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이 가야고 음악을 배우러 온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의 재능을 헤아려 각자의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 가야고를, 법지에게 노래를, 그리고 만덕에게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사실은 6세기경 가야고 음악의 성격에 관한 이해에 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지도적 위치에 있었을 악사는 악기, 노래, 춤 세 가지를 종합예술로 통달해야만 했다고 보인다. 더 나아가 6세기경 만 해도 가야고 음악예술은 악기, 노래, 춤으로 독립된 예술장르로 있었다기 보다도 종합적 무대예술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법지에게 가르쳐주었다는 노래나 만덕에게 가르쳐준 춤이 어떤 종류의 가무였는지는 불분명하나, 그러한 노래와 춤이 가야고라는 악기와 관련된 종합공연예술의 한 형태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악기, 노래, 춤의 종합공연예술의 형태는 다음에 논의될 신라 초기의 각 지방의 향토음악에서 확인되는 바로써 예술적으로 덜 분화, 발전된 단계의 것으로 해석되는 음악문화이다. |
우륵이 가실왕의 명령을 받고 창작했다는 열 두 악곡의 이름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伎),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이다. 이 열두 곡명 중에서 아홉 곡명이 가야국 당시 낙동강 주변에 자리잡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지방의 이름으로 밝혀졌다. 하가라도는 경남 함안지방의 이름으로, 상가라도는 경북 고령지방의 이름으로, 달기는 경북 예천군의 다인(多仁)지방의 이름으로, 사물은 경남 사천지방의 이름으로, 물혜는 경남 함안군 이안(利安)지방의 이름으로, 하기물과 상기물은 경북 금릉군 개령(開寧)지방의 이름으로, 거열은 경남 거창지방의 이름으로, 사팔혜는 경남 합천군 초계(草溪)지방의 이름으로 각각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우륵의 가야고를 위한 악곡들이 가야국 당시 여러 지방의 민요를 비롯한 향토색 짙은 음악들을 가야고를 위한 기악곡으로 편곡했든지, 아니면 성악곡을 위한 가야고 반주음악으로 개작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은 어느 지방의 이름을 악곡명으로 사용하는 관례는 비교적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륵이 그 당시 가야국의 향토색이 강한 지방음악을 다양하게 취하여 가야고를 위한 악곡으로 지은 것도 가실왕의 지시에 따른 결과일 수도 있다. '지방마다 방언이 있는데 음악을 획일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는 가실왕의 음악관이 우륵의 열두 가야금곡에 잘 반영됐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가야국의 향토적 색채를 담았을 우륵의 아홉 곡이 음악적으로 어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번거롭고 음란했다는 말로 미루어보건대, 빠르고 복잡한 가락으로 이루어지고 한편 감정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낸 악곡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번거롭고 음란했던 우륵의 가야고 음악이 6세기경 신라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만덕, 법지, 계고 세 사람이 우륵에게 배운 가야고 음악을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도 즐겁게 해주는 아정(雅 正)한 음악으로 개작했다는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신라사람에 의해서 자기 사회풍토에 알맞게 개작됐다는 것은 우륵의 가야고 음악에 나타난 가야국의 향토적 특색을 덜어내고 좀 더 예술적으로 다듬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륵의 가야고 음악이 그런 개작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라왕과 귀족사회에서 대악(大樂)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용과정을 거쳐서 가야고가 6세기 중반부터 신라땅에 뿌리를 내리게 됐고, 후에 신라음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