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출신 독립 운동가- 석창문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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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변순희 | 등록일 | 12.06.05 | 조회수 | 249 |
우리 나라를 지키셨던 우리고장 독립운동가
석창문 선생님의 애국정신을 알아보고
우리도 나라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읍시다.
“보훈의식이 바로 서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2012년 06월 우리 고장 출신 이 달의 독립운동가】 석창문 선생
( 1886.07.06. ~ 1908.09.10. )
◈1991. 건국훈장 애국장◈
석창문은 충북 보은 속리산 출신이다. 키가 작으나 매우 용맹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어렸을 때 가세가 빈한하여 상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속리산중에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버리고 한봉수의 참모장이 되었다. 출전할 때마다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일병들이 그를 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출입할 때마다 병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1908년 5월 의병장 한봉수· 김규환과 함께 약 40명을 인솔하고 청주 산외일면 초정동에서 일인기병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오는 것을 확인하고 좌우의 산기슭에 매복하였다가 이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 석창문이 선두의 일본병을 저격하여 사살하고 접전 중 나머지 일인이 퇴각하자 우편물과 현금 이천여 원을 탈취하여 군자금에 썼다. 그해 봄에 석창문이 적정을 탐색하기 위하여 홀로 의진을 떠나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 적 수십 명에게 창졸지간에 포위되었다.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틈을 보아 도주하였으나 적의 추격을 받아 주머니칼을 꺼내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체포당하였다. 적이 그를 심문하여 의진의 근거지를 알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석창문은 "이미 사로잡혔으니 내가 죽을지언정 남을 끌어들이겠느냐" 하며 혀를 깨물며 자백하지 않았다. 적이 보은군으로 그를 끌어내려서 살해하였다.
일설에는 스스로 신랑을 끊어 자결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순국 당시 그의 나이 24세에 불과했다. 시신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온 집안이 놀라고 슬퍼하였으나, 그의 처는 태연히 예로써 장례를 지내었다. 그 사흘 후 부인마저 20세의 나이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때 범어사 만세운동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 프랑스로 유학하여 피압박민족대회 한국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법린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민족독립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품은 선생은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항일불교의 중심사찰인 범어사로 승적으로 옮겼으며,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다. 이 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다. 1917년 선생은 범어사의 인재양성 책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유심]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였으며,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항일비밀결사 한국민단본부의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밀령에 의하여 한국독립을 위한 사료의 집성과 전달을 주도하고,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의용승군을 조직하고 조직체가동을 위해 국내를 오가며 기밀부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져오자 선생은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하였고, 넓은 안목에서 조국 독립을 모색하고자 유학을 결심하고 1923년 11월, 프랑스 파리대학교(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같은해 12월,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서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28년 초, 불교계의 요청으로 귀국한 선생은 강연 및 기고 활동은 물론 조선불교청년회 재건,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 개최를 주도하여 일제 사찰령을 부정하는 등 불교계의 자주화를 위해 힘썼고, 학문적 정진을 위하여 일본 유학을 단행하였다. 이즈음 국내 불교청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이 결성되자, 선생은 만당 일본지부를 결성하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2년 3월 귀국 후 교육을 통한 민족자각에 힘쓰던 선생은, 1938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이 노출되어 진주경찰서에 3개월간 수감되었으며, 범어사로 돌아와 강의를 계속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45년 1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불교계 지성인으로서 독립을 위해 앞장선 선생은, 해방 후에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문교부장관, 제3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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