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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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혜인 | 등록일 | 17.04.16 | 조회수 | 24 |
1405년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긴 태종은 다음으로 교육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 때 필요한 것이 강한 힘(무인)이라면,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념(문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권근을 시켜 유학의 기초가 담긴 <소학>(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등을 모은 책)을 기본으로, 유교적 이념을 글로 쓰고 실천하는 능력까지 키우는 교웃과정 '권학사목'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한양에 사부학당을 만들기 시작해 남부학당을 완성했고, 지방에는 향교에서 이런 교육과정을 운영하게 했다. 당시 백성들이 옷감으로 바쳐야 했던 세금, 호포세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호포세를 폐지하고, 대신 관리들에게 주던 혜택을 줄였다. 당시 공을 세운 신하들은 '공신전'이라는 땅을 받았는데, 태종은 상속이 가능하던 이 땅을 당사자가 퇴직하는 즉시, 나라로 다시 돌려주는 걸로 바꿨다. 또, 땅을 받은 관리가 죽은 이후 부인에게 주던 땅인 '수신전', 부모가 모두 죽은 뒤 자식에게 주던 땅인 '휼양전'도 제한했다. 태종은 전국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8도로 확정짓고, 각 도에 정부에 소속된 관찰사를 파견했다. 이를 통해 조선 어디라도 태종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했다. 그리고 이때 만든 행정구역과 관리 파견제도는 480년 넘게 유지되면서 조선 운영의 기본이 되었다. 호시탐탐 조선의 해안 마을을 약탈해 가는 왜구들은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태종이 누군가, 고려 시대부터 아버지인 태조와 함께 왜구들을 소탕하며, 유명해진 장수 아니겠는가. 태종은 각 도마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배를 10척씩 만들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1410년에는 병선 200척을, 1413년부터 1415년까지는 적진을 무너뜨리는 돌격선 '거북선'을 만들었다. 모두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 만든 줄 알고 있지만, 사실 거북선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고, 태종에 의해 개량된 것이다. 이순신이 여기 다시 지붕을 덮고, 뾰족한 침을 박아 적군이 배 지붕에 올라 타지 못하는 구조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다. 의정부는 태종이 명령을 내리면, 명령을 한번 더 심의하고, 의결하는 곳이었다. 태종의 명령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왕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 태종은 대부분 이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 왕권이 의정부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의정부를 거치는 단계를 과괌하게 생략, 왕의 명령을 중앙관청인 6조에 직접 내렸고, 결과 보고도 6조의 수장들에게 직접 받았다. 이 덕분에 의정부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고, 왕권은 더욱 광화될 수 있었다. 이후 태종은 유교 이념을 법으로 만드는 데 신경 썼다. 그렇게 처음 만든 것이 서얼차대법이었다. 첩을 어머니로 둔 서얼의 경우 과거시험 문과 응시를 제한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게 했다. 또한 양반 부녀자의 재혼을 금지했고, 만약 재혼을 할 경우 그 자녀들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했다. 이건 모두 유교적 덕목에 맞게 사회를 이끌어 가려는 태종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수많은 서얼 출신 인재들이 등용되지 못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나랏일보다 더 어려운 게 자식 일이었다. 태종은 자기 자신이 장자가 아니어서 와위에 오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정통성을 의심받은 만큰, 다음 왕만은 꼭 장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장자인 양녕 대군을 11살의 어린 나이에 미리 세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양녕은 이런 태종의 마음을 몰라주고, 자꾸만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 소소한 일들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애썼지만, 양졍의 일탈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에 급기야 양녕이 관료의 첩인 어리에게 반해, 밤에 몰래 궁을 빠져나가 연애를 즐긴 것이다. 얼마나 자주 궁을 나갔는지, 양녕이 다니는 궁궐의 개구멍이 반질반질하다는 상소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유교를 강조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양녕을 크게 혼낸 뒤, 다시는 이런 일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받았다. 그런데 양녕은 태종의 마지막 믿음조차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어리를 비구니로 변장시켜 궁궐 안으로 몰래 불러들인 것이다. 이것이 신하들에게 들키고 알았으니 양녕을 세자에서 폐할 수밖에 없었다.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폐한 뒤, 태종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왕위 계승 순위로 보면 양녕 다음으로 세자에 오를 사람은 둘째인 효령 대군이었지만, 효령이 불교에 심취해, 스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셋째 충녕에게 순서가 갔다. 천만다행으로 충녕은 누구보다 똑똑하고, 영특했다. 그의 스승은 충녕이 너무 공부난 해서 건강을 해칠까 봐 밤에 책읽기를 금지시킬 정도였다. 태종의 눈에도 충녕은 자신의 뒤를 이어 조선을 가장 잘 이끌어나갈 자식으로 보여?? 그 결과 태종이 꿈꾸던 장자 계승 대신, 셋째 충녕 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충녕 대군을 세자로 삼은 지 1년 만에, 태종은 와의 자리에서 내려올 것을 결심했다. 무려 18년이나 호랑이 등을 탄 것처럼 ㅊ위태롭고, 힘들었던 왕의 자리에서 그만 내려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뒷방 늙은이로 지낼 수만은 없는 일. 병권만은 굳게 쥐고, 나머지 모든 권한은 충녕에게 주었다. 이 충녕 대군이 바로 후세 삶들이 조선 최고의 왕으로 평하는 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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