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계기교육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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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노미희 | 등록일 | 13.02.21 | 조회수 | 238 | |
(1)유래 한국이 1910년에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받아 강제로 합병당한 이후, 그들의 무서운 식민정책과 무단 통치 밑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의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어 세계개조의 큰 기운이 떠돌게 되자, 민족대표 33인의 영도아래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세계만방에 반포하고, 전국의 남녀노소가 일제 관헌의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총 궐기하여 자주독립을 부르짖었다. 8.15 해방이 되자 뜻 깊은 이 날을 되새기기 위하여 해마다 3월 1일에 기념행사를 가져오다가, 1949년 10월 1일에 법률 제 53호로서 국경일로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3.1운동의 모습 기미년 2월 8일, 일제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먼저 터졌다. 최 팔용 이하 11명의 유학생 대표가 조선 청년 독립단의 명칭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는 동시에 그 말을 외국말로 번역하여 일제 정부와 그 의회 및 도쿄 주재 외국 사절들에게 전달하고 대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수백 명이 검거되고 그 대표자들은 모조리 투옥되었다. 이 사실이 국내에 전해지자 전국에 충격을 주어 고종 황제의 국장일이 3월3일로 다가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그 무엇을 기대하고 서울로 모여드는 군중이 수십만을 헤아렸다. 그러다가 3월 1일 정오가 되자 민족대표 손병희 이하 33인이 서명 날인한 독립선언서가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반포되고, 남녀 학생을 선두로 한 수십만 군중의 시위행진은 독립 만세를 외쳐가며 온 장안을 휩쓸게 되었다. 그 날의 서울장안은 질서 정연한 가운데 시위 행진하는 수십만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나부끼는 태극기와 우렁찬 만세소리로 뒤흔들렸다. 저녁때가 되자 기마 헌병과 보병부대까지 출동하여 총칼로써 그 시위를 제지하였다. 그러나 이날 시작된 독립운동은 갈수록 치열하게 확대되고 줄기차게 지속되었다. 이 해 4월에 해외의 민족 대표들은 상하이의 프랑스계로 모여들어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을 건립하는 동시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 헌법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숭고한 투쟁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그들의 인식을 시정하며 주의도 환기하게 되었으니, 한민족의 투쟁에 평화와 질서를 존중하면서 적의 총칼 앞에 비폭력을 위주로 진행된 만큼 희생도 컸었으나 그만큼 문화 민족의 위신과 자랑을 온 세계에 떨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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