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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전기
작성자 용산초 등록일 07.04.16 조회수 84

때는 신라 경덕왕 10년이다.
서기 711년에 탄생하여 791년(원성왕7년)에 향년 88수(壽)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릴 때부터 글씨를 쓰기 시작하여 다른 예도(藝道)에는 일체의 관심이 없었고 80평생을 오로지 붓만을 잡아 천하 명필의 유작을 남겼다.
언제 어느 때 눈을 감을지 모르는 노경(老境)에서도 다른 일에는 기진맥진하다가도 붓을 잡으면 어디서 힘이 나는지 쉴 줄을 모르고 태연히 글을 썼었던 공은 진서(眞書)와 예서(隸書), 행서(行書)와 초서(草書)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지금도 왕왕 그 필적(금석문;金石文)이 있어서 학자들은 보배로 간직하여 전한다고 한다.

고려 학사(學士) 홍권(洪權)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그 나라 한림시초(翰林侍招)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글씨를 보였더니 두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 글씨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가 아니냐? (김생의 글씨를 보자 자기 나라의 명필인 왕희지의 글씨로 착각하고) 이 귀한 명필의 보물을 오늘 여기서 대할 줄이야 하며 감탄하는 것을 보고 학사는 어이가 없어 하다가 사실을 알렸다.

이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가 아니고 우리나라 신라 사람인 명필 김생의 글씨다 라고 말했으나 두 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천하의 왕희지를 제외하고 이 같은 명필이 어디 있을 수 있느냐고 하였다.

김생 글씨를 한번 보고 크게 놀라며 돌아간 그들은 동방의 서성(書聖)이라 하고 그 소감을 그 나라 조정에 나아가 이야기하자 그 소문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퍼뜨려졌다. 그 이후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올 적 마다 김생의 필적을 구하여 보배처럼 소중히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글씨 공부하는 이는 많으나 김생의 글씨를 본받아 쓰는 이는 적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사 홍권은 김생의 필법을 본받아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남겼다.
미수기언(眉首記言)에 "그는 나뭇가지로 땅을 긁으며 운필법을 익혔지만 신묘한 경지에 도달했다" 고 하고, 과재집(果齎集)에는 "김생이 토굴 속에서 나뭇잎에 마구 글씨를 썼기 때문 에 낙엽과 시냇물이 새까맣게 변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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