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이성계는 뼈대 있는 전주 이씨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함경도까지 도피한 고조할아버지 이후 함경도에서 살게되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무술을 익혔다. 그리고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왜구를 소탕하면서 고려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패배란 모르는 남자였고 전쟁에서 백전백승을 거두며 고려에서 가장 유명한 장수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 잇따른 승리로 명성을 쌓은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넘어가 중앙 정계에 데뷔했다. 그리고 많은 공을 세우며, 대장군인 최영 다음의 2인자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는 날, 중국 땅에서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가 고려에 철령 이북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에 최영응 명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이성계에게 명나라 땅인 요동까지 정벌하라고 명했다. 이성계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요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원나라를 무너뜨릴 정도로 기세등등한 명나라와 싸워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셋째 군대를 모두 동원해 정벌을 나가면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이다. 넷째, 장마철에는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군사들이 역병을 앓기 쉬워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4불가론'을 들어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이성계는 수많은 명사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요동 정벌에 나서는 것보다, 부패하고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고려 조정을 뒤엎어 병사들과 백성들을 살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요동 정벌에 이성계의 군사는 물론 최영 장군의 군사까지 모두 투입된 상태라, 개경 왕궁은 빈 곳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요동 대신 고려 궁으로 돌아와 1인자였던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 우왕을 강제로 자리에서 내쫓았다. 처음부터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나라까지 세우려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도전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 이성계도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오랜 친구이자, 고려 조정의 중심이던 정몽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틀안에서 개혁을 통해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따. 가장 친한 친구와의 의견 차이는 결국 극단적인 군사 대결로까지 이어졌다. 대결은 시간이 갈수록 첨예해졌다. '이제 누가 먼저 공격을 하느냐'라는 문제만 남게됐다. 하지만 이성계는 그때까지도 친구였던 정몽주를 없앨 결심이 서지 않았다. 이런 이성계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만났다.이방원은 <하여가>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는 마음을 전했지만 정몽주는 <단심가>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밝히며 끝내 거절했다. 이에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의 목숨을 거두었다. 친구로서는 애석했지만, 이로써 반대파가 사라져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1392년, 이성계는 드디어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웠다. 조선을 세운 당신 이성계의 나이는 57살.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이 40대였던 걸 생각ㅎ하면,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그래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 시급했다. 물론 조선의 건국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아들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었지만, 당시 이성계의 둘째 부인은 자신의 아들 중 막내인 이방석을 세자로 앉히길 원했고, 국정 파트너인 정도전 역시 이방석을 세자로 추천했다. 결국 이성계는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게 비극의 시작일지는 그땐 까맣게 몰랐다. 이성계는 무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되어줄 국정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래서 손잡은 이가 바로 정도전 이었다. 정도전은 왕의 권한, 인재 선발 방법, 국가의 전반적인 제도와 기틀을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 냈다. 게다가 고려를 멸망시킨 이성계가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경에 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는데, 정도전은 한양 천도와 경복궁 건설까지 지휘하며 이성계의 고민까지 깔끔히 해결해 줬다. 한양 천도는 풍수지리설에 따랐는데 이미 지덕이 쇠한 개경을 떠나, 지덕이 흉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 근거였다. 조선 건국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도 세자가 되지 못한 이방원의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방원을 세자로 세우기엔 너무 위험했다. 야심이 너무나 커서 큰 힘을 가지면 다른 형제들에게 해를 끼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도전 역시 같은생각 이었다. 그들은 방원의 병사들을 해산시켜 이런 우려를 예방하려 했다. 하지만 이에 참다못한 방원은 난을 일으켰고, 결국 세자는 물론, 정도전까지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아들의 손에 세자와 국정 파트너까지 잃은 이성계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방원은 난을 성공시킨 뒤, 살아있던 형들중 가장 나이가 많던 둘째 방과에게 와의 자리를 양보했다. 이에 이성계는 상왕으로 물러나,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으로 떠났다. 방원은 이런 이성계에게 사신을 보내 사과하려 했지만, 그는 방원이 보낸 사신을 죽이거나, 가두어서 끝끝내 사과를 받지 않았다. 이후 사람들은 심부름을 보냈는데 오지 않는 이를 가리켜'함흥차사'라고 부른다. 이성계의 이야기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와 정도전을 죽인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성계가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것은 처음 알게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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