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고구려비 답사 실시(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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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심기섭 | 등록일 | 11.06.07 | 조회수 | 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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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원고등학교 향토조사반 1학년 학생들이 가금면에 있는 중원고구려비를 답사하고 돌아왔습니다. 장성진선생님의 인솔하에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 중원고구려비> 이 비석은 화강암재의 4면비로 글자의 모양은 예서체이며 모양은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4면 석비인 이 비의 자(字) 행(行) 에 있어서는 앞면이 10행 23자씩이고 왼쪽 측면이 7행 23자씩이며 오른쪽 측면은 6행이 분명하지만 뒷면은 너비로 보아 9행 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이 비의 건립시기와 목적이 장수왕이 그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퉁구 지방에 광개토왕비를 건립한 것과 같이, 문자왕때 앞서 장수왕의 남하정책 때 새로 얻어진 지역안에 조왕(祖王)인 장수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또 다른 의견 척경비 내지 정계비(定界碑)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비문의 판독이 완전하지 못한 상태여서 확실한 내용은 계속적인 조사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가 중원 지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지역을 국원이라 이름한 뒤, 이 곳을 남쪽 한반도 경영의 전초 기지로 삼아, 고구려 세력 확장의 꿈을 키워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기념비이기도 하다. 국보 제205호. 총높이 203㎝, 비면높이 144㎝, 너비 55㎝. 1979년 4월 충주 문화재동호인의 모임인 예성동호회의 제보를 받은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의 조사에 의해 학계에 보고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를 축소한 듯한 모양의 4면비(四面碑)이다. 화강암의 표면에 3~5㎝의 크기로 글자를 새겼고, 글자체는 예서(隸書)에 가까운 해서(楷書)이다. 마멸이 심해 앞면과 좌측 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판독할 수 없으며, 그때문에 비 자체를 4면비가 아닌 3면비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편적이지만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국제관계·영역문제를 비롯해 고구려인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비교적 많은 앞면의 경우 10행에 각 해당 글자수는 23자이다. 그리고 좌측 면은 7행에 각 행마다 23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우측 면과 뒷면은 글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총글자수를 산정하기는 어렵다. 첫머리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구절이 있고, 대형(大兄)·주부(主簿)·대사자(大使者) 등 고구려 관등이 자주 나와 이 비가 고구려에 의해 세워졌다는 증거가 된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를 아우(弟)와 같은 위치로 대하고 있었다. 비문에서는 고려 대왕과 신라 매금왕(寐錦王)이 형제처럼 위아래로 화합하여 '수천'(守天)하자는 구절이 있다. 수천은 천도(天道) 또는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이다. 또 고구려왕이 남하하여 신라왕을 부른 뒤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뜻하며, 광개토왕릉비문에서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속민(屬民)이어서 늘 조공을 바쳐왔다"라는 구절도 하나의 증거가 된다. 400년(영락 10)에 이미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을 받고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해서 낙동강 유역에 침입한 왜군을 격파하여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인 적이 있었다. 비문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자신을 '중화'(中華)로 여기는 의식을 전제로 하여 나온 표현으로, 당시 고구려는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주변 국가나 종족들을 조공국과 같이 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군사지휘관이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도 비문 속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된다. 이때 고구려의 군사지휘관이 주둔하고 있던 신라 영토는 중원 지방이 아니라 소백산맥 이남의 경상북도지방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은 광개토왕대부터 장수왕대까지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비의 건립연대를 생각할 수 있다. 그중 비문의 내용에서 '십이월이십삼일 갑인'(十二月二十三日 甲寅)과 '신유년'(辛酉年)이 나오므로, 이를 단서로 추정하여 대략 421년(장수왕 9)과 481년(장수왕 69)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특히 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속민'으로 표현되던 것이 이 비에서는 '여형여제'(如兄如弟)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적어도 5세기 이후의 표현이며 그동안 양국 관계에 일단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삼국사기〉에 의해 고구려와 신라의 본격적인 대립이 5세기 중반 무렵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비의 건립연대는 5세기 전반이 더 유력해진다. 그러나 문자의 판독을 달리해 449년을 유력한 건립연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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