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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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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박소연 학생- 스리랑카 봉사활동을 다녀와서
작성자 충북사대부설고 등록일 10.08.04 조회수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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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센터, 박소연

스리랑카라는 나라에 발을 처음 들였을 때를 떠올려 보면 불평, 불만이 많았다. 우리 나라와 많이 다른 기후나 환경 때문에 많이 힘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이 무척이나 그립다.

처음 이런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냥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5월 6일 인천 연수원에서 우리가 만나서 강의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내가 잘 할 수 있을지도 고민되고, 내가 그들을 만나서 어떻게 도움을 줘야하나도 걱정 되었다. 인천 연수원에서 레크레이션을 하고, 안전 수칙에 대해 듣고, 여러 가지를 하면서도 내 머릿속에서 그 고민들은 떨쳐지지 않았다.

그 고민은 5월 7일 인천공항에서 발대식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타서야 풀렸다. 그냥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해주면 돼는 것이다. 내 능력이 적어서 그리 많은 걸 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그들을 위하는 마음만 진심이면 그걸로도 반은 성공이 아닐까 싶었다.

7일 저녁에 다 돼서야 콜롬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숙소로 이동해서 하룻밤을 보내고 각자의 봉사활동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방에서 잠을 자고 8일 오전에 각자의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약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서 우리는 마타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로 들어가기 전 버스가 주차를 하려 난민촌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입구가 좁아 차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때 난민촌의 주민들이 우리를 위해 기둥까지 뽑아가며 우리를 반겼었다. 맨손으로 흙을 만져가며 바쁘게 움직이던 그들의 모습은 정말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짐을 풀고 입소식을 위해 한 학교로 이동했다. 간단한 입소식을 한 후 우리는 봉사기간 동안 계속 함께할 버디들을 만났다. 언어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가며 봉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과연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그들을 보니 그냥 마음이 편안해 졌다. 언어, 국적, 문화같은 것들은 달랐지만, 쓰나미로 인해 피해입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만은 통했던 것 같다.

내 버디와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서로에 관한 여러 얘기를 하고, 간단하게 마타라 시내 구경을 했다. 버디의 설명을 들으며 한곳한곳 보는데, 정말 멋진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버디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날씨 탓인지 내 몸은 많이 지쳐 있었다. 남자 봉사단의 방에서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잠을 자기 위해 누웠는데 깜깜한 천장에서 작게 움직이는 불빛 3개가 보였다. 날라다니는 것으로 보아 반딧불이인 듯 했다. 정말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내일을 위해서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 키툴레왈라 사원 쓰나미 캠프장으로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오전에는 캠프장 내 복구 활동이 있었다. 버디들이 우리를 위해 망고, 코코넛 등을 직접 따다 주기도 했다. 잠깐 쉬는 시간에는 그 곳의 특산물인 홍차를 먹기도 했다. 날씨는 덥고 벌레가 많아서 조금 힘들기도 했지만 현지 버디와 함께 일을 하면서 더 친해질 수 있었고, 우리도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오전 활동을 마치고 숙소로 가서 버디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휴식시간에 식당에 다같이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르는 노래였지만, 모두 흥겹고 신이나는 가락이었다. 알아듣지 못해도 서로 통하기는 하는 것 같았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오후 활동을 위해 다시 키툴레왈라 사원 쓰나미 캠프장으로 갔다. 오후 활동인 기능활동은 우리가 그들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한쪽에서는 페이스 페인팅이 한창이었고, 한쪽에서는 매직풍선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는 버디와 돌아다니며 마을 주민들의 명찰을 만들어주었다. 말이 많이 통하진 않았지만 소통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자신의 목에 걸린 명찰을 보며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기능 활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영화 상영을 위해 다시 캠프장으로 갔다. 사원 내의 작은 강당 같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스리랑카의 만화 영화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지 하나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현지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보아서인지 그냥 재미있고 웃음이 나왔다. 실질적인 봉사로는 첫 날이어서 그런지 피곤했던 것 같다. 숙소로 돌아가 바로 잠이 들고 말았다.

5월 10일. 마타라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이 날은 쓰나미 피해학교인 서비투어스 학교에 갔다. 교문으로 들어서는 우리에게 환영의 의미라는 나뭇잎 몇장을 건내고 작은 공연도 하며 반기는 그들의 모습에 다시한번 힘이 불끈 솟았다. 대강당에 모여 작은 환영식을 하고 본격적인 물청소에 들어갔다. 우리 충북 센터는 경기, 충남과 함께 대강당을 맡았다. 우선 강당 뒤에 높이 쌓여있는 책상과 걸상들을 앞으로 옮기고 뒤이서부터 청소를 시작했다. 버디와 함께 책·걸상도 나르고, 더러워진 책상도 닦았다. 물이 흥건한 바닥은 현수막을 길게 늘어뜨려 모두다 함께 직접 손으로 밀며 열심히 닦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하던 일을 중단하고 근처 해변으로 갔다. 버디들과 다 함께 모여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비록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아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모두다 둘러 앉아 높에 이는 파도를 보며 먹으니 기분만은 정말 좋았다. 점심을 먹고 해변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우리는 다시 학교로 이동했다. 하던 청소를 마저 하려 강당으로 들어선 우리는 깨끗이 정돈 된 강당의 모습에 놀랐다. 우리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학교측에서 강당을 정리해 둔 것이었다. 도와주러 와서 괜히 피해만 주는 게 아닌가 싶고 미안했다. 강당 정리는 다 됬고, 나무가 썪어서 쓸 수 없는 책·걸상들만 치우면 청소는 끝이었다. 일렬로 늘어서서 전달해서 옮겨서 쉽게 끝날 수 있었다.

청소가 끝나고 강당에서 작은 문화 공연이 시작됐다. 제주 센터의 음악줄넘기와 전남, 경기 센터의 태권도 시범이 있었다. 공연에 이어 바로 기능활동이 시작됐다. 강당 안에선 매직풍선을 밖에서는 종이 접기를 했다. 그 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나와 풍선과 종이접기를 받기 위해 모여들었다. 작은 종이학이나 풍선 왕관 하나에도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까지 순수해짐을 느꼈다.

서비투어스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 회의를 위해 남자방에 모여있는데 코코넛을 한아름 가지고 현지인 한명이 들어왔다. 코이카 회원들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간식인데 현지인이 직접 잘라서 주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그 분은 우리앞에 서는게 떨려서 전날 저녁에 잠도 설쳤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직접 코코넛을 자르는데 물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재미있었다. 간식 시간이 끝나고 야광별 만들기를 했다. 우리 봉사단 마크와 현지어와 우리나라 말과 영어를 써서 그 위에 야광별을 붙여서 밤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볼 수 있게 하려고 만든 것이다. 우리 충북 지역은 충남과 함께 우리나라 말과 영어를 맡았다. 야광별 만들기를 하면서 다른 지역과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많이 피곤했던 하루였다. 그리고 그 피곤이 그날 밤 터져버렸다. 자다가 갑자기 열이 올라서 언니들이 간호를 해 주었다. 옆에서 간호해 주는 언니들한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괜시리 눈물이 났다.하지만 내일을 위해 마음을 다시 잡고 빨리 나으려 노력했다.

다음 날 아침 다행히 열은 내렸지만 그만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머리가 흔들리고 속이 울렁거렸지만 참고 봉사를 나갔다. 사원에 방문해서 스님 말씀을 잠깐 듣고 해변으로 나무를 심기 위해 갔다. 하지만 몸에 계속 힘이 빠지고 머리가 아파서 참지 못하고 오전 내내 쉬가가 점심시간에 숙소로 돌아왔다. 피곤을 떨치려 오후 내내 잠만 잤다. 그런 내 노력에도 머리는 계속 아팠다. 그래서 다음 날도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마타라에서의 아까운 시간을 하루나 숙소에서 보내고 말았다.

점심 시간에 점심을 먹으러 온 버디들과 비록 인스턴트 식품이었지만 한국 음식을 먹고 오후에는 기능활동을 하러 아너버리커 솔레나 캠프장으로 갔다. 그늘 하나 없는 그 곳에서 판화, 제기, 매직풍선 등을 하며 캠프장에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원래 충북 센터는 제기차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제기를 차지 못해서 일손이 딸리는 매직풍선을 배워 그 일을 도와줬다. 처음 하는 거라 많이 미숙하고 부족 했지만 내가 만들어준 풍선들을 보며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좋았다. 몸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 상태만은 최상이었다. 그날 밤 이제는 많이 정든 봉사단 사람들과 둘러앉아 게임도 하고, 얘기도 하면 재미있는 밤을 보냈다.

5월 13일. 마타라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지막 마을 축제날이다. 우리를 반겨주고 많이 도와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작은 공연과 만찬을 준비했다. 오전에는 숙소 주변의 철조망에 풍선도 붙이고, 그동안의 활동 사진도 붙이며 주위를 꾸몄다. 또, 만찬이 있을 식당 안과 주변에는 만국기와 풍선으로 장식을 하고, 한국에서 그 곳에 사람들을 위해 학생들이 써준 격려의 글도 붙여 놓았다. 나는 식당 앞에 앉아서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공에 바람을 넣고, 식당 안에 만국기 다는 일을 도와 줬다. 하지만 결국 그 공은 쓰이진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숙소 옆에 있는 캠프장으로가 그들의 학교라는 곳에 무대 셋팅을 했다. 뒤에 우리 봉사단을 알리는 현수막도 붙이고, 만국기도 달았다. 만국기 다는 것을 도와주며 있는데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들이 들뜬 표정으로 속닥이며 내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후 한 여자아이가 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What's your name?".

아이들은 이 한마디를 건내고 싶어서 자기들끼리 속삭이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내 이름을 알려주고 다시 되물으며 그 여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자 함께 속삭이던 아이들이 다같이 몰려와서 자신들도 다 이름을 물어 보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영어인 것 같았다. 내가 웃으면서 대답해 주자 그제서야 자신들도 웃으면서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의 그 순수함에 마냥 웃음이 나왔다.

무대 셋팅이 끝나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명찰 만들기와 페이스페인팅, 매직풍선 등을 마타라의 주민들을 위해 해 주었다. 공연준비 때문에 손이 많이 모자란 매직풍선 팀에 나도 가세했다. 비록 왕관과 강아지밖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그것 하나에도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며 뿌듯했다. 아파서 누워있는 자신의 손녀딸에게 주고 싶다며 만들어 달라던 할머니의 모습 또한 너무 인상적이었다.

기능활동을 마치고 양국의 공연이 이어졌다. 스리랑카의 전통무용과 한국의 태권도, 음악줄넘기, 율동 등을 하며 두 나라는 한마음으로 함께 어울렸다. 스리랑카 여자들의 전통무용은 정말 멋진 공연이었다. 또, 우리 태권도 격파 시범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공연을 마치고 단체사진은 찍은 뒤 마지막 만찬을 위해 버디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버디들과 아리랑도 배우고 율동도 배우며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다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돌면서 아리랑을 부르는데 버디들은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좋아했다. 버디들과 모여앉아 저녁식사를 가진 후 우리가 준비한 선물과 버디가 준비한 선물도 교환하고, 이제까지의 활동 기록이 남은 영상들을 보기도 했다. 늦은 밤이 돼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버디를 보면서 많이 아쉽기도 했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헤어져야만 했다. 그렇게 마타라에서의 마지막 날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5월 14일.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마타라에서의 마지막 조회를 마치고 6일동안 묶던 정든 숙소를 떠나 콜롬보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일정이 없는데도 찾아와준 버디들도 몇몇 있었다. 떠나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에 괜시리 마음이 찡해져 왔다. 창 밖에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던 그들에게 우리도 끝까지 함께 손을 흔들며 대답해 주었다.

차를 타고 조금 나와서 한 사원으로 들어갔다. 사원 안에는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거대한 불상이 있는 사원 안으로 들어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했다. 사원에서 나온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콜롬보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해변에 차를 새우고 도시락도 먹고 바다에 발을 담그고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5시간을 걸려 콜롬보에 도착했다. 우리가 묶을 호텔이라는 곳을 들어섰을 때 나는 다시한번 놀랐다. 겉만 보아도 너무 좋은 호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봉사하러 와서 힘든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도 주지 못했는데 아무리 하루지만 이렇게 호화스럽게 지내도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에서 3-4시간 가량을 쉬고 마지막 만찬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우리 봉사단을 위한 많은 것들이 준비 되어있었다. 식사 전에 소감발표가 있었다. 골과 함반도타 지역에 이어 우리 마타라 지역의 발표가 시작됬다. 우리 마타라 지역은 특별히 몇일 밤을 고생해서 만든 지금까지의 활동을 영상으로 만든 것이 틀어졌다. 약 10분가량의 그 영상을 보면서 6일 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갔다.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해보니 내가 이곳에 많이 적응하고 잘 지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왠지 마음이 울컥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제 정든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울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사진도 찍으면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한참을 울고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됬다. 요리사 아저씨들이 땀 흘리면서 만든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와의 음식과는 다르게 내 입맛에 맞아서 너무 좋았다. 식사를하고 있는 우리 옆에선 작은 공연이 이루어 지기도 했다.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우리가 이렇게 호화스럽게 즐겨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하러 와서 이게 뭐하는 것인지 부끄럽기도 했다.

만찬을 마치고,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다같이 모여서 놀았다. 그동안의 소감도 이야기 하고 아쉬웠던 점도 이야기하면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은 평소와 다르게 아침에 편히 쉴 수 있었다. 11시에 모여서 호텔을 나섰다. 호텔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6일간 너무나 그리던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한국 음식점에 가서 된장찌개와 비빔밥을 먹었다. 한국에서 먹었다면 그리 맛있는 음식은 아니였을 것 같지만 그 날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이었다.

점심을 다 먹고 우리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다는 빌딩으로 갔다. 맨 꼭대기 층으로 가서 전망을 구경하고 내려와 우리나라 회사인 한진해운에서 준비한 다과와 음료를 먹고 그 건물에서 나섰다.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우리는 콜롬보 공항으로 향했다. 얼마 후면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아쉬움이 밀려 오면서 우울해졌다. 준비를 다 마치고 스리랑카 땅에서 마지막 발을 떼고 비행기로 올라 타는데 마음 한켠이 이상함을 느꼈다. 몇일 전만해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비행기에 올라 타는 게 너무 싫었다. 아쉽지만 그곳을 떠나 또 약 12시간에 걸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조촐하게 해단식을 하고 이곳 저곳에서 작별인사를 하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분명히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아쉽고 헤어지기 싫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우리는 둥글게 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돌면서 아리랑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는 한명한명과 악수를 하고 포옹도 했다. 한참을 사진만 찍다가 버스를 타야 하는 관계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모두와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청주로 향하면서도 인사를 제대로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번 봉사활동은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겨줬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좋은 경험도 많이 했다. 일생을 살면서 이런 기회가 많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이 좋은 기회를 잡은 내가 행운아라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이 경험들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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