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학년도 4월 시사·계기 교육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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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주중앙중학교 | 등록일 | 20.04.28 | 조회수 | 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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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4월 13일) 1. 시대적 배경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나라의 독립에 대한 민족적 욕구는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본의 감시와 무자비한 탄압이 심했으므로 국외에 근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는 없었으나 전 민족적인 3·1 운동의 결과로 비롯되고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체라 는 점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를 갖는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여러 임시정부가 통합된 것이다. 2. 수립 과정 및 중심 활동지 1919년 3월을 전후하여 모두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를 세워 일본에 대한 강력하고 조직적인 독립 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민족적 의식은 높 았으나 식민지 통치하에서 더구나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 지역 간에 원활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 후 각 단체들은 협의를 통해 통합 작업을 추진하여 1919년 9월 대통령 중심제가 가미된 의원 내각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국 상 하이에 수립하게 되었다.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동포들이 사는 지역과의 교 통·통신 장벽과 중국, 일본, 미국 등의 방해 또는 방관적 비협조로 독립운동에 많 은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공화정을 기초로 한 민주 공화 정부 체제였으나 운영 기술이 부족하여 내부 갈등이 빈번하였고 국민적 지지 기반이 취약하였다. 급기야 중·일 전쟁(1937)으로 인하여 임시정부는 중국 각처로 옮겨 다니게 되어 독립운동에 많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강인한 독립 의지 덕분으로 27년 동안 임시정부는 중국의 여러 지방을 전전했으나 그 맥은 끊이지 않았다. 초기의 상하이, 말기의 충칭 시절에 가장 현저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3. 의정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입법기관으로 1919년 4월 1차 회의에서 조소앙의 동의에 따라 구성되었다. 의장으로 이동녕이 선출되어 임시 헌장을 제정하고 각 지방을 대표하는 의원을 뽑았다. 임시 의정원은 일체의 법률안과 임시정부의 예산·결산을 의결하는 권한 외에 행정부가 집행하는 국정 전반에 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고 대통령의 선출 및 탄핵권까지 가지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광복 후 1946년 2월에 소집된 비상 국민회의에서 임시 의정원의 직능이 계승되었고, 1947년 3월에 개최된 국민회의로 그 법통이 이어지게 되었다. 4.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기념일 제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정통성을 확립하고 선열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국민의 애국정신으로 승화시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독립 운동사를 통한 민족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여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하기 위함에 있다. 4.19 혁명 기념일(4월 19일) 1. 4.19 혁명이란 정부 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시키며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 과 자유당 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헌정체제의 변혁 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으로 규정하여 이 를 4월 혁명, 4.19 혁명, 4.19 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 나 5.16 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 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2. 원인 1) 간접적 원인 4.19 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종신집권(終身執權)을 노린 대통령 이승만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의한 국민들의 불평불만이 누적된 데 있다. 2) 직접적 원인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 지지 상황과 투표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순리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처음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건강문제를 기회로 5월 중에 실시해야 할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에 실시(3.15 부정선거)하였는데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부정선거 지령서’의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하여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3. 전개과정 1) 제 1차 마산봉기(1960년 3월 15일) 3월 15일의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냄. 2) 제 2차 마산봉기(1960년 4월 11일) 제1차 사건 때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군의 학살된 시체 가 때마침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걸려 나왔을 때 학생과 시민의 분노 는 극도에 달함. 3) 고대생 피습 사건(1960년 4월 18일)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 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짐. 4) 경무대 진출, 계엄령 선포( 1960년 4월 19일)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 5시에는 비상계엄으로 바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수천명의 사상자 발생. 5) 이승만 대통령 하야(1960년 4월 26일) 25일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 발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선언, 자유당 정권 붕괴. 4. 의의 1) 한국 국민의 민주 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투쟁을 의미한 것이다. 2) 4.19 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민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3)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스튜던트 파워’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4) 4.19 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장면 정권 세력의 무능과 경제·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
<장애인의 날>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고, 장애인이 다시 생활하는 데 의욕을 높여주기 위하여 국가에서 1981년에 제정한 기념일입니다. 매년 4월 20일. 1972년부터 민간단체에서 개최해 오던 4월 20일‘재활의 날’을 이어, 1981년부터 나라에서‘장애인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해 왔습니다.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이전 재활의 날)로 정한 것은, 4월이 1년 중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어서 장애인의 재활 의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는 데 의미를 둔 것이며, 20일은 다수의 기념일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1981년 UN 총회는‘장애인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을 주제로‘세계 장애인의 해’를 선포하고 세계 모든 국가에서 기념사업을 추진하도록 권장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세계 장애인의 해’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81년 4월 20일‘제1회 장애인의 날’기념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법정기념일 축소 방침에 따라 법정기념일로 지정받지 못하다가, 1989년 12월 개정된「장애인복지법」에 의거 1991년부터 4월 20일이‘장애인의 날’ 법정기념일로 공식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길을 지나다 보면, 보도블록 위에 노란색으로 칠해진 울퉁불퉁한 블록을 본 적 있을 것입니다. 또 엘리베이터에 층이 적힌 숫자 옆으로 울퉁불퉁 점이 솟은 것이라든지, 휠체어가 그려져 있는 장애인용 화장실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장애인 편의시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장애인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임을 증명합니다. 장애인은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몸이나 혹은 마음에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장애인의 70%가 후천적인 사고에 의하여 장애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사고 때문에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장애는‘불편’할 수는 있지만, 결코‘다른’것은 아닙니다.‘차별’이 아닌‘차이’를 가진 것 뿐입니다. 세종대왕은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었고, 네 손가락의 이희아는 피아노를 아름답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장애인의 날>을 통해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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