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독립운동기념일 계기교육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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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노미희 | 등록일 | 12.10.26 | 조회수 | 2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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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 일어난 광주 학생 사건을 선배의 추모, 학생의 애국심 앙양, 학원의 자주 및 면학 등을 위하여 제정한 날. 1953년 10월에 제정.
학생의 날의 유래가 된 광주학생운동은 노예교육으로 대표되는 일제의 반민족적인 통치에 대항해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쯤 광주를 떠난 통근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일본학생(광주중학) 둘이 우리나라 여학생(광주 여고보)인 박기옥과 이광춘의 댕기를 잡아당기며 희롱하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4촌동생 박준채가 일본 학생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러자 일본학생들은 오히려 박준채에게 ‘조센징이 까분다’며 이죽거렸다. 그 순간 박준채의 주먹이 일본 학생의 얼굴에 작렬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같은 열차 안에서 어제 일로 조선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의 충돌이 일어났다. 식민통치의 부당성에 대한 학생들의 울분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3일, 이 날은 일본의 4대 명절인 명치절 이었다. 조선 학생들은 기념식에서 일본 국가 합창을 거부하고, 신사참배 대신 거리로 뛰어나와 “조선 독립 만세” “민족해방”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함성이 바로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이었다. 함성은 곧 신간회라는 전국적 조직망을 타고, 나라 안으로 퍼져 나갔다.
이 항일투쟁에 참가한 학교는 소학교부터 전문학교까지 1백94개, 참가학생만도 5만4천명이나 됐다. 검거된 사람이 1천6백42명, 무기정학 2천2백30명, 퇴학이 5백82명에 이르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운동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이를 계기로 망명가 중심이었던 민족운동이 민중주도의 민족해방운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 일제하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생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정부는 현행 11월 3일의「학생의 날」을「학생독립운동기념 일」로 기념일 명칭을 변경(2006. 02. 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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