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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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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작성자 이재성 등록일 15.07.26 조회수 26
평생 피아노곡 밖에는 쓰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쇼팽은, 그 분야에 있어서는 영원한 왕관을 쓰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교향곡에 있어서의 베토벤, 실내악곡에 있어서의 하이든, 가곡에 있어서의 슈베르트처럼, 피아노에서의 쇼팽은 분명히 왕자이며 유일자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가을의 달빛을 느낀다. 그것은 창백한 은빛이 교교하게 만물을 비추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에 몸을 맡기는 모든 사람은, 달빛에 정화되어 고요히 빛나는 마음 속에서 꿈꾸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러나 그 환상적인 시인 쇼팽도, 한편으로는 고국 폴란드를 생각할 때 열렬한 애국의 정으로 건반을 피로 물들이는 정열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어 교사를 아버지로, 폴란드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네 아이 중의 하나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와 가까운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1810년 3월 1일).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 이미 신동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2세 무렵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에게 이론과 작곡을 배웠고, 아달베르트 지부니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이후 쇼팽은 아무에게서도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으며, 1824년에 들어섬과 동시에 갑자기 음악에 몰두하여 그 이듬해에 최초의 작품 「론도」를 출판했다. 1828년 아버지의 친구 야로츠키 박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갔는데, 거기서 받은 자극으로 귀국 후 그의 음악 활동은 한층 활발해졌다.

20세 때 빈에 나갔는데, 그는 그 곳에서 모국의 슬픈 소식을 받아 들었다. 함께 빈에 나간 친구들이 모국의 위급에 앞을 다투어 귀국할 때 귀국하여 군대에 입대할 수 없었던 그는, 피아노에 의지해서 애국의 열정을 작곡에 기울이는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는 파리로 나갔다. 동경하던 파리는 무명의 천재를 당장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폴란드에 호의를 보였던 프랑스의 사교계는, 얼마 후 섬세하고 고상한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 다행히도 리스트가 재빨리 이 천재를 인정하여 파리 악단에 소개했기 때문에, 파리는 안심하고 그를 피아노의 명연주가로서 환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작곡 면에서도 새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게 되었다.
우리도 이러한 점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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