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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학년도 자율동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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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역사-作 김0형, 최0국
작성자 박민수 등록일 17.07.24 조회수 6

역사 주제탐구보고서

주제 축구의 역사 


저희는 역사 동아리 때 보고서를 쓰려고 하던 중에 주제를 찾기 위해 조 끼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중에 지금 한창 진행 중이었던 청운컵을 생각하게 되었고 축구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일상생활에서 역사를 찾을 때 꼭 우리가 아는 전쟁의 역사한국의 역사 이런 큰 배경보다는 축구처럼 잘 알지 못했던 역사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던 부분도 있었습니다처음에 저희는 축구의 역사를 조사하던 중에 동양축구의 기원 및 역사를 찾게 되었습니다먼저 동양축구의 기원은 축국에서 시작되었는데축국이란 가죽으로 싼 공을 차고 노는 공놀이를 뜻합니다축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전한시대 유향의 별록(別錄)에서는 황제가 만든 것으로 군대 병세(兵勢)의 기본이 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그리고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제 나라 사람 중에 축국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이외에도 다양한 역사서를 종합해 볼 때 축국은 이미 전국시대(기원전 403 ~ 기원전 221)부터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축국은 축구기구희구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축국은 본래 공차기를 포함한 공놀이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한 용어였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공차기공 던지기공 던져넣기 등의 운동 모두 축국이라는 용어를 통해 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종류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그 특징도 각양각생입니다그 중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축국의 형태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우선 우리나라에서 축국은 하는 방식에 따라 몇 가지 종류로 구분됩니다.


첫째운동장 양 끝에 구멍을 파놓고 공을 넣는 형태


둘째운동장 양쪽에 설치된 공문에 공을 넣는 형태


셋째오늘날 제기차기와 같은 형태


첫 번째와 두 번째 형태는 주로 군사훈련에 사용되었고세 번째는 민간에서 놀이 형태로 발달하였습니다그렇다보니 우리나라 축국은 제기차기 위주의 공차기로 발달하였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축구가 어떻게 기원되었고 발전되었을까요저희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우리나라의 축국의 기원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축국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시기입니다태종무열왕 김춘추가 김유신과 함께 축국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요그러나 최근 발견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의하면 종전보다 100여년 앞선 신라 23대 법흥왕시기에 축국을 시행한 사실을 알려줍니다그리고 삼국시대에 이어 발해와 통일신라 시기에는 축국보다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가 성행했다고 합니다그 이유는 격구가 기병들이 기병술을 연마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후삼국시대에는 이러한 격구가 발달하게 되고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왜냐하면 고려는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한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해서 기병술 향상을 중점적 목표로 두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격구의 발달은 보병훈련에 쓰이던 축국의 위축을 불러왔고오히려 축국이 민간을 중심으로 성행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조선시대에 이르러 축국은 전국적인 발달을 비롯해 아이들의 놀이로 정착되고공을 이용해 만든 제기차기와 엽전을 이용한 제기차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축국은 조선후기까지 겨울철 세시풍속으로 아이들이 가장 즐기던 놀이였습니다그리고 중국에서 기원된 츄슈와 일본에서 기원된 게머리에 대해서도 조사하게 되었는데 축구의 특성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중국의 츄슈는 일반적으로 같은 수로 편을 갈라서 공을 골대(기록에 의하면 여섯 개의 구멍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에 넣는 것으로 승부를 가르는 경기방식을 채택했는데 이는 삼국의 경기방식 가운데 현대의 그것과 가장 유사합니다또한 9명까지 편을 갈라 서로 공을 차다가 땅에 떨어뜨리면 지는 경기(한 명이 차는 것을 1인장으로 불렀으며 9인장까지 있었습니다.)도 있었습니다후자의 경기장은 네트 없이 하거나높은 네트를 설치해 공을 넘기는 경기로 앞서 김유신과 김춘추가 즐겼다는 놀이를 츄슈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이 놀이는 게임방식이 제기차기와 유사해 놀이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즐겨 했던 축국이 일본에 전파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공놀이도 있었는데 게마리로 부르는 일본의 전통 공놀이가 츄슈이기도 합니다이 놀이는 중국이나 한국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을 채택했는데 네모진 경기장의 모서리에 각각 나무 기둥을 세워 놓은 구역 안에서 여덟 명이 한 편이 되어 같은 편끼리 공을 발로 차는 놀이였습니다경기장에 골대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축구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고단지 경기방식 만으로 보면 일종의 패스게임 정도로 보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이 세 나라는 모두 같은 한자 권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는데 축국만큼은 같은 한자(蹴鞠)를 사용했으며 서로 방식은 달랐어도 공통적으로 발을 사용하는 유사한 형태의 공놀이를 즐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특히손에 공이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뒷짐을 지고 경기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결론적으로 삼국의 공놀이는 공통적으로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 사용하는 놀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저희는 이 부분을 조사하면서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축구는 형식상 조금 달랐을 지라도 위와 같이 규칙과 행해진 방식이 비슷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어쩌면 축구와 같은 문화가 삼국에 이어지고 발전함으로써 삼국의 역사가 유대가 깊었고 관련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축구의 기원은 위와 같았지만 19세기말 서양의 근대식 축구가 도입되면서 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그래서 저희는 서양의 축구의 기원 및 역사도 같이 조사하여 동양과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찾아보고자 하였습니다우선 저희는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에 대해 조사하게 되었습니다역사에 기록된 가장 오랜 고대 축구는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경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그리스에선 이미 이 시기부터 축구와 유사한 경기가 상행했는데 에피스키로스 또는 파이닌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그리고 한 팀에 12명에서 14명으로 편성된 선수들이 중앙에 원이 그려진 경기장에서 서로 자기진영의 골라인을 지키는 경기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경기 방식은 공을 차거나 던지면서 전진해 마지막에는 상대가 지키고 있는 골라인을 넘는 것(현대 축구처럼 골대에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의 골라인을 통과하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했습니다두 팀의 선수들이 상대방 골대 방향으로 공을 손으로 던지고발로 차거나 드리블을 하면서 앞으로 밀고 나가는 형식을 취하다 보니 양 팀 선수간의 신체접촉은 불가피했으며 그 피해(선수들의 부상정도는 다른 경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아마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올림피아 제전에서 즐겨 하던 정식종목 가운데 판크라티온이나 권투 등 격투종목을 제외하면 가장 치열한 경기일 것이다이런 경기방식은 로마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특히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특명을 부여받은 로마 군단과 군인에 의해 더욱 심화 계승되었습니다그리고 두 번째로는 로마의 하르파스툼을 조사했습니다하르파스툼은 그리스인들이 즐겼던 에피스키로스의 로마 버전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경기의 특성(개인과 집단의 전투성은 물론이고조직력과 단체정신을 함양하는데 적합하여 군사적 차원에서 훈련의 가치를 인식한 것이라 추정됩니다.)에 주목해 세계제국 건설에 유용한 방안을 강구했습니다기원전 3세기경부터 즐겼던 하르파스툼은 그리스의 에피스키로스와는 달리 로마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경기로 로마군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경기의 치열도는 마치 전쟁의 수준에 버금가게 되었다고 합니다경기에 사용된 공은 오늘날 축구공에 비해 훨씬 작은 소프트볼 정도 크기의 공을 사용했으며 경기는 양 팀 사이에 던지는 것으로 시작됐는데 양 팀은 공을 상대방의 골라인 너머로 보내기 위해 공격과 수비를 펼쳤습니다전체적으론 그리스의 축구와 유사하였다 볼 수 있으나 로마는 군단의 전투대형을 유지하는 기본 전투대형에 기초해 공격과 수비의 분업이 이루어졌고 다분히 원시적이지만 집단 전투에 필요한 기술(전략·전술)들이 사용되었습니다손과 발의 사용은 기본이고별도의 제한사항은 없었습니다그리하여 경기 모습은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다분히 전투를 닮아 있었고에피스키로스에 비해 역동적이고 남성미가 넘치는 경기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따라서 참가하는 선수들은 엄청난 속도와 민첩성이 필요했고과감한 육체적 접촉을 수반했기 때문에 경기 도중 부상은 필수였기 때문에 통상 진흙이나 잔디 위에서 행해졌습니다로마는 당대에 가장 잘 조직된 군대와 고도로 훈련된 전사를 보유한 고대국가였다는 점(기원전 유럽에 생존했던 열강들에 비해 로마 군단의 편성무기체계는 물론 고도의 훈련시스템은 매우 탁월했었습니다.) 동의한다면 로마가 그리스의 공놀이를 군대에 보급해 군사훈련으로 채택함으로써 로마제국 건설이라는 위업의 기틀을 마련하고이를 통해 단련된 로마군단을 제국 건설과 운영을 위한 추력으로 활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결국 로마의 군대는 유럽에서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각 점령지들을 관장하는 동시에 점령지마다 그들의 전투 공놀이를 소개했고전 세계에 전파했음은 틀림없습니다물론 여기에는 브리타니아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던 축구 종주국영국도 포함돼 있었다고 합니다고대 서양의 에피스키로스나 하르파스툼을 살펴 보면 축구가 대부분 군대의 훈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군대가 중시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동양에서도 이렇게 성행된 부분이 있었는데 서양에서는 중시된 정도가 더욱 크며 군사력 유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저희는 그 때의 권력 행사 수단이 군사력이기 때문에 군사력을 키우면서 조직의 단합력사기승부욕 향상과 개인의 능력 향상에 기여하는 운동이라는 면에서는 고대 서양 축구는 불가피하고 보편적일 수밖에 없는 운동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하지만 당시의 축구는 정해진 규칙이 잘 적립되지 않은 간다하지만 강렬한 수준의 놀이나 운동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저희는 이외에 서양의 축구의 기원에 대해서도 조사하게 되었는데 먼저 잉글랜드의 쉬로브타이드풋볼에 대해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잉글랜드의 쉬로브타이드풋볼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양 팀은 서로 맨몸으로 출전해 돼지 방광 같은 것에 공기를 채운 공을 서로 합의된 지점으로 옮기는 쪽이 이기도록 한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경기규칙이 없었습니다규칙에 제한이 없으니 그 치열성은 얼마나 대단했을지 예상이 될 정도입니다인원도 제한이 없어 마을 대항전의 경우 한 팀이 무려 500명이나 됐다는 기록도 있으며 목사나 신부도 참가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놀라운 것은 주먹과 발로 차는 것은 물론물어뜯거나 눈을 찌르는 행위도 허용됐는데 쇠붙이나 돌멩이를 휴대하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가 가능했습니다당시엔 골대가 없었으니 서로 합의된 지점을 마을마다 있는 교회로 정하고여기서 시작해 광장을 지나 골목골목을 누비며 상대편 교회에 공을 들여놓으면 시합은 끝납니다경기시간 제한도 없고서든데스(득점과 함께 경기가 끝나는 방식)로 진행됐기 때문에 무득점이면 이틀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교회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여기를 허용한다는 것은 마을로써는 더할 수 없는 수치로 인식했기 때문에 소속이나 단결 정도에 따라 경기는 전쟁 수준으로 발전되기 십상이었습니다이로 인해 한 경기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는 물론이고심지어 사망자도 속출했으나 그 중독성은 더욱 증폭됐다고 합니다이를 심각하게 여긴 황실에서는 무려 42번이나 법으로 금지했지만 그 뿌리를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이런 야만적인 경기가 성행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지만 돌멩이나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다면 오심 논란이나 승패에 대한 항의경기몰수 등 그 어떤 추잡한 행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이런 관점에서 역설이지만 축구를 가장 신사적인 경기라 규정할 수 있는데 신사의 나라 영국의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 다음은 아일랜드의 게일릭 풋볼이 있습니다잉글랜드에 쉬로브타이드풋볼이 있다면 아일랜드에는 게일릭 풋볼이 있습니다이 경기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꼽히는 이 경기는 케이드로 알려진 중세의 민속경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경기방식을 보면 쉬로브타이드풋볼이나 현대의 축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다른 경기와 달리 한 팀의 선수는 25명으로 제한하고경기 중에는 당연 손의 사용은 허용되었으나 공을 손으로 던지는 행위는 금지되었습니다다만손이나 발로 드리블을 하거나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주먹으로 공을 치거나 펀트하는 것은 허용했습니다득점은 골포스트의 크로스바 위로 넘기면 1골포스트와 크로스바 사이의 골 망에 넣으면 3점을 얻도록 하고 있어 럭비와 유사한 차등 득점을 적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게일릭 풋볼은 풋볼이라는 이름을 붙여 축구로 위장했지만 축구와 럭비 두 종목을 합친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럭비에서 분기된 경기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물론 경기 사용구는 타원형의 럭비공이 아닌 축구공처럼 둥글 것을 사용합니다. 그 다음은 이탈리아의 칼치오가 있습니다이탈리아는 12세기 경 부터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독립되었는데 이 도시들은 주변의 농촌지역까지 관장하면서 도시국가로 발전되었습니다이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중심의 시스템은 이후 이탈리아가 통일(1871)되기까지 끊임없는 전쟁과 함께 지역감정의 원인이 되었으며 유달리 강한 승부욕과 응원문화를 가진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어쨌든 14세기에 들어 피렌체를 중심으로 칼치오 경기가 행해졌는데 이 경기는 도시 축제의 일부로 행해졌습니다경기 방식은 시나 행정구에서 선발된 양 팀 선수 100여 명이 양 팀의 중앙 지점에서 경기를 시작하고자기 팀의 지역 경계선을 골로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비록 통일된 이후에도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있어 축구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라 도시와 도시간의 대항전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이런 경쟁심이 배가되어 경기의 치열도는 극에 달했는데 아래 사진에 보는 것처럼 선수들이 공을 차거나 들고 뛰는 행위 말고도 공과 무관하게 상대 선수와 힘겨루기를 하거나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은 물론이고심지어는 주먹다짐을 교환하거나 발로 차는 행위까지도 허용되었습니다칼치오의 경기 모습을 보면 오늘날 가장 격한 스포츠로 인정되는 럭비와 흡사한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럭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친 경기였습니다칼치오에 대한 이탈리아인들의 관심과 자부심은 남다른데 오늘날 프로 축구팀들의 이름에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예를 들면 우디네세 칼치오칼리아리 칼치오카타니아 칼치오 등은 모두 중세에 집단 축구 칼치오를 즐겨 했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그 다음은 프랑스의 술이 있습니다프랑스에서는 술이라는 축구경기를 즐겨 했습니다 경기는 19세기까지 브르타뉴와 피카르디 지방에서 성행하였고 공업화 이전에 농촌사회에서 행해지던 공동체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경기 방식은 양 진영의 선수들이 밀기울이나 건초더미를 채운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공인 술(soule)을 모든 신체적 수단들을 동원하여 상대 진영에 옮겨다 놓는 경기였습니다아래 삽화에서도 보듯이 이 경기 역시 로마나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군대에 보급돼 군사훈련을 위한 정식 과목으로 채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서양의 축구 기원을 조사하면서 고대와 공통적으로 중세 서양의 축구는 군사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대보다 경기가 더욱 치열해지고 과격해짐에도 불구하고 경기규칙에 적절히 제한을 두지 않아 사람들의 부상을 막지 못한 부분은 현대와 비교했을 때 비인간적이고 정당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축구가 고대에서부터 내려와 대중화 된 것을 보면 고대 사람들이 이러한 크나큰 부상을 감수하면서도 즐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저희의 생각으로는 그 당시에는 힘이 중시되던 시대였고 집단으로 행해지는 경기인 만큼 이기고자 하는 열망이 앞서서 자신이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을 것이고많은 인원이 참여하다 보니 정확한 판정이 이루어 질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일찍이 규칙을 없애고 정말 심한 반칙만은 제외시킨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군사적 필요에 의한 강압적인 강요에 의해서 축구가 퍼졌다는 생각도 들었지만강압적으로 행해진 것이라면 사람들이 즐겨 하는 것 보다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변질됐을 것이라 후자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대 상황을 살펴 추측해 본다면 통합이 안 이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에서 축구라는 운동을 고안하고 제안하여 어려운 상황을 대처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제일 알맞은 추측이라 생각 하였고저희는 그 추측을 기반으로 이번 축구의 조사에 대해서 한 부분의 역사는 결코 간단하고 우연이라고 보기엔 많은 요인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게 되었을까탐구 도중에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저희는 그래서 처음에 간단히 반 학우들에게 물어보게 되었습니다대부분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고 축구를 좋아해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그 좋아한다는 근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고 축구의 어느 면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는지에 구체적으로 궁금하였습니다그래서 인터넷 자료를 찾던 중에 유명한 축구 선수인 지네딘 지단의 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시합이 끝나지 않고 지금 이 상태로 플레이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공과 일체가 되어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최고의 상태 말이다.” 우리가 스포츠에 탐닉하고 축구에 몰입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분 좋은 상태’ 그것도 그냥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공과 일체가 되어 자유를 만끽하는 절정의 순간 때문이다


지네딘 지단 선수의 말에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공이라는 물체에 접촉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의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선수들의 플레이하고자 하는 도전정신과 열정이 관객에게 영향을 미쳐 더욱 열광할 수 있다고 보기도 했습니다이 외에 축구에 대한 다른 생각도 있었습니다.

 


제프 블래터 피파 회장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발로 차는 것을 좋아한다심지어 뱃속에 있는 아기도 발길질을 한다 




우루과이의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우루과이의 애기들은 고오오오오오오올이라고 외치며 태어난다



제프 블래터 피파 회장과 우루과이의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을 생각해보자면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원초적인 쾌감으로 작용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 의견에서는 사람들은 원래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저는 여기서 과거의 경험을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어릴 적 대부분의 저와 같은 아이들은 공이라는 물체에 집착했던 경험을 떠올릴 수 있는데 저의 경우에는 축구를 처음 접했을 때의 생각은 정말 이와 같이 별다른 이유가 있진 않았습니다그저 공을 처음 차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과 공을 소유해야 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것일까? 

저의 궁금함은 위 질문으로 좁혀질 수 있었습니다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인터넷 자료와 책들과 같은 문헌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우선 축구에 대한 응원 문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응원 문화를 보면 각 나라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고 선수들을 응원하는 방식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파도타기 응원가 부르기응원문구 계시하기 등이 있고 브라질과 같은 경우는 쌈바 의상 착용하기가 있고남아공 같은 경우는 부부젤라를 부르는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이와 같은 응원 문화를 보면 사람들은 축구를 관람할 때 모두 하나가 되어 자국의 선수들을 무의식적으로 응원하게 됩니다처음보는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어 열광하고 지고 있을 때는 같이 속상해하는 감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본능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문화들과 공동체 의식으로 인해 우리가 더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전 세계가 열광하는 축구는 이와 같이 여러 부분과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여러 사람들이 모두가 함께 할 때 그 시너지는 더욱 대단해지고 더욱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열광하게 한다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그런지 생활에 녹아 들게 되고 친구가족이웃 등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응원하는 팀이 같다면 위와 같은 여러 문화들이 적용됨으로써 사람들의 본능이 되어 오지 않았나라는 생각하였습니다하지만 응원문화에는 여러 문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훌리건입니다이 문제를 보자면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에 의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훌리건은 본래 불량배를 일컬었으나 1960년대 들어 축구장 폭력이 조직화·과격화되면서 축구장에서 난동을 일삼는 무리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널리 알려진 사례로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축구전쟁, 1982년 네덜란드 할렘모스크바 스파르타크 경기 등이 있습니다자신이 응원하는 축구팀이 경기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것인데 이러한 면을 보면 사람들의 본능이 아님도 증명이 가능합니다사람들의 본능이 전투적이고 공격적이라는 것은 증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만약 그 사실이 증명된다고 해도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공격적으로 대하지 않음을 일상생활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본능이라 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물론 아이들의 행동만으로는 본성과 본능이 악한지 선한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론들과 철학으로는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이러한 문제에도 공동체 의식을 발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존재하지 않아야함은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도 바라는 것일 겁니다결국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본능인 것인가 아닌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며 전체적으로 이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하지만 탐구하면서 확고히 생각했던 것은 축구란 스포츠 그 이상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정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축구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월드컵의 기원인데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만큼 이 대회가 개최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월드컵은 1928년에 개최되었고 FIFA는 올림픽과는 별개로 주관하는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합니다하지만 개최 되고나서 얼마 후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되었습니다첫 번째는 대륙 간 장거리 여행의 어려움이었습니다그 당시에는 운송수단의 발전이 현재와 같지 않아 개최국까지 가는 데에 큰 어려움이 있었고 선수들의 상태와 컨디션을 보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또한 개최국에 기후음식생활 등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그로인해 축구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플레이를 볼 수 없기도 하였고이로 인해 좌절감과 실망을 가지는 등 많은 문제를 초래  하기도 했습니다두 번째는 전쟁 문제로네 번째 대회는 원래 1942년에 개최될 예정이었습니다. 1936년 8월 13베를린에서 열린 제23차 FIFA 총회에서 독일이 공식적으로 개최 신청을 하게 됩니다곧이어 브라질도 월드컵 개최를 신청하였습니다. 1939년 6월에는 아르헨티나도 개최 신청을 했습니다하지만4회 대회의 개최국이 결정되기 전인 1939년 9월 1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결국 무산되었습니다이 탓에 다음 대회인 1946년 대회도 자동으로 무산되게 됩니다저는 여기서 축구는 사람들의 본능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상황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즉 외적인 조건과 내적인 조건이 꼭 한 곳에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작용되는 조건 또한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저희는 이번 조사에서 축구의 역사와 열광의 이유 등을 탐구하며 축구가 미치는 영향력과 사람들이 축구에 영향을 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물론 그로인해 시대에 따른 사람들이 축구를 생각하는 것과 축구의 의미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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