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이 2년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국ㄴ주가 이방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2차례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 방원의 힘이 확인되었고, 방원 역시 줄곧 왕위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유교를 뿌리로 둔 조선에서 형을 밀어내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명분이 너무나 부족했따. 그래서 2년여를 기다린 끝에 1400년 11월, 신하들이 정종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줄 것을 요청하고, 이를 정종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방원은 조선 3대 왕자리에 올랐다. 방원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조선의 체계를 세우는 데 집중했다. 그중 방원의 1순위 목표는 바로 '왕권 강화'였다. 1398년, 신권 중심의 조선을 꿈꾸는 정도전을 막기 위해 난까지 일으킨 만큼,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 조선의 모든 힘이 왕에게 집중되도록 애를 썼다. 또, 조선의 모든 기준을 '유교'에 맞추었으며, 백성들이 잘살 수 있도록 '경제 정책'에도 신경을 썼다. '군사 정책'또한 놓치지 않고 챙겼다. 그 결과, 후대에선 '조선의 모든 체제와 기반은 태종대에 나왔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정적을 가차 없이 제거하며 왕이 된 방원은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건 오해다. 왕이 된 이후, 관료들과 왕의 잘못을 간언하는 사간원을 독립시켜 사간원의 말단 관리들도 방원에게 직접 이야기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덕분에 고위 관료들의 권력 남용과 비리를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간원 관리들의 직언은 왕인 방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방원은 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직언을 하는 사간원 관리들을 유배 보내거나 감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금세 복직시켜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이 때문에 당시 사간원에서는 감옥살이나 유배를 영광으로 여겼을 정도다. 방원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Y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개경의 도성 앞에 신문고를 만들었다. 신물고는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임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두드려 알릴 수 있는 북이다. 이처럼 방원은 왕이 된 뒤,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백성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기 위해 노력샜다. 물론 그 밑 바탕에는 백성들의 지지가 있어야만 왕권이 제대로 선다는 '왕권 강화'를 위한 포석이 숨어 있었지만 말이다. 방원의 최대 목표인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또 필요한 게 있었다. 바로 나랏돈! 그래서 방원은 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조선 전체 토지를 조사하고, 그 토지에서 거두는 세금인 조세 제도를 정비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세금을 곡식으로 받았는데 육지의 좁은 길로 옮기다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개경에 닿기도 전에 썩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방원은 '조운선'이라는 배를 만들어 물길을 이용해 세금을 거두도록 했다. 방원의 재임 기간 중 무려 251척의 조운선이 새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해운 기술이 발달해 방원의 집권 후기 거북선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아내인 원경왕후 민 씨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어. 민 씨는 1차 왕자의 방원은 때 숨겨놓았던 무기를 방원에게 내주었고, 처남들은 방원을 위해 앞장 서 싸워 주었다. 그 결과 방원이 왕위에 오른 뒤, 민 씨와 그 가족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외척의 득세는 왕권 강화의 걸림돌. 그래서 방원은 즉위 2년 후부터 젊은 후궁을 들여 새로운 외척들을 만들고, 민 씨 주변의 사람들을 벌하며 민 씨 외척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러자, 더이상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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