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학사에는 왜 사회비판적 특성이 나타났는가?-作 오0진, 박0수, 윤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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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민수 | 등록일 | 17.07.18 | 조회수 | 7 | |||
<조선 후기 문학사에는 왜 사회비판적 특성이 나타났는가? -주요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3-1 오호진, 박민수/ 3-3 윤태원
1. 서론 조선시대 문학은 전기와 후기로 갈라지는데, 그 분기점은 1592년부터 7년간 벌어진 임진왜란이다. 조선 전반기 문학은 사대부 중심적인 성향을 향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예컨대 자연의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시나 가사로 표현했다는 점)이나 당시 사회에 대한 생각을 문학작품에 담았다. 예를 들자면 주세붕의 '오륜가'로, 당시 사회의 이념이었던 유학 사상을 찬미하면서 피지배층을 교화하려고 하는 내용을 담은 경기체가이다. 하지만 이들은 소수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전체 사회의 문화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세는 7년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조선 정부는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일종의 신분 상승권인 공명첩을 매매하여 신분 질서 혼란을 야기했다. 게다가 서민들이 세종 치세에 만들어진 한글을 상용화하게 되면서 서민권이 신장되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사회 혼란을 문학 작품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심지어 서민들도 가세했다)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사회비판적 성향이 어떻게 작품속에 녹여져 있을까? 이번 보고서의 목적은 조선 후기 주요 문학 작품을 통해서 사회비판적 성격이 어떠한 형식으로 나타났는지를 탐구하고 올바른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2. 본론 1) 홍길동전(作 허균) 홍길동전은 조선 전기의 사대부 문학이 조선 후기의 서민 문학으로 바뀌는 전초적 작춤이자 최초의 한글소설으로 작가는 조선 당파 북인의 중진인 허균(1569~1618)이다. 홍길동전은 당시 사회의 불합리성을 지적했던 소설의 선구적 작품이자 내용상으로 저항정신이 반영된 평민문학이다. 홍길동전의 줄거리를 보면 서얼 출신 홍길동은 호부호형을 원했지만 거절당해 사회로 나가서 야인 생활을 하다가 도적단들을 규합하여 활빈당이라는 의적단을 만든다. 그리고 조선 전국에서 의적 활동을 하다가 조정과 타협하여 형조판서의 자리를 얻고, 율도국으로 쳐들어가서 자신이 율도국의 왕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이 비판하는 것은 서얼 차별과 부패한 관료들이다. 그렇다면 부패한 관료들로 인해서 의적 활동이 지지받게 된 당대 사회를 살펴보자. 허균이 활동할 때는 광해군 시기이다. 전란이 끝나서 터전을 복구하는 중요한 시기에 광해군은 궁궐을 짓기 위하여 조도사, 조도관, 독운별장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수령과 결탁하여 궁궐 건축 재료들을 각출한다며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데 가담하였다. 허균의 호민론을 보면 백성들은 향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어지는데, 향민은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부류이고, 원민은 현실에 불만을 품는 부류이며, 호민은 반란(혁명)을 꾸미는 부류이다. 허균은 이런 호민론을 통해서 궁궐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힘들게하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였고, 허균의 사회비판적 성향이 드러난 대표적 작품이 홍길동전인 것이다. 소설에서 또 하나 지적한 서얼 차별을 보자. 서얼은 조선 시대 양반과 양인 첩사이에서 나온 자식인 서자(庶子)와 천민 첨사이에서 태어난 얼자(孼子)를 지칭한다. 조선 시대는 적서 차별이 매우 심했는데, 태종대 서얼금고법을 통해서 과거중 문과 응시권이 박탈당했고(다만 무과와 잡과는 응시할 수 있었다), 적자(본부인의 자식)보다 아래 신분으로 취급되었다. 홍길동전은 작품 주인공인 홍길동을 통해 서얼 차별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이 서자 출신의 손곡 이달의 밑에서 수학하면서 어느정도 서얼 문제에 대해서 영향을 받았는데, 작중 홍길동이 호부호형(아버지나 형을 아버지,형으로 부르는 것) 하기를 원했으나, 거절당하는 모습을 표현하여 당시 사회가 서얼에게 얼마나 박대했는지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홍길동은 이러한 차별을 극복하고 의적이 되어 백성들을 위해 행동하다가 나중에는 조정에게 형조판서를 제수받고 율도국에 왕이 되어 성공하게 된다. 홍길동전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중인들은 핍박받았지만, 권리 신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 후기 서얼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부유해지면서 16세기부터 서얼통청운동(庶孽通淸運動)이 일어났는데, 이때부터 중인의 발언권이 커져갔다. 중인들의 발언권이 커지면서(특히 정조 시대 초계 문신제로 인한 인재-규장각 4검서-들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사대부의 문화 수준에 거의 근접해갔다. 이렇게 서민, 중인들이 사대부 문화에 비견되고 심지어 그를 넘어설 수 있는 역량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은 그들이 비록 체제 순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사족층과 대등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사족층의 독점적인 문예적 권위를 위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했는데, 홍길동전은 이 흐름의 효시였다(출처: 역사비평 117호-129p). 2) 애절양(作 정약용) 조선 후기가 되면서 중앙정부가 부패하여 삼정의 문란이 일어났다. 삼정이란 전정(조세제도), 군정(부역제도), 환정(부세제도)을 뜻하는 말로 탐관오리들이 이 세가지 제도를 악용하면서 일어난 당시 사회문제를 지칭한다. 이는 조선의 세도정치에서 기인했는데, 세도정치 시대에서 부패한 관료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뇌물수수가 많아졌고, 뇌물수수로 인해 관리가 된 자들은 탐관오리로 진화하여 백성들을 핍박하는 악순환이 벌어진 것이다. 애절양은 당시 백성들의 고통을 나타내는 한시로 작가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남인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총애하던 신하였으나, 1800년에 정조가 서거하면서 노론 벽파들의 탄핵으로 인하여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 생활동안 당시 사회의 탐관오리들을 비판하면서 백성들의 중요함과 목민관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만든 한시가 애절양(哀絶陽)다. 애절양은 양물(陽, 생식기)을 자른 것(絶)을 슬퍼한다(哀)는 뜻이다. 먼저 시를 살펴보자.
내용을 보면 삼정중 군정(군역제도)의 폐단으로 인해서 고통받던 백성중 하나가 자신의 생식기를 잘랐다는 내용으로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말랐는데'라는 부분에서 백골징포(白骨徵布, 죽은 사람을 생존한 사람으로 기록하여 군포를 받아가는 것)와 황구첨정(黃口簽丁,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것)을 지칭하여 당시 사회의 혼란을 표현했다. 백성들은 이러한 폐단을 고치고 싶어했지만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같고 '라는 부분과 같이 관리들이 백성들을 호랑이와 같이 박대하고, 핍박하여 백성들이 관리들을 무서워하게 되었다(우리는 이 부분을 보고 고사성어인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가 생각났다. 호랑이로 입는 재앙인 호환이 가혹한 정치- 무거운 세금을 지칭한다-보다 덜 무섭다는 고사로 이 시의 당시 사회상황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 백성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이라는 시구처럼 대다수의 지배층들은 이들을 외면했고, 백성들은 격쟁(擊錚, 궁궐 주변에 아니면 국왕이 궁궐 근처에 있을때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국왕에게 원억을 직소하는 것)이나 상언(上言, 한문으로 글을 지어 위에 올려 직소하는 것)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배층들은 이것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고, 참고 참았던 민심은 민란으로 터져나갔다. 1862년 진주에서 시작된 임술농민봉기로 인해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조정은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달랬으며, 사태 해결기관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지배층들은 변혁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사창제를 실시하고서야 진정이 될 기미를 보였다. 이제 정리를 해보자.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서면서 부패한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경향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정의 문란이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은 피지배층, 백성(民)은 이를 시정하기 위해 지배층에 '직언'이라는 방법으로 호소했으나,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민의를 무시했다. 이때 나온 한시가 애절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지배층들은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하나는 위에 서술되있는 것처럼 '민란'이라는 형태로 지배층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으로 사회 변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1811년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임술농민봉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2017년 수능특강중 인문 지문에서 '조선 후기 민간의 이야기 속 이상향'이라는 지문이 있다. 지문 속의 이상향은 무릉도원과 비슷한데, 계급 구별과 차별이 없고, 누구나 일하면서 풍족한 의식주를 얻으며, 부세나 부역등의 외부의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삶을 위협하는 것들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면서도 찾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이런 이상향은 현실 도피적 공간이면서 현실 비판적 공간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백성들이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약용은 이런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리고 그들의 통한을 문학작품에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3. 두터비 파리를 물고~(작자 미상)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영국 액튼 경의 말씀처럼 권력은 필수적으로 부패하고 사회는 그에 따라서 혼란해진다. 이는 한국사의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은 건국부터 민본주의(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라는 사상) 성향으로 정치를 해왔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백성들을 자신의 재산을 채우려는 봉으로 여기는 관료들이 많아졌다(특히 세도정치 기간에 더했다). '두터비 파리를 물고~'라는 문학 작품은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는 당시 시대를 익살스럽게 풍자한 사설시조이다. 이 작품은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는 것과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위에 애절양과 비슷한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설시조로 중인, 상민들도 같이 지을 수 있고, 부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서민들의 성향을 알아낼 수 있다. 작품을 살펴보자.
두꺼비는 탐관오리, 파리는 탐관오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서민들, 송골매는 탐관오리들이 무서워하는 중앙 관리들을 뜻한다. 작가는 탐관오리를 두터비로 표현하여 파리(서민)를 억압하고, 송골매(중앙 관리)에게 비굴한 존재로 묘사하여 탐관오리의 허장성세와 이중성을 풍자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작품이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양반들이 문학작품으로 직접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중인, 상민들이 사설시조라는 문학작품의 한 경향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당시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이 색다른 의의를 지녔기 때문이다. 3. 결론(느낀점) 이번 '조선 후기 문학사에는 왜 사회비판적 특성이 나타났는가?'라는 주제 탐구를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의 산물과 흐름을 기반으로 하여 작가들의 정서와 상상력으로 빚은 작품들을 엮어 역사적 관점으로 조사해봄으로써 의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수많은 전쟁과 국가 내란, 황포 등 여러 가지의 갈등들의 열매인 풍류와 희망의 부재를 우리의 선조 문인들은 당시 횡포의 사실과 필요했던 영웅들의 활약, 풍자 등으로 시대의 굶주림을 고발하고 해소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현재 국어교사라는 진로를 지향하는 나로서 작가들의 문학으로 풀어낸 표현과 내재된 의미 풍자 기법들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역사를 사랑하는 학생으로서는 역사적 사실과 문학을 거시적으로 엮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지식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한 나무가 되어 지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고마운 프로젝트를 하게 된 것 같다. -30126 오0진- '조선 후기 문학사에는 왜 사회비판적 특성이 나타났는가?' 조선시대 가장 큰 분수령은 임진왜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대 중국을 지배하던 왕조였던 명나라까지 참전하여 7년간 진행된 동아시아 국제전쟁은 정치, 군사, 사회, 문화를 180도 바꿔버렸다. 문학사도 전쟁으로 인해 경향이 바뀐 특징중 하나였다.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공명첩을 발부하여 부농들이 양반으로 승격되었고, 사대부 중심 신분제에 한바탕 혼란이 일었다. 이때부터 서민권이 향상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민(民)의 풍속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양반들 처럼 당시 사회를 문학작품에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얼들의 억울함과 당시 민심이 원했던 영웅상을 표현한 허균의 '홍길동전',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서 생식기를 자를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나타낸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 앞의 두 작품과 달리 서민층들이 직접 사회를 해학적인 문학작품으로 나타낸 '두터비 파리를 물고~'등은 조선 후기 문학사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면서 문학 작품을 통해 당시 시대적 상황을 파악해보았고, 조선 후기가 민의(民意)의 힘이 커진 변혁의 시대였으며, 사대부들이 예론이나 파벌로 인해(물론 일부만 그렇지, 백성들을 위해서 지배층들도 그들의 원하는 바를 수렴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동법이 좋은 예시가 아닌가?) 정치 다툼을 벌일 때, 서민층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지배층들이 그들을 외면하자 직시하도록 봉기를 벌이기도 했던 시대였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주제를 탐구하면서 조선 후기는 서민권 발전의 태동기였으며 당시 서민들이 문학 작품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냈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사람들이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30114 박0수- 나는 미술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다. 이 동아리에 들어와서 '조선 후기 문학사에는 왜 사회비판적 특성이 나타났는가?' 라는 주제를 탐구하게 되었는데, 주제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 어떻게 진행할지 걱정했다. 하지만 다른 조원들이 많이 도와주면서 어려운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마치게 되었다. 조선 후기는 전체적으로 문화가 바뀌는 시기였다. 예를 들면 미술에서도 초기 지배층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묵죽도(作 이정)나 몽유도원도(作 안견)등의 그림이 나왔지만, 후기가 되면서 양반 중심에서 서민 중심으로 옮겨갔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을 표현한 풍속화가 대표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양반 중심의 문학작품이 조선 전기에 많이 만들어진 것에 비해 후기에는 서민 문화가 주가 되는 문학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는 양반 중심에서 서민까지 문화를 향유하게 된 것이 제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30321 윤0원- * 참고자료 수능특강 독서/문학 한국사 교과서-미래엔 역사비평 117호/作 역사문제 연구소/역사비평사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作 오항녕/너머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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