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 발생(1980. 5.18)
- '93. 5.13 「5.13대통령특별담화」발표
광주광역시에서 먼저 시(市)기념일로 제정 희망
- '93. 5.19 5.18을 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키로 여·야 합의
- '96. 2. 1 광주광역시에서 법정기념일 제정 요구
5.18관련자 소송확정(대법원,'97. 4.17)
- '97. 5. 9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 규정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10·26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신군부 세력은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소위 12·12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집권의 의지를 주도면밀히 준비해온 신군부 세력에게 있어서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주의의 여망인 "서울의 봄"에 터져 나온 학생, 야당, 재야 등으로부터의 민주화 요구와 시위는 그들의 계획에 상당한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1980년 5월의 민주화 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생들의 대규모 저항은 마침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인하여 다소 누그러졌으나, 광주에서는 시위 초기부터 나타난 진압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더욱 적극적으로 시위가 가중되었고 광주시민들이 거들게 되었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이들에 대한 충정부대 진압군들의 과격한 진압이 5. 18의 시작이 된 것이다.
유혈 광주항쟁의 시발이 된 5월 18일의 시위는 전날의 시위들과 마찬가지로 학생시위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위 초부터 강경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시위대 주변의 군중들을 분노하게 하여 이들로 하여금 학생시위에 가담토록 부추겼다. 18일 오후부터 시위는 이미 학생시위의 수준을 뛰어 넘어 드디어 시민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고, 5. 18 광주 민중항쟁은 막을 내렸다. 광주의 5.18 국립묘지는 무등산이 바라다 보이는 아늑한 곳에 터를 잡고 있으며, 이 땅에 다시는 불의와 독재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준엄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주는 비록 무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겨레의 역사 속에서 죽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는 항쟁의 불길 속에서 빛고을의 위용을 과시하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자유의 불사신으로 부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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