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논술 대회 안내(2학년 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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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정환 | 등록일 | 21.05.12 | 조회수 | 130 | ||||||||||||||||||||||||||||||||||||||||||
2021년 철학 논술 대회 심사 결과 및 심사평 철학 논술 대회의 심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본 시상은 지난 5월 27일 목요일에 작성된 논술 답안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합니다. 본 대회의 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시간 30분 동안 열 한 명의 학생이 스물 한 장(42페이지)의 답안을 작성했고, 그 안에는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와 언어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답안들이 하나 같이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중에서 옥석을 골라내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삶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담아낸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최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해 제출된 답안의 인적 사항을 삭제한 뒤, A~K로 알파벳을 붙여 검토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중 두 명은 애당초 학번과 이름을 기재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검토 결과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A는 첫 번째 논제를 불로소득에 대한 논의로 연결 지음으로써, 과감하게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롭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불로소득이 노동의 가치를 폄하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이렇게 논제를 발전시키는 모습은 제시된 문제를 오해 없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과연 모든 노동은 반드시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놓치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또한 빈부격차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불로소득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이상 불로소득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비단 불로소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글쓴이가 그 가치를 당연시하고 있는 ‘노동’에 의해서도 빈부격차는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논리는 좀 더 보완이 필요해 보입니다. 한편 A는 두 번째 논제에 대해, 언어를 ‘문화의 일부’로 정의함으로써 언어가 가지고 있는 소통의 수단 이상으로서의 가능성을 조명하고자 시도했습니다. 즉 언어와 문화가 맺고 있는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내고자 했습니다. 흥미로운 시도이기도 할 뿐더러, 이 과정에서 참신한 사례를 다채롭게 제시하는 모습이나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는 모습도 돋보였습니다. 다만 글쓴이의 논리는 ‘언어는 소통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격파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글쓴이가 제시한 주장의 핵심은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하나의 문화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소통 수단으로서의 적합한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상을 말하지는 못합니다. 즉 언어와 문화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주장은 ‘하나의 문화권에는 반드시 하나의 고유한 언어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는 있을지언정, 언어가 가지고 있는 소통 수단 이상의 가능성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B는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비추어 첫 번째 논제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즉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로운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불로소득을 정당화하는 작업으로 연결됩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경제적 이념이 자본주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평함만 추구하면 경제 성장이 침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지 전개는 때로 쉽게 간과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순기능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으로서의 자본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근거의 경우 현재 우리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경제적 관념이 자본주의라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정당화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에서는 당연히 사회주의가 바람직한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제시된 논제는 우리나라에 요구되는 정의가 아니라 모든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의에 관해 묻고 있음을 고려하면 글쓴이의 답변은 논제의 취지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나아가 경제 성장이 침체될 수 있다는 두 번째 근거 역시 불로소득의 규제가 필연적으로 경제적 침체로 이어진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불로소득의 금지가 사유재산의 철폐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설득력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글쓴이가 제시한 ‘샤넬백’으로 예시를 들자면, 노동을 통한 소득과 자본만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샤넬백을 준다기 보다는, 노동을 해야만 샤넬백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샤넬백을 이용해 또 다른 샤넬백을 가지는 것은 금지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글쓴이의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이렇게 샤넬백으로 또 다른 샤넬백을 가질 수 없게 만들었을 때, 샤넬백은 그 온전한 가치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B는 두 번째 논제에 대해 ‘언어는 단순히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다.’는 입장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매우 체계적으로 언어에 대한 고찰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명령적 기능, 정보적 기능, 표출적 기능 등에 대해 검토하는 한편, 허구를 구체화시키는 언어의 가능성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국가를 형성하고, 구성원 간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효과의 측면에서 언어를 고찰하려는 시도가 참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효과의 이면에 존재하는 상호소통의 매개체로서의 언어의 이미지를 완벽히 뛰어넘지 못하는 모습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언어가 가진 명령적 기능이나 정보적 기능 역시 언어의 의사소통 기능에 포함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다만 혼잣말이라든지, 감탄사라든지, 허구를 구체화하는 기능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발상 자체는 매우 흥미로우나, 이에 대해서 제대로 분량을 투자해 깊이 있게 다루어냈다면 더 좋았겠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C는 참가자들 중에서도 간명하고 결단력 있는 문장이 단연 돋보였습니다. 첫 번째 논제에 대해 C는 ‘노동 이외의 행위를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 역시 정의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근로소득이든 불로소득이든 결국 인간의 선택에 의해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글쓴이의 주장대로 ‘선택’이라는 개념을 분배의 기준으로 설정할 경우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의 경계가 상당히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몇 가지 반론에 부딪히게 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선택에 포함될 수 있는 행위가 실로 무한하며, 그 안에는 우리가 흔히 부정의하며 불법적이라고 간주하는 행위들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근로소득과 불로소득만 다루고 있지만, 기실 ‘선택’을 기준으로 한다면 ‘불법소득’도 하나의 선택인바, 글쓴이의 논리에 따르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는 대상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나아가 주사위를 던져 돈을 따는 도박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도박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물론 본인이지만, 돈을 따는 사건은 ‘도박을 하기로 한 결심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도박에서 주사위를 던져 특정한 숫자가 나온 사건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주사위가 6이 나와서 매우 큰 돈을 땄다고 한다면, 이 상황에서 온전한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까지일 뿐, 주사위를 던져 6이 나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를 개인의 선택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우연’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이라는 개념과 반대로 허용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더욱 확실해집니다. 두 번째 논제에 대해 C는 ‘언어는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언어는 하나의 세계관을 담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언어는 대상을 인식하고 규정하는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주장입니다. 언어가 가진 규정성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라는 내용의 이 시는 언어가 가진 규정성을 잘 보여줍니다. 언어는 단순히 나의 의사를 상대에게 전하는 것을 넘어 어떤 존재를 그 무엇으로 규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쓴이의 말대로 무지개의 색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그것은 다섯 가지 색이 될 수도 있고, 일곱 가지 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사유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깊이에는 다소간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D는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재난국민소득’을 근거로 제시하는 모습이 돋보였습니다. 노동 외의 소득이라고 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가진 자의 자본소득을 떠올리는 데에 비해, 이 학생은 갖지 못한 자의 재난소득에 주목했다는 점이 아주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즉 가진 자뿐만 아니라 다문화 가정, 장애인, 기초 수급자, 한부모 가정 등의 사회 취약 계층을 위해서 노동 외의 소득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지원이 정의로운 이유에 대해 한 번 더 파고드는 시도를 찾을 수 없던 점이 아쉽습니다. 또한 주식 투자, 암호 화폐, 복권 등과 관련해 행운을 실력과 연관 짓는 부분은 아무래도 논리의 비약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두 번째 논제에 대해 D는 ‘언어는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심리학’을 끌어오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즉 언어를 인간의 무의식을 측정하거나 탐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지표’로 정의함으로써 그것의 가능성을 확장하고자 시도하는 점이 매우 훌륭했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깊이 있게 조명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한편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들은 다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언어를 인간과 동물의 구분점으로 주장하는 내용이라든지, 언어가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다양한 느낌에 주목하는 내용들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하기에 따라 동물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 여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말이나 글을 통한 소통만을 언어라고 한다면 사람에 따라서도 말이나 글을 이용한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울러 언어가 인간에게 다양한 느낌을 선사한다는 점은 분명 언어가 가지고 있는 더 큰 가능성을 암시하는 단서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에게 있어 언어가 반드시 의사소통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단언할 정도의 근거는 될 수 없습니다.
E는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롭지는 않다.’고 주장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글쓴이가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한 개인의 노력과 노동이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능력주의 사회의 폐해를 고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러한 ‘능력’은 가정환경이나 교육열 등 철저하게 능력 외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 만큼 결국 이 사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능력’을 기준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결과 끊임없는 빈부 격차의 재생산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이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부의 대물림과 같은 폐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날카롭게 분석했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원 간의 임금 격차가 발생한다면, (글쓴이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노동이라기보다는 평가된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논점 일탈이 발생하고 있는 점, 그리고 평가된 능력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이 정의롭지 못한 거라면 대신 무엇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대안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두 번째 논제에 대해 E는 ‘언어는 단지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진실뿐만 아니라 거짓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음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실로 문학처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단순한 의사 전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서술을 보면 이 학생이 언어를 이용한 예술에 대해 풍부한 식견과 깊은 애정을 품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그 아름다움에 전율하는 경험을 해본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만 두 번째 근거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타인에게 명시적인 문장을 제시했다면 그것도 하나의 의사의 전달로 성립하는바, 타인에게 거짓을 전달하는 행위도 엄연한 의사의 전달에 포함된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설득력이 크지 않다고 평가했습니다. 어쩌면 글쓴이는 ‘의사소통’을 대화의 구성원들이 진심 어린 이해에 도달하는 것으로만 국한시켜 정의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오히려 언어의 합당한 가능성을 축소시킴으로써, 당초 글쓴이의 취지에 역행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F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해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로운 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우리 사회에는 ‘노동이 불가능하거나, 노동력을 요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함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에서 사회에 대한 폭 넓은 안목이 돋보입니다. 무엇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기본 소득’을 언급함으로써, 노동을 통한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상식이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라는 철학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도 탁월합니다. 하지만 일련의 논의를 정리해낼 수 있는 자신만의 새로운 틀을 명확하게 제시함에 있어 미흡함이 다소 존재하는 한편, 정의로운 소득(자본)의 성립조건으로 ‘그것을 얻고자 시도한 것’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평가자를 적잖이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말대로라면 인간이 무엇을 갖고자 했고 그 결과 그것을 가지게 됐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옳다는 말이 되는데, 경우에 따라 이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범죄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논제에 대해 F는 언어는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언어가 역사를 기록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 언어를 통해 다른 국가와 외교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상의 근거들은 아무래도 언어가 가지고 있는 상호소통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으로서의 역사 역시도 결국엔 먼 시간 뒤에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취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외교라는 것도 의사의 주체로서의 국가와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해 역사로서의 언어든 외교에서의 언어든 결국은 의사소통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논지는 한계를 갖습니다.
G는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롭냐는 질문에 대해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은 정의롭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수행할 수 있는 노동이란 결국 ‘재능과 능력’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러한 재능과 능력은 재력이나 가정환경 등의 요소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을 온전히 한 사람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상, 그로부터 도출되는 노동을 기준으로 재화를 분배하는 건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부익부 빈익빈의 대물림 및 공정성에 대한 불신 현상과 맞물려 있는 문제이며, 그러한 사회적 문제가 왜 부정의 한 것인지를 논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논지의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면 노동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분배해야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방안 제시 없이 현상에 대한 비판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두 번째 논제에 대해 G는 언어는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언어는 상호성이 아닌 일방성 또한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언어는 문화를 창조하고 사회의 통합을 이끌어 낸다는 점을 제시합니다. ‘일방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본 논제를 정면 돌파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언어의 상호성’이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글쓴이 G는 언어의 일방성을 언어의 상호성과는 완벽하게 구분되는 별도의 성질로 규정했지만, 기실 그것은 언어를 통한 상호소통이 실패하거나 제한되는 경우에 부득이하게 발생하는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할 수 있다면 일방향적인 전달보다는 쌍방향적인 소통을 추구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일방적 전달이든 상호소통이든 큰 틀에서는 하나로 묶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문화 창달이나 사회적 통합의 효과를 이끌어 내는 것 역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소통의 기능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하는 것인바, 이를 언어의 상호소통성과 구분되는 별도의 독립된 개념으로 규정하는 건 다소 궁색한 인상을 남깁니다.
H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해 노동을 통해 얻은 자본과 소득만이 정의롭다고 주장합니다. 실물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화폐 중심의 경제가 자칫 인플레이션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돈으로 돈을 버는 행위로만 경제를 가득 채울 경우 실물경제는 파탄나고 남는 것은 껍데기 뿐인 화폐 밖에 없게 될 테니까요. 또한 글쓴이는 여러 가지 가상의 상황이나 예시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흥미롭게 풀어나갔고,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편하게 잘 읽혔습니다. 다만 ‘노동의 종말’로 대표되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실물 경제를 위한 생산 노동은 상당부분 자동화되었음을 간과하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나아가 글쓴이는 누군가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데 누군가는 노동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면 그 상황을 누구도 납득할 수 없을 것임을 예시를 통해 제시했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는 점이 미처 다뤄지지 못하고 있는 점도 아쉽습니다. 또한 직업에 따라 어떤 직업은 노동으로 인정받고 또 어떤 직업은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기실 글쓴이가 분배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는 건 노동 그 자체라기보다는 ‘고통과 희생’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남았습니다. 두 번째 논제에 대해 H는 언어는 상호소통의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언어재활사’라든지 ‘번역가’와 같은 직종을 예로 들었는데, 그 논의의 취지를 헤아려보자면 언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전달’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즉 의사나 의미의 전달은 감정적 맥락의 동반 여부에 따라 매우 다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음을 글쓴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글쓴이가 보여주는 이러한 안목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즉 언어란 사실적 정보뿐만 아니라 감정적 정보 또한 전달할 수 있는 것이고,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경우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글쓴이가 논제에 제시된 ‘상호 소통’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사실적 정보의 전달’에만 국한시킨데 반해, ‘감정의 전달’ 역시 ‘상호 소통’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어 보인다는 점은 평가자로 하여금 끝까지 ‘과연 글쓴이가 본 논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했는가?’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I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해 ‘노동을 통한 소득도 정의롭지 않을 수 있으며, 반면에 불로소득도 정의로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정당하게 노동을 했다 한들 그로 인해 빈부 간의 격차가 발생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평등’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평등’의 가치에 대한 논증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습니다. 과연 평등은 무조건 정의로운 것이고, 불평등은 무조건 부정의한 것인지에 대한 탐구가 이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편 글쓴이는 사회적 환원이나 기부, 혹은 재분배를 근거로 불로소득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한 사회에서 재분배가 갖는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불로소득을 얻은 사람이 기부를 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파고드는 시도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또한 왜 재분배를 전제로 하는 불로소득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도 추가적으로 묻고 싶습니다. 두 번쨰 논제에 대해 글쓴이는 언어가 상호 소통만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프레임을 구성하는 언어의 기능’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글쓴이는 정치권에서 이루어지는 ‘언어 선점 전략’을 예로 들었는데, 이런 모습에서는 사회적 식견이 물씬 묻어났습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언어의 규정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언어는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자의적으로 정의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어떤 사실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글쓴이는 언어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J는 논제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들의 정의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결론에 접근해 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주장을 펼치고 그에 대해 다시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일을 무수히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글쓴이는 노동을 통해 얻은 자본만이 정의롭다고 주장합니다. 글쓴이는 분량의 상당 부분을 ‘노동’이란 개념을 정의하는 데 할애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글쓴이가 제출한 답안은 ‘과연 노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에 가까워 보이기도 합니다. 글쓴이는 노동을 정의로운 노동과 정의롭지 못한 노동으로 구분하고 그 중 정의롭지 못한 노동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이를테면 청부살인은 노동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는 행위이고 이를 통해 얻은 소득 역시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노동에 대해 한바탕 신나게 파고드는 모습이 흡사 풍물패의 만담이나 프리스타일 랩을 감상한 것 같은 시원함을 선사합니다. 다만 정의로운 노동과 부정의한 노동을 구분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못하거나 자의적인 점, 그리고 부정의한 노동에 의한 소득이 부정한 까닭에 대한 적극적 논증이 미흡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자유주의적 이념이나 사회규약을 근거로 들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정당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나아가 글쓴이에 따르면 노동 이외의 소득에는 정의로운 노동으로 얻은 소득 이외의 모든 것들이 무수히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정작 글쓴이는 노동을 통해 얻지 않은 수익과 관련해 앞서 언급한 부정의한 노동으로 얻은 소득만을 근거로 노동을 통해 얻지 않은 수익 일반 전체에 대해 ‘정의롭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점은 논의의 대상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그러니까 범죄를 통해 얻은 소득 이외에 그냥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불로소득도 노동 이외의 소득임이 분명한데, 범죄 소득이 부정의하다는 이유만 가지고 ‘오직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롭다.’는 결론을 내고 있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두 번째 논제와 관련해 J는 언어는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열 한 명의 참가자 중 유일하게, ‘그렇다.’고 답한 것입니다. 글쓴이는 일단 ‘언어’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을 헤아림으로써 그 범위를 특정하고, 인간이 언어를 만들게 된 연원에 대한 고찰을 수행합니다. 그 결과 글쓴이는 ‘유약한 인간이 생존의 일환으로 뇌를 공유하기 위해 언어를 갖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애당초 언어의 목적이 소통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가질 수 있는 다른 역할이나 기능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글쓴이는 ‘생각, 혼잣말, 일기’ 등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예견하고 이러한 반박을 요격하는데 이 과정이 아주 일품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언어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며, 우리의 생각은 언어가 아닌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때로 그러한 생각이 언어의 형태를 띠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나아가 혼잣말이나 일기 같은 것은 비록 타인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역시 같은 시간이나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스스로와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의 언어도 결국은 소통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좀 더 논의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일련의 분석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K입니다. 첫 번째 논제에 대해 K는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로운 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소득/자본에 대해 순서대로 하나씩 정의해 나갑니다. 그 결과 글쓴이는 ‘노동’을 ‘무언가에 들이는 노력과 시간’으로 정의했고, 소득을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으로 구분했습니다. 무엇보다 ‘자본’을 단순히 ‘돈’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맥, 시간, 능력, 성격’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게 정의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요소들도 경우에 따라 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학생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데는 자본에 대한 이러한 규정이 매우 주효하게 작용했습니다. 이어지는 논의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글쓴이는 자신의 일상에서 사례를 찾았습니다.
“만약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과 자본만이 정의롭다면, 우리의 용돈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짧지만 단호한 이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큰 울림을 느끼게 합니다. 분명 우리의 삶에는 대가 없이 받는 돈이 존재합니다. 누구든지 용돈을 받아봤다면, 그 돈을 부정의한 것이라 판단해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던 이상 글쓴이의 주장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평가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글쓴이가 용돈이라는 대상을 묘사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오늘날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소비되는 방식과 상당히 닮아있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기본소득 역시 시민이라는 이유로 아무 대가 없이 주기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글쓴이는 용돈의 정당성을 논증함으로써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논증했고, 동시에 노동을 통한 소득만이 정의로운 것은 아님을 증명해냅니다. 이러한 논의가 ‘인권’의 개념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글쓴이의 주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본’에 대한 논증으로 달려갑니다. 앞서 ‘인맥, 시간, 능력, 성격’ 등도 ‘자본’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논증해두었던 것을 끌어옵니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선천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무언가 물려받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쓴이는 한 개인이 가정환경에 따라 습득할 수 있는 지식, 인맥 등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부르디외가 주장한 아비투스(문화자본)도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글쓴이는 “우리가 노력 없이도 천부적으로 주어지거나 우연스럽게 주어지는 부모님이라는 인맥, 주변환경 등의 자본이 있기에 노동을 통해 얻은 자본만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노동을 통해 얻은 자본만을 정의롭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 자체도 정의롭지 않은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상의 논증은 좀처럼 부정하기 힘든 우리의 현실을 근거로 하고 있기에 반박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앞서 글쓴이가 제시한 사례들은 사적인 혈연관계를 통해 부모로부터 본의 아니게 얻게 되는 소득이나 자본인 반면, 사회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통상 공공적 차원에서 사회에 의해서 후천적이고 의도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나 자본이라는 점에서 그 맥락 사이에 모종의 괴리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으나, 여하간에 이미 우리의 삶에 분명히 노동에 기인하지 않은 소득이나 자본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우리 모두가 그것은 명시적으로 거부하기보다는 기꺼이 적극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이상, 추가적으로 어떤 노동 외의 소득이나 자본을 지급한다고 해서 그것을 특별히 부정의한 것으로 비판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두 번째 논제에 대해 K는 언어는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글쓴이는 상호소통을 직접적인 상호소통과 간접적인 상호소통으로 구분함으로써 이를 정의합니다. 그리고 언어가 상호소통 이외의 목적을 위해 기능하는 사례를 제시합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주장들은 앞서 검토한 J와 완벽히 정반대입니다. 첫 번째는 일기입니다. 앞서 J는 일기를 쓰거나 혼잣말을 하는 행위는 결국 같은 시간이나 다른 시간의 스스로와 소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K는 애당초 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을 기록하고 간직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때 사용된 언어는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같은 행위임에도 두 사람의 해석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임에도 두 사람의 주장은 각기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나‘를 시간의 차이에 의해 단절된 각각의 개체로 볼 것이냐,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을 유지하는 단일한 자아로 보느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입니다. 앞서 J는 언어로 구체화 되고 형태화된 사고는 타인에게 그 사고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에서 마련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K는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 된 사고라고 해서 반드시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언어적 형태의 사고라고 해도 얼마든지 표현되지 않은 채로 간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때 사고가 언어화된 이유는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개인 내적 차원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또 체계화시켜 발전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쓴이는 언어는 단지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을 구체화시키는 수단임을 논증합니다. 제시된 예시가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긴 했지만, 논지의 큰 취지는 타당성을 확보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검토를 통해 미리 공개된 평가기준에 의거하여 K를 최우수로, J를 우수로 선정합니다. 축하합니다. 아울러 참가한 모든 학생들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냅니다.
참가신청: https://forms.gle/Wxbg8ApJsXTNpKSr7 2021년 철학 논술 대회 안내문
우리 학교 학생들의 철학적 사고력과 논리력을 확인하고 증진시키는 기회를 갖고자, 교내 철학 논술 대회를 실시합니다.
*제한 시간 내에 두 가지 논제를 모두 작성해야 함. 오픈북 방식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랍니다.
대회를 운영하고 시상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모일 모시에 논제를 제시하고 작문을 시키면 간단한데, 굳이 이렇게 미리 논제를 제시하고 숙고할 시간을 부여하는 이유는 우리의 입시에 힘을 보태기 위함입니다. 교내 대회인만큼 대회 참가와 관련된 사실을 생기부에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전 공개 논제들을 가지고 2주 가량의 기간 동안 고민해 나가는 과정과 이후의 깨달음을 자기소개서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합니다. (주요한 계기로 삼을 수도 있고, 다른 활동과 연관지을 수도 있고, 자기소개서 1번의 주요 소재로 활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대회 진행과 관련된 사항>
<심사기준>
참가신청 링크 https://forms.gle/Wxbg8ApJsXTNpKS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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