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신라, 고려 등을 통틀어 명필가 넷을 신품사현으로 꼽는데 김생을 제일로 쳤으며 원의 조맹도도 창림사 비발문에서 신라승 김생이 쓴 이 비문이 당인의 명각보다도 뛰어나다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성현의 용제총화에서 모두 김생을 제일로 치고 원교 이광수는 "필쾌"에서 동국 필법은 신라 김생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드디어 홍양호는 김생이 동방서가의 시조라고까지 일컫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한결 같이 김생이 중국의 서성 왕희지 필체의 신수를 얻어 오히려 그를 능가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김생의 진짜 필적으로 알려진 백율사의 석동기와 고려 초에 승단목이 김생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의 글씨를 보면 극도의 귀족적 세련미가 위축되어 유려전아(流麗典雅) 하기 만한 왕희지체보다 한결 더 골기가 승하여 청경탈속한 일취가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고유미감이 가미로부터 이루어진 고유의 색이라 할 것인바 과연 김생은 동방의 서가의 시조로 보아 손색없는 명필가라 하겠다.
동국여지승람 충주사 김생사지에 김생이 두타행을 닦으며 이 절에서 살았으므로 그로 인해 이름을 삼았다고 하였으니 김생사가 김생이 기거하던 절이었음은 틀림없겠는데 안동문필산은 김생이 글씨를 배우던 곳이라는 각주가 붙어있어 김생이 경주에 가까운 안동에 가서 글씨를 배우고 이로 이름을 얻은 후에 고향인 이곳 충주로 와서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절이 김생사였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문화공보부는 선현추모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김생사지에 김생의 유필을 집자보존 하려는 뜻을 세우고 충북으로 하여금 그를 집행케 하니 이로 말미암은 기념집자비가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인연 필생의 도리가 천백세후에 때를 만나 성취케 되니 가히 성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