 올려오던차 1977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충청북도 연두순시를 할 때 충렬사를 성역화 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3억 4천만원의 하사금과 지방비를 투입 정화공사를 마치므로 임장군의 공적을 기리게 된 것이다.
< 임장군의 부인 완산이씨 >
인조 16년 임장군이 50세때 3월에 명나라로 갈것을 결의할때 이미 임장군의 처인 이씨부인 청나라로 붙들려가서 끝가지 항거했는데 말하기를「이 오랑캐 새끼들아 나의 남편 임경업은 병자호란에 굴복한 우리나라의 원수인 너희놈들의 원수를 갚는 동시에 임진왜란때에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대절을 지키 고 있는 천하 충신이거늘 내어찌 그러한 충신의 처로서 오랑캐땅에서 욕을 본다면 참을 수 있겠느냐」하면서 큰 소리를 치더니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어 자결을 하므 로써 조선여인들의 부도를 빛나게 하고 최후의 피를 오랑캐 앞에다 흘린 것이다 지금 충렬사 경내에 완산이씨 정렬비각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 오추마(烏騶馬) >
임장군에게는 희비고락을 같이하던 말이 있었는데 숙종때 임장군이 죽은줄 알게된 말(오추마)은 양주땅 어느 농가에서 먹지도 않고 굶더니 끝내 자살행위를 하므로써 주인의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 신앙의 대상 >
임장군은 부장인 이완과 누차의 해전에서도 큰 공을 세운바 있었다. 이때 임장군의 명성이 천하에 떨쳤기 때문에 지금도 연평도 부근에 가면 임장군을 신장으로 여기 고 이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학질이 걸린 사람에게 등에다「임경업」이라 고 써 놓고 동제를 지내는 곳도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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