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세금을 내고, 군사로 동원할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있는지 알아야, 나라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태종은 1402년부터 전국적인 호구조사를 실시해, 만 16살 이상의 남자를 파악했다. 그리고 1413년부터는 그들에게 호패를 나누어 줘, 항상 가지고 다니게 했다. 호패는 지금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이름, 출생년도, 신분이 기록돼 있어서 백성들은 호패를 통해 조선의 백성임을 인정받으며, 세금과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는 조선 통치 체제의 기본이 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조선을 바로 세우고, 왕권 강화에도 성공했지만, 태조는 여전히 태종이 탐탁지 않았는지 조사의를 내세워 난까지 일으켰다. 조사의는 태종이 1차 왕자의 난 때 제거했던 세자 방석의 친척으로, 원수를 갚겠다며, 1402년 태조를 등에 업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조사의 세력 자체는 제압이 어렵지 않앗지만 문제는 그 뒤에 태조가 있다는 거였다. 자칫 태조와 태종이 싸우는 형국이 되면 어렵게 강해진 왕권이 다시 흔들릴 수 잇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태종은 최대한 빠르게 조사의의 반란군을 제압한 뒤, 태조도 함흥에서 개경으로 옮겨와 살게했다. 난을 실패한 태조도 어쩔 수 없이 태종의 말을 따랐다. 이제 태종에게 남은 과제는 조선의 문화를 융성시키는 일이었다. 그리서 태종은 1403년, 주자소를 설치해 활판을 만들게 했다. 기존의 금속활자보다 더 크고, 튼튼한 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이 직접 관리, 감독해 '계미자'란 활자를 만들고, 나라의 기본 법을 정리한 <<고려사>>를 완성했고, 삼국 시대의 역사를 조사하라는 명도 내렸다. 유학을 널리 퍼트리려는 태종의 의도와 달리,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가 대세였다. 이때문에 전국의 절이 가진 땅과 노비 수는 엄청났다. 하지만 이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전국의 절 대부분을 폐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땅과 노비를 나라에 흡수시킨 것이다. 이로써 태종이 상상하던 조선의 모습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고민은 다음 왕을 누구로 정하느냐뿐. 하지만 자식 문제는 정말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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