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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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현호 | 등록일 | 18.04.11 | 조회수 |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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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야기(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재조명 우리민족은 경술국치(庚戌 國恥)로 비탄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세계 제 1차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민족자결주의」에 승시하여 3ㆍ1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그 소산으로「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 임시청사를 설치하고, 1919년 4월 10일 각 지역대표 30인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국호ㆍ연호ㆍ관제와 10개조의 임시 천장을 결의 채택하여 국무원을 구성 선출하고 4월 13일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는 왜적의 침탈로 9년간이나 그 맥이 끊겼던 우리 배달겨레의 독립정부를 계승한 정통적 정부이며, 항일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이 ‘4월 13일’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수립기념일’로 제정하여 기념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독립지사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서는 대표 기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노령, 서울, 상해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잇달아 임시정부를 조직하였으나 결국 분산된 운동을 지양하여 통일되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전체 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단일 정부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열강들과의 외교 활동에서도 단일 정부 명의로 활동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국내외의 공개적인 지원을 얻어 효율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수립하였다. 상해는 우리 독립운동의 진원지이며, 동양 교통의 요로(要路)요, 외국의 조계가 많은 국제 도시로서 비교적 유리해서 결정하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임시 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과 사상적인 분열 대립 등으로 많은 난관과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 결국 민족적 협동 전선을 구축하여 교통로, 연통제, 이교 활동, 언론, 광복군의 편성, 시정 방침, 일본과 독일에 대한 선전 포고 등 임무 수행에 전력을 다하였다. 또한 군주제를 폐지하고, 우리 역사상 헌법과 의회 제도를 도입하여 민주 공화 제도를 실행하였다. 이는 민주 공화제의 효시로서 새로운 기원을 연 역사적인 일이다. 이는 독립과 자유를 잃고 질곡(桎梏)에서 신음하던 겨레의 대표 기관이었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수립되어 1945년 광복 될 때까지 27년 동안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표 기관이었고 세계적으로 최장기간 존속된 임시 정부이다. 그 동안 독립투사들이 겪은 역경과 쓰라린 고통이 어떠하였을까는 붓이나 말로 이루 다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자주 독립국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껴야 할 것이고 선열들의 고매한 뜻을 깊이 새겨야 랄 것이다. 8ㆍ15 광복 후 11월 29일 임시 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였으나 미국 군정부와 국내의 혼란으로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아쉽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민족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꿋꿋이 이겨내어, 겨레와 나라를 굳게 지키면서 인류 발전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 21세기를 살 배달겨레의 의무와 자세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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