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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청렴이야기 3-박수량
작성자 성화초 등록일 15.08.16 조회수 299

청빈한 고관대작

 

지위가 낮은 벼슬아치나 힘이 약한 관직자는 더러는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지위가 높고 힘이 센 벼슬아치로서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매우 정직하고 청백한 공직자임의 분명한 증표다. 그런 대표적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사람에 박수량(1491~1554)이라는 분이 있다.

 

박수량의 본관은 태인(泰仁), 자는 군수(君遂). 고관대작을 지내고도 38년이 넘는 벼슬살이에 집 한 칸이 없는 가난한 청백리여서 죽은 뒤에 정혜(貞惠)라는 시호가 내려져 '정혜공'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알려진 분이다. 그는 전라도 장성(長城)출신으로 지금도 장성에 가면 그의 묘소가 있는데, 그의 청백리 정신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백비(白碑), 즉 글자를 하나도 새기지 않은 맨 비가 묘소 앞에 덩실하게 서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짐을 금할 길 없게 한다.

 

박수량은 23세이던 1513년(중종 8년)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그 다음 해인 24세이던 1514년에 문과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1554년 6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말로 많은 벼슬살이를 지냈다. 복(服)을 벗은 뒤에는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 봉상시 첨정, 사도시 부정 등을 역임했다.

 

46세이던 1536년에야 당상관인 통정대부에 승진되어 병조참지, 동부승지,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좌승지를 지내다가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참판이라는 고관에 임명됐다. 47세이던 1537년에는 함경도 관찰사로 나가 백성을 위하는 정사를 폈고, 요즘의 서울부시장인 한성 부우윤으로 영전했다. 공조호조참판 등을 다시 지내고 예조참판과 나주목사도 지내다가 가선대부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 한성판윤, 호조판서에 올라 마침내 고관대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1550년에는 우참찬이 되고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며 숭록대부에 오르기도 했다. 1552년에는 우참찬을 비롯하여 호조판서에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로서 생을 마쳤다.

 

참판과 판서의 벼슬도 높은데, 이권이 크다는 함경도와 경기도의 도백을 지내고 서울시장인 한성부 판윤을 여러 차례 지낸 벼슬아치이지만, 언제나 부모에게 효성을 다 바친 효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참으로 깨끗하고 청렴한 벼슬생활을 했기에 죽음에 임해서는 집 한 칸이 없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처지였다니 그가 청백리였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박수량은 젊은 시절 시골의 학자이던 김개(金槪)라는 스승 밑에서 공부하여 모든 경전에 밝았고 선비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추었으며 마음과 정신이 침잠근민(沈潛勤敏)하고 사람됨이 간중신밀(簡重愼密)하여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다. 특히 당대의 성리학자이자 대표적 인물이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바로 박수량의 고향 후배로 더구나 친척간이어서 그의 인품과 역량을 잘 알던 사이였는데, 하서는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박공 묘지명 병서(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朴公墓誌銘幷序)라는 박수량의 무덤에 넣을 일대기를 저술했다. 그는 뛰어난 글솜씨로 박수량의 훌륭한 인품과 청백하고 정직한 벼슬살이에 대하여 그림처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서 김인후의 묘지명에 의하면 "언제나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초야로부터 외람되게 정이품(판서)의 벼슬에까지 이르렀는데, 분수에 넘는 영광이다. 내가 죽으면 절대로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비(碑)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르고도 38년의 벼슬살이에 두어 칸의 집 한 채도 없었다는 내용에 그의 청빈한 삶을 제대로 설명해 주었다.

 

그러한 박수량의 유언에 따라 묘소에는 비가 세워져 있으나 글자 한 자를 새기지 않은 그냥 빗돌만 세워져 있다. 그의 청백리로서 모습을 역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위대한 학자 김인후는 그의 묘지명에서 박수량의 효자로서의 모습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워계실 때,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를 시중하던 효성스러운 모습과,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며칠 동안 옷을 입은 채로 날을 세운 효성에 대하여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부모에게 효도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옳은 일을 하겠는가. 그가 그만한 효자였고 착한 아들이었기에, 그만한 공직생활을 지내면서도 그처럼 훌륭한 청백리로서의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라는 고경의 이야기를 이런 데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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