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3반

안녕하세요. 여러분! 항상 건강하고 밝은 우리반 학생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돕고 배려하는 우리
  • 선생님 : 조명옥
  • 학생수 : 남 13명 / 여 11명

조선여성들의 생활

이름 강민경 등록일 18.03.23 조회수 31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쓴 시는 이이의 〈선비행장〉에 〈유대관령망친정()〉, 〈사친()〉, 〈낙구()〉 세 작품이 수록되어 전해진다. 칠언()과 오언()의 한시()인 이 작품들은 모두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을 나타내고 있는데, 격조를 갖추어 그러한 감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신사임당이 쓴 것으로 알려진 글씨는 현재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신사임당초서병풍()〉,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두 폭의 〈산수도〉에 제화()로 당시()의 구절들을 적어놓은 것 등이 전해진다. 특히 종이에 당나라 때의 오언절구 6수를 초서로 쓴 〈신사임당초서병풍〉의 글씨는 짜임이 단정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차분한 풍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글씨는 그녀의 아들인 이우와 황기로(), 백광훈() 등의 서체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어서, 일부 학자들은 이들을 ‘사임당서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사임당의 그림에 관해 이이는 〈선비행장〉에서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은 〈신사임당묘갈문()〉에서 “서화()에 있어서도 묘경()에 이르러 이것을 얻은 자는 구슬을 안은 듯이 보배로 여겼다”고 기록하였으며,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신사임당의 포도그림과 산수화가 안견에 버금간다고 적었다.

오늘날 신사임당의 그림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들은 〈산수도()〉, 〈초충도()〉, 〈묵포도도()〉, 〈노련도()〉, 〈어하도()〉 등이 있다. 안견과 중국 명나라 초기의 산수화 유파인 절파()의 영향이 드러나는 〈산수도〉는 대담하고 간결한 구도로 산수를 묘사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 기법이 동시에 나타난다. 강릉의 오죽헌박물관에 있는 〈신사임당초충도병()〉에는 8폭의 초충도가 전해진다. 여기에는 오이와 메뚜기, 접시꽃과 잠자리, 수박과 여치, 가지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개구리, 양귀비와 풀거미, 봉숭아와 잠자리, 원추리와 벌이 섬세한 필치와 구도로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 이후에 제작된 화첩 등에 신사임당의 것으로 수록되어 있는 그림들이 다수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사임당 [申師任堂] (두산백과)

허난설현.

허난설현(1563~1589)은 26년 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이다.
조선은 성리학 중심의 사회로 여인은 단지 집안을 지키고 후세를 잇는 역할을 강조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허난설현이 이름을 떨친 것이 바로 시의 탁월함 때문이다 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녀는 15세에 결혼하여 재능 많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홀대를 당하다가
몰락하는 친정과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곡자"라는 시를 통해 죽음을 예언하더니
27세라는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만약에 허난설현이 신사임당과 같은 환경이나 친정 집 같이 조금은 열려 있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여성이다. 사후에 허균이 편집한 "난설현집"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까지 영향을 주고 알려졌다.

김만덕.

만덕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 12살에 부모님이 모두 사망하여 기생의 몸종으로 의탁하였고

, 다시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가무를 익혀 제주도에서 한때 가장 유명한 기생으로 살았다

. 가난한 집안 출신에다 전직 기생이었던 독신녀를, 여성에게 엄중했던 유학을 익힌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칭송하며 전국적인 화제의 인물이 된 것은, 만덕이 객주를 운영하면서 제주도 물품과 육지 물품을 교역하는 유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이루었고, 그 부를 계속되는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살려내는데 쾌척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조시대 제주도민들이 계속되는 재해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가 풍랑에 침몰하는 불상사까지 겹쳐 아사의 위기에 처하자, 만덕은 유통업으로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을 구입하여 제주민들을 살려내었다. 당시 만덕의 인기는 남성들만 활개치는 세상에서 여자가 홀로 많은 재산을 형성하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던 것과, 어떤 남성보다 많은 양의 곡식(쌀 500섬)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쾌척한 것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뛰어난 기업가이자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자선사업가로도 오늘 우리가 충분히 만덕을 기릴만하다. 그러나 만덕을 오늘날 다시 생각하는 것은 엄중한 유교 규범이 여성을 옥죄고 있던 시기에 시대와 불화하지 않고 당시 여성에게 지워진 한계를 거침없이 뛰어 넘었던 용기를 만덕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기생으로 성공했으나 가족의 명성을 더럽힌다는 질책 때문에 기적()에서 빠져 나왔고, 가족을 원망하지 않고 기근에 처한 가족을 구함으로써 가족과 화해하였다. 또한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녀로 유교 사회에서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활발해진 해상을 이용한 유통업에 눈을떠 여성기업인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던 창의적인 개척자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만덕 [金萬德] - 시대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시대를 뛰어넘은 여성 기업인 (인물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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